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 등산길에 남문 성벽아래 주막거리에 이르면 많은 등산객들이 삼삼 오오 모여서 막걸리 를 마시는 걸 볼수있다.
부산은 생탁이란 막걸리와 민속주1호로 지정된 금정산성 막걸리가 있는데 산을 오르다 보면 요즘은 여자 분들도
막걸리를 자주 마시는 모습을 볼수있다
생탁 막걸리는 효모가 살아있어 달달하면서 목넘김이 부드럽고 민속주인 산성 막걸리는톡 쏘는듯 하면서도 쌀 막걸리의
특유의 알싸한 맛이라 여성들도 부담없이 즐길수 있는만큼 달달한 맛이다.
막걸리는 우리 한국인의 정서와 애환이 담겨저 있는 술이란 생각에 등산길에 간혹 한잔씩 마시게 되는데 등산길 갈증으로
목이 마를때는 한잔의 막걸리가 심심의 피로를 말끔이 풀어준다.
전통적인 막걸리 재료는 멥쌀과 밀 누룩인데 술을 빚기위해서 어떤 기술보다는 거친 밀누룩과 고두밥에 물과 혼합해서
항아리에 담아두고 술이 익으면 채로 걸러먹던 전통적인 방법으로 옛날 우리 가정에서 담궈먹덕 방식에서
일제 강점기 각 고을마다 술도가란 양조장이 하나씩 생겨나면서 부터 막걸리 맛이 변한것으로 보인다
막걸리가 보편화 대면서 5.16 군사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 대통령이 보릿고개 시절 막걸리 원료로 쌀대신 밀가루 사용을
권장 하면서부터 막걸리맛이 시금 털털한 맛으로 변했고 해방직후 부터 막걸리 판매를 일정한 구역을 정해서만 판매하도록
했기 때문에 막걸리 품질이 낮고 위생도 엉망 이었다 .
우리 사회가 박 대통령 집권후 새마을 사업으로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을 하면서 우리도 먹고 살만하고
또 도시화로 농촌의 인구수가 줄어드니 우리의 막걸리가 겨우 명맥만 유지 하다가 2010년 첨담 정보통신 시대 이후
웰빙 바람을 타고 다시한번 우리의 막걸리가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 요즘은 길거리 골목마다 대포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얼마전에 고향길에 고흥유자 막걸리를 맛본적이 있는데 유자 특유에 향과 알싸하고 달달한 맛이라 여성들도 마시기에
별 부담이 었을것같다 .그외도 매실 .복분자.배.사과 .마늘 .등 웰빙 바람을타고 막걸리도 하루가 다르게 그 맛이 변해간다
각 지방마다 그 지역의 특산물을 막걸리와 접묵해서 막걸리를 개발하고 또 막걸리의 단점인 유통기한도 늘어나
요즘은 외국으로 우리의 막걸리가 수출되고 있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각 나라마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술이 있는데 일본의 사케(淸酒) 중국의 서홍주 독일의 맥주 프랑스의 와인 맥시코의 럼
추운 나라의 보드카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나라의 위스키 보다도 우리나라 는 전통적인 농경 사회라 우리 민족이 "된장국에
보리밥을 말아먹고 배봉 "하는 민족이라 막걸리는 특별한 안주가 없어도 마시기가 좋았는데
이제는 글로벌 시대라 세계인이 우리의 막걸리를 즐겨 마시기 때문에 막걸리와 더불어 안주 개발이 시급한것 같다.
3류 와인에 불과했던 이탈리아 의 와인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것도 이탈이아 의 음식 덕분이다
일본의 니혼수(日本酒 사케) 가 스시와 사시미로 서양인의 입맛을 공락 한것도 같은 맥락이다.
간신이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 막걸리 업계가 웰빙붐을 타고 이제 조금 숨통을 튀우나 했는데 대기업에서 막걸리 시장에
뛰어들려고 지방에 몇개의 막걸리 업체와 계약을 해서 본격적인 막걸리 판매 시장에 나서는 모양이다 .
지금은 지방 각 면소재지 까지 대기업의 마트가 들어서니 일반 수퍼는 장사가 않돼 울상인데
대기업에서 막걸리시장까지 잠식하고 들어서니 겨우 몀맥만 이어가던 술도가 주조장은 이제 추억속으로 사라지는 갑다...
어린시절 조상님의 제사가 다가오면 밀 누룩에다 고두밥을 쩌서 항아리에 담아 헛간에 숨겨두면 술읶는 냄새가
골목으로 진동을 하는데 그 시절에는 세무소에서 밀주 단속을 나오면은 대밭속으로 옮겨서 꼭꼭 숨겨놓고
제삿날 어머님 께서 채로걸러서 말걸리를 조상님 제사상에 올렸던 걸로 기억된다.
채로 걸르고난 술찌게미 를 배고푼 시절이라 사카린을 타서 친구들하고 나누어 먹고 술에 취하여 얼굴이 벌것게
달아오르면 친구들이 홍시기 술먹었다고 놀리곤 했는데 알딸딸 한기분에 다리를 휘청 거리며
놀리는 친구들을 향해 "개쉐이들 느그는 오늘 다 죽었어"하면서 휘청거리다 소똥을 밝고 미끄러저서 소떵에 엉덩방아 를
찢고 정신이 홱가닥 빠저서 해롱해롱 거린기억이 난다 .
그 시절에는 배고푼 시절이라 다들 술찌게미를 먹고 얼굴이 벌게진 기억이 날것이다
재관이 선친께서 봉덕으로 이사를 오셔서 석공일을 하신걸로 기억돼는데 전답 (田畓)은 별로없고 석공일로 여렵게
사셨는데 밴조골에서 상석(床石)만들때 저의 선친께서 상석에 글을쓰고 새기는 일을 함께하고 마복산 절에 비를 (碑)
세울때 비문을 쓰고 글자를 새기는 일을 함께 하시면서 아침마다 어머님께서 막걸리를 채로 걸러 두분이서 회잔을
하시고 일을 가셔서 오후에 석양이 비봉산으로 자지러 지고 팔영산 아래 갯마을에 하나둘 씩 불을켜고 하루가
저물어 갈때면 주막집에서 막걸리 한사발로 배고품을 달래고 적당이 취기가 오르면 골목길을 들어 오시면서 목청을
가다듬고 "물어 물어 찾아왔소 그 님이 게시는곳"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던 재관이 선친의 모습이 그립다.
해창만을 막아 바다가 농토로 변하자 집앞에 뻘 바닥에 호미로 금을 그어 내땅이라 표시를 해놓고 농사를 짖던시절
오이줄기에 오이 열리듯이 많은 자식들 배불리 먹이지못해 항상 가슴 아파하다가 집아래 들녘의 노랗게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하얀 쌀밥을 자식들에게 배불리 먹일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가슴이 뿌듯 했겠는가 .
마른논에 물들어 가는 소리와 자식목에 음식 넘어가는 소리가 부모 귀에는 이세상 그 무슨 소리보다 좋다는데. ?
해창만 들녘의 노랗게 읶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친구 선친께서는 "재관아 동쪽을 바라봐라 식량이 있다" 고 하시면서
막걸리 한잔술의 가슴이 시려오면 자식들에게 배불리 먹이지 못한 가난의 서러움을 절규하듯이 토해내곤 하셨다
우리 선친 께서는 경찰직을 접고 농협에 전신인 수리 조합에서 일하셨는데 어린시절 항상 주위에 분들이 집으로 찾아
오시면은 집에서 담근 막걸리로 손님을 대접 한걸로 기억 되는데 아마 근동에서 우리집 막걸리 를 맛보지 않은분이 별로
없을것같다 .선친께서는 막걸리를 드시고 기분이 좋아지면 판소리를 자주 부르셨는데 임방울 선생의 " 쑥대머리.추억
호남가. 를 즐겨 부르셨는데 그 중에서도 지금도 기억에 남는건 앞산도 첩첩하고 뒷 산도 첩첩한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임방울 선생의 추억을 즐겨 부르시며 젓가락 장단에 당신의 옛사랑을 그리워하며 이루지 못한 꿈을 막걸리 장단으로
달랬는지도 모르겠다 .
세월이흘러 내가 옛날 우리 부모님 나이가 되니 이제 그 분들의 애환과 서러움을 막걸리 한잔술에 담아 마시던 그 마음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혜아릴수 있을것 같다 .
오래전에 가난으로 점칠된 고향 에서의 서러운 기억을 않고 서울로 간 친구 재관이가 고생끝에 자수성가 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반갑기 그지없다 . 언제 고향 길에 한번 만나면은 커다란 뚝배기에 막걸리를 가득부어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서
한잔 나누어 마시며 우리들의 지난 세월을 밤을 새워서 옛정을 나누고싶다.
이제 나도 어쩔수없이 늙어가고 세월이 흐르면 또 이땅에서 사라저 가야한다
어린 시절 사장뚱 그늘에서 말걸리 한사발로 더위를 식히며 부채를 살랑거리면서 노래하던 옛 사람들이 그립다
한여름 밤 주막집 뒷 마당에서 막걸리 잔을 앞에놓고 밤이 새도록 막걸리를 마시며 방황하던 젊은날 친구들은 지금은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 가는지 이렇게 장마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날이면 그 친구들이 그립고 보고싶어 진다
아 ~ 사람은 가고 없어도 추억의 그림자는 남는 것인가 ?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장마비가 하염없이 내리니 산에도 못가고 아내랑 부침개 에다 막걸리나 한잔하고 옛 추억속으로 빠저들고 싶다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우리의 막걸리가 최고여 !
우리 대섬 식구분 들도 밖에 쏘다니지 말고 집에서 아내랑 막걸리나 한잔씩 찌끌어 보씨요.
첫댓글 구성질 글솜씨에 취해서 단숨에 술도가니에 빠지는 기운을 느끼었답니다...술찌기미먹고 쇠똥에 미끌하던이야기까정..우찌그리 우리세대는 같은지...뉘랄것없이 다 함께 같은 고통과 같은 향수를 뿜어냈던것 같습니다...달빛소나타님의 수려한 글에 단문소설을 읽은기분으로 흔적남기고 갑니다^^
별 신통치도 않는글 함께 해주어서 감사 합니다 좋은밤 되세요.....
구수한 글이네요. 비슷한 시대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