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14) 모험가들에게 - ⑦ 절대 독자/ 시인 김복희
모험가들에게
네이버블로그/ 독자들 다 은며들게 만드는 청소년 성장 드라마
⑦ 절대 독자
“제 시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설명을 자꾸 하게 되는데,
그러자니 시가 안 돼요.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얼마 전에 학교 수업 때문에 경제 관련 서적들을 읽었습니다.
인간의 인지로는 시장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소를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결국,
손실과 이득에 대한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내용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즉, 한 인간이나 집단이 시장에서 손해를 보는 까닭은 그가 어리석거나 비합리적인 선택을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임의적 세계에 살기 때문이며,
제한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단 시장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이란 엄청나게 제한적이고 불안정하지요.
따라서 꼭 투자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개인들이 타인의 견해에 관심을 갖고
타인의 평가에 자신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앞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 많은 선택의 부담을 타인에게 기댈수록 심정적 불안함이 줄어드니까요.
그 노력이 실제로 불확실성을 줄이는 데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다 해도요.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근거 없는 확신과 미신에 결정을 맡기거나 기존의 관섭을 따르는 등―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다수의 사람들이 달려가는 방향으로 함께 달려가는 인간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것과 남이 원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남이 좋아할 만한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리저리 예측해보고,
거기에 자신의 자원을 투자하는 것.
주류가 되고자 하는 것.
더 나아가 다수가 선망하는 대상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누가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주류에 속하지 않고 외톨이가 되었을 때 의식주 전반은 물론이고
심정적으로도 생존을 도모하기 어려운 게 사실인데요.
더군다나 인간은 손실과 이득의 양이 똑같다고 해도 이득에 대한 기쁨보다
손실에 대한 고통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죠.
재산이든 건강이든, 소중했든 소중하지 않았든, 자신의 소유물을 잃는 것을 좋아하는 이는 드물 거예요.
특히 타인과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가, 그것으로 큰 손해를 본다면,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오로지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하면서 가슴을 치겠지요.
서두가 길었네요.
시쓰기에서 시인이 느끼는 괴로움과 손실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괴로움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남의 독해를 신경 쓸 수밖에 없다는 부분,
독자가 없을 때 느끼는 고통 등등이 상당히 유사해 보여서 이렇게 구구절절 써보았습니다.
자신이 쓰는 글이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글이라고 생각했을 때,
자신을 바꿔야 하나 생각하는 모험가들도 떠올랐고요.
즉, 우리가 읽어줄 이 없어 보이는 시를 쓴 후,
극도의 손실을 입은 듯이 괴로워하게 되고 하소연할 곳도 없는 억울한 심정에 사로잡히는 일이
비상식적인 일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소위 잘 팔리는 작가가 되고 싶은 이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큼은 자신의 글을 이해받고 싶은 이까지,
쓰는 사람은 언제나 불안함과 약간의 비애 속에서 자신이 완성한 글을 봅니다.
‘내가 쓴 게 읽힐까? 아무도 안 읽을지도 몰라’ 같은.
사실 몇 년 전의 저라면 모험가님께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마세요. 오직 당신이 원하는 것을 쓰세요!
아직도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요즘의 저는 이 말이 모험가님께 쉽게 드릴 수 있는 말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늘어두었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완전 고립된 인간이기 어려우니까요.
그러면 모험가님의 욕망이자 시인의 욕망 중 대부분이 동의할 만한 욕망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읽히고 싶다’는 욕망 말입니다.
독자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요.
누구에게도 읽히고 싶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는 시인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저는 그런 욕망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시인이 독자를 일절 염두에 두지 않고, 시를 쓸 수 있을까요?
모든 글은 본질적으로 독자―쓰는 사람 자신이 제1독자가 되겠지요―를 상정하는데요.
(누군가 자신이 쓴 글을 자신조차 읽지 않고 계속 ‘쓴다’는 행위로서 시를 수행하는 시인이 된다면,
그는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시인일 수도 있겠네요.
쓴 것은 누구도 보지 못하게 즉시즉시 파쇄하고요.
그러면 그것은 행위예술로서 시일 수 있으나,
지금과 같은 형태로 향수되는 시는 아닐 수 있겠네요. 재미는 있겠네요.
하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는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읽히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을 돌아보며, 모험가님께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모든 독자들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을 버리세요”입니다.
무수하고 다양한 독자의 입장에 따라 우리의 글은 무수하고 다양하게 해석될 테니까요.
어떤 선택을 해도 손실과 이득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 속한 인간이 우리인 것이라면,
그 투명한 미래를 받아들이면 될 일이 아닌가 싶어요.
우리가 쓰는 한, 모두에게 사랑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는 시를 쓰는 날도 보내야 할 겁니다.
둘째는,
이게 더 중요한 건데요. “‘절대 독자’의 존재를 믿으세요”입니다.
내가 무엇을 써도 그 글을 알아보고,
내가 무엇을 쓰지 않아도 더 깊이 헤아리는 존재가 있음을 믿어주세요.
내가 쓴 것보다, 내가 읽은 것보다, 더 성실하게 더 치밀하게 읽어주는 독자말입니다.
저는 제 시의 ‘절대 독자’가 반드시 있다고 상정합니다.
사실 서점 어디선가, 도서관 어디선가 그런 독자가 제 시를 읽고 있다고 믿어요.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지 않거나, 나와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거나, 평행 우주에 산다고 믿고요.
그러면 불안감이 사그라듭니다.
모험가님,
‘절대 독자’를 신경쓰세요. 오직 쓰세요!
절대 독자는 내가 무엇을 쓰든 다 읽어줍니다.
‘내’가 걱정할 것은 오히려, 절대 독자가 내글에서 읽어낼 불성실성일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쓰는 것, 그뿐입니다.
<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 김복희 산문집(김복희, 달 출판사, 2023.)’에서 옮겨 적음. (2024. 2. 4.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14) 모험가들에게 - ⑦ 절대 독자/ 시인 김복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