시창작강의 - (508) 모험가들에게 - ① 이리 같은 이불 같은 나 같은/ 시인 김복희
모험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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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리 같은 이불 같은 나 같은
요즘엔 밤 아홉시만 되어도 자정을 맞이한 기분입니다.
걸거리의 사람들은 이른 시간부터 마신 만큼 몸을 크게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
마스크를 꼭 쓴 채 서로를 껴안거나 밀치면서 걸어다닙니다.
가게들이 점차로 문을 닫고, 배달 오토바이들이 거리에 더 많아지는 꼭 이런 시간.
나는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엔 밤눈이 밤비처럼 속살거리는데”,
“나는 무얼 바라 다만 이렇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하면서,
어느 “굳고 정하다는 갈매나무” 생각은 못하고, “나를 굴려가는” 큰 것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고,
어느 사이엔가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 “내가 쥔을 붙인” 이 방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불 속에 똑바로 누워서 이 방의 천장을, “흰 바람벽” 같은 형광등의 빛 번짐을 올려다보는 것입니다.
나는 이 시들은 참 외롭다는 말을,
참 가난하다는 말을 이렇게 비참을 두르지 않고 말하는 재주가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두보나 이백같이” 술이나 한 병, 여유가 된다면 한 독 마시고 푹 잠이나 들면 좋겠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기어코 술을 사러 일어나고 마는 것입니다.
아직 쌓이지도 않은 흰 눈을 밟으러 나가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유일하게 제 의지로 가질 수 있던 빈 것은
흰 종이뿐이었습니다.
무연한,
흰 종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손으로 감히 쓸어보지도 못할 정도로 티 없이 흰,
종이의 아름다움.
특히 내가 처음 가졌던, 흰 종이는 달력 뒷면으로,
그 부드럽게 휘어지던 흰 면의 매끄러운 감촉을 기억합니다.
그러다 흰 종이 위의 시를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읽은 시들은 세간이 없어 빈 벽을 보며,
가질 수 없던 삶의 나날을 그려보곤 하는 어떤 가난하면서 외로운 이들의 단정한 손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시들은 여러 해 동안 읽어 거의 외울 지경이 되어 나는 이,
흰 벽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도, 흰 벽을 갖고 싶다는 소망을 잠시 세겨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사면을 책으로 가득 채운 방을 갖겠다는 소망을 긴 시간 내내 가졌기에,
빈 벽을 갖겠다는 상상은 저 시들을 외우면서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쌓아놓은 이 방이 참으로 편했습니다.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 책을 뽑아서 아무데를 읽고,
빈 곳 중 아무데나 읽던 것을 꽂아놓는 나의 습관이 나를 괴롭힌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친구들은 질색합니다. 그들은 제 방에 절대 들어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일상을 뒤바꾼 이후로 빈 벽을 갖고 싶다는 소망이 나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줌 등의 화상 회의 기능으로 사람들에게 내 방을 보여주어야 할 때,
화면에 비친 제 책들이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방을 하나도 치우지 않은 느낌―이 느낌을 해결할 방법들을 제안받았습니다.
흰 커튼을 쳐라. 흰 가림막을 세워라,
사람들은 네 방 책장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을 테니 예민하게 굴지 말아라 등등-이라
상대방에게 실례를 범하는 게 아닌가 싶은 그런 걱정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점은,
정신과 몸과 마음의 가난이라고만 말하고 싶지만…… 내 실제 가난이 보인다는 점이었습니다.
빈 벽의 없음으로 인해 모니터에 반영된 나의 책장은 참으로, 참으로,
초라해 보였습니다.
내 책들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나 혼자만 볼 때는 아름답기 그지없던 책장이 모니터 속에서
내 뒤에 등장할 때는 난도질당한 나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내 생활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 마음먹은 적도 있었지만, 묘한 거부감이 들어 선뜻 손을 대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느꼈던 내 방과 내 생활의 아름다움을,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빈 벽 대신 흰 종이를 가졌다는, 이 가난을, 이 무한함을 지키겠다는 욕구를 내버려두고 싶기도 했습니다.
내가 정리에 소질이 없고, 게으르다는 말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나는 이 방이 간직한 혼란스러움과 압박감이 좋습니다.
흰 종이의 아름다움은, 저를 밀어붙이는 생활과의 긴장 간에 있을 것 같습니다.
앞에는 호랑이 뒤에는 이리, 이런 느낌이랄까요.
아니,
앞에는 절벽, 뒤에는 이불, 이런 느낌이랄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얼마나 많은 분이 빈 벽을 보유하고 계실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집이 작고, 좁고, 오래 머무르셨을수록, 빈 벽이 없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흰 벽이 있던 없든 괜찮습니다.
우리에겐 흰 종이가 있습니다.
가세요.
등 뒤를 겁내면서 가세요.
겁이 안 난다면, 겁내는 사람처럼 흉내를 좀 내보면서 가세요.
호랑이 앞으로, 절벽 앞으로, 흰 종이 앞으로 가세요.
그 앞에서 누워도 되고 앉아도 됩니다. 갔나요. 갔다면,
내 몸이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해보세요(물구나무서기든 스쿼트 자세든 좋습니다. 나는 일단 누우렵니다).
그것에서 쓰기 혹은 읽기를 시작합니다.
뒤에서 ‘나’를 보고 있는 이리 같은, 이불 같은, 나 같은.
나의 생활을 알면서 나를 보지 않는, 흰 종이를 마주보는 것입니다.
※ 이 글에서 인용한 시는 「쉽게 쓰여진 시」(윤동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남신의주 박시봉방」(백석), 「두보나 이백같이」(백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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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 김복희 산문집(김복희, 달 출판사, 2023.)’에서 옮겨 적음. (2024. 1.16.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08) 모험가들에게 - ① 이리 같은 이불 같은 나 같은/ 시인 김복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