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주대첩(幸州大捷), 덕양산에 새겨진 승리의 역사
1593년 음력 2월 12일 새벽, 한양(漢陽)에 주둔하던 왜군이 3만여 명의 병력을 7개 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幸州山城)을 공격했다.
지형이 좁아 대규모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왜군의 공격은 오전 6시경 시작되어 약 12시간 동안 계속됐다.
앞서 2월 초,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권율(權慄, 1537~1599)은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서해에서 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었다.
권율은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으로 하여금 이틀 만에 목책(木柵)을 이중으로 둘러치도록 해 방어 태세를 갖췄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했을 당시 권율은 광주목사(光州牧使)였다.
전쟁 초기인 1592년 음력 7월, 전주와 진안의 경계에 있는 웅치(熊峙·곰티재)에서 왜군을 저지해 전주부(全州府)를 지켜냈다.
이어 완주와 금산의 경계에 있는 이치(梨峙·배고개)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어 왜군이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권율은 전라도관찰사에 올랐다.
권율은 한양 수복을 위해 북상하던 중 수원 부근의 독산성(禿山城)에 진지를 구축했다.
독산성은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꼽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왜군을 물리친 권율은 다시 북상해 덕양산(德陽山)의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명군(明軍)과 힘을 합쳐 한양을 탈환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명군은 현재의 고양시 대자산 근처 벽제관 전투(碧蹄館戰鬪, 1593년 음력 1월 27일)에서 왜군에 크게 패한 뒤 물러났고, 적극적인 공세를 꺼렸다.
행주산성에 집결한 조선군은 관군과 승장(僧將)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군(僧軍), 전라도에서부터 함께 올라온 의병(義兵) 등 2,300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부녀자들까지 힘을 보태야 했다.
이들이 맞서야 할 적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필두로 한 3만여 명의 왜군이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전투를 경험한 병사들이 다수 포함된 대규모 병력이었다.
왜군은 동이 트기도 전에 진격해 들어왔다.
성 안의 조선군은 일제히 화포를 쏘고 활시위를 당겼다.
첫 번째 공격부터 왜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행주산성은 서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북쪽에는 창릉천(昌陵川)이 자리해 해자(垓字) 역할을 했다.
동쪽과 남쪽은 경사가 급해 북서쪽 한 곳만 적의 접근이 가능했다.
산성 정상에서는 적의 움직임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권율의 조선군은 행주산성의 지형적 이점에 첨단 무기를 결합했다.
변이중(邊以中)이 제작한 화차(火車)는 대량의 화살을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는 무기였다.
화차의 구조와 무장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당시 조선군의 화력 운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승자총통(勝字銃筒) 등 총통류도 활용됐다.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것으로 전해지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폭발하면서 쇳조각을 사방으로 흩뿌리는 무기였다.
오늘날의 수류탄을 연상하게 하는 화약 무기였다.
이러한 화기와 화차, 활을 비롯한 다양한 무기가 지형과 어우러지면서 조선군은 수적 열세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투가 길어지면서 조선군도 수세에 몰렸다.
화살이 바닥을 드러내자 돌을 던지는 투석전(投石戰)이 벌어졌고, 왜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한강을 통해 화살을 실은 배들이 나타났다.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金千鎰)은 군사를 이끌고 후방에서 지원했고, 전라도의 조운선(漕運船)들이 양천(陽川) 포구 일대에 이르러 보급을 도왔다.
관군과 의병, 승군, 부녀자들은 힘을 합쳐 거듭되는 공격을 막아냈다.
수적으로 열 배가 넘는 적과 맞선 조선군은 일곱 차례에 걸친 공격을 물리쳤다.
'칠전칠승 신호지세(七戰七勝 晨虎之勢, 굶주린 새벽 호랑이 기세로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이기다)'.
행주대첩 때 맹수 같았던 조선 군의 기상을 표현한 말이다.
왜군은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사상자가 1만여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행주대첩은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진주대첩(晉州大捷)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으로 꼽히며, 조선군이 한양 수복을 향한 전세를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답사는 행주산성 대첩문(大捷門)에서 시작한다.
대첩문을 들어서면 권율 장군 동상과 그 배경을 이루는 네 편의 부조(浮彫)가 눈에 들어온다.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김세중(金世中)이 고증과 연구를 거쳐 재현한 작품이다.
의병과 승군, 여성들까지 함께 싸웠다는 사실이 부조에 잘 담겨 있다.
호남에서부터 권율을 따라온 의병들은 칼과 도끼를 들고 전투에 나섰다.
승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은 적과 육박전을 벌이며 왜군을 막아냈다.
부녀자들은 돌을 나르고 군사들을 도왔다.
이들이 치마폭에 돌을 날라 전투를 도왔다는 이야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말이 유래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다만 ‘행주치마’라는 단어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517년에 간행된 문헌에도 등장하므로, 행주대첩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널찍한 길을 따라 산성을 오른다.
덕양산은 해발 124.9m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오늘날 고양(高陽)이라는 지명은 고봉현(高峰縣)과 덕양현(德陽縣)이 합쳐지면서 만들어졌다.
덕양산에는 예로부터 아름드리 살구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고 전해지며, 산성의 이름에도 살구나무를 뜻하는 행(杏) 자가 들어간다.
350m가량 천천히 오르면 오른쪽으로 충장사(忠莊祠)가 보인다.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명칭은 장군의 시호인 충장공(忠莊公)에서 따왔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그 공적을 기리는 공간이다.
충장사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는 대첩기념관(大捷記念館)이 자리하고 있다.
행주대첩 당시 무기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세운 유물전시관이다.
전투에 사용된 비격진천뢰를 비롯한 각종 무기의 모형과 승전 당시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그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투의 생생한 장면을 상상하며 당시 조선군이 활용한 무기와 방어 전략을 살펴볼 수 있다.
기념관에서 나와 150m 남짓 더 오르면 1970년대 산성 정비사업 당시 세워진 덕양정(德陽亭)이 나온다.
정자에 서면 김포공항으로 이어지는 올림픽대로와 파주로 연결되는 자유로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눈에 들어온다.
산의 높이는 높지 않지만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서울 쪽으로는 남산(南山)과 안산(鞍山), 인왕산(仁王山), 관악산(冠岳山)이 보이고, 남쪽과 서쪽으로는 김포(金浦)와 파주(坡州) 일대까지 시야가 열린다.
덕양산이 북한산(北漢山), 관악산, 아차산(峨嵯山)과 함께 서울을 외곽에서 감싸는 네 산, 즉 외사산(外四山)의 하나로 거론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덕양정 근처에는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가 서 있다.
대첩이 일어난 지 9년 뒤인 1602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비문은 조선의 명필 한호(韓濩), 곧 한석봉(韓石峯)이 썼고, 머리글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화약을 쌓아 불을 붙이고 자결한 김상용(金尙容)이 지었다.
오랜 세월 풍화와 마모가 진행돼 글자를 판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비석 앞에 서니 승전의 역사를 후대에 전하려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리게 된다.
이번에는 덕양정 왼편의 토성길(土城길)로 향한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행주산성 북서쪽으로, 실제 전투 당시 왜군의 공격이 집중됐던 방향이다.
행주산성이 언제 처음 축성됐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한강 유역의 패권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백제·신라가 치열하게 다투던 시기에 백제가 육로와 수로를 통제하기 위한 거점으로 쌓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성을 쌓은 방식과 성 안에서 출토된 백제 유물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는 단서다.
토성길을 걸으며 이곳이 임진왜란 때만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던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한강을 둘러싼 역사의 무대였음을 생각하게 된다.
대첩문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고려의 역사 한 자락을 만날 수 있다.
행주기씨유허비(幸州奇氏遺墟碑)를 통해서다.
고려 말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원나라 혜종(惠宗)의 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의 후광을 바탕으로 세력을 떨쳤다.
행주 기씨 가문의 뿌리가 자리 잡았던 곳이 바로 덕양산 기슭의 행주마을이다.
유허비를 보고 있노라니 조선 성리학의 거목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둘러싸고 논변을 벌였던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이 떠오른다.
행주 기씨 가운데 기준(奇遵)은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됐다.
이후 가문의 일부는 전남 장성(長城)과 광산(光山) 일대로 내려가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유허비 부근에는 기씨 선조들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작은 샘, 기감천(奇甘泉)도 있다.
행주대첩의 현장에서 고려 말과 조선 전기의 인물과 가문의 흔적까지 만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권율은 1537년(중종 32) 12월 28일,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6대조는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양촌 권근(陽村 權近)으로,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조선 초기의 국가 체제와 통치 이념을 정립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권율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년 전인 1582년(선조 15년), 46세의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다.
사위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보다도 출사가 늦었다.
그러나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자 자신의 지략과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국난 극복에 앞장섰다.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亂中日記)』처럼 행주대첩을 준비하는 과정과 전투의 세세한 장면을 기록한 자료가 충분히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전투를 지휘한 권율의 판단과 군사들의 활약, 위기의 순간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게 재현될 수 있지 않았을까.
권율의 생애와 전공을 상세히 전하는 자료가 화재 등으로 소실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후대의 입장에서 대단히 아쉽게 느껴진다.
권율의 삶과 행주대첩을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권율은 현재의 배화여대 일대 필운대(弼雲臺) 집을 사위 이항복에게 주고 행촌동(杏村洞)에서 산 것으로 전해진다.
사직공원과 독립문을 연결하는 사직터널 위쪽 산기슭, 권율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는 집 대신 수령 500년이 넘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행나무가 마을의 상징이 되면서 동네 이름도 은행나무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행촌동(杏村洞)이 됐다.
한강을 내려다보며 나라를 지켜낸 권율의 발자취는 전투가 벌어졌던 산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서울 도심의 오래된 나무 한 그루와 동네 이름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행주대첩과 행촌동.
한쪽에는 나라를 구한 전투의 역사가, 다른 한쪽에는 한 장군이 살았던 집터와 오랜 세월을 견딘 은행나무가 있다.
역사는 책 속의 기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걷는 길과 마주하는 풍경 속에도 살아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