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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는 씨앗과 같다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마가복음 4장)
하나님 나라가 왔다(막 1:15)
마태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4:17), 마가복음에서도 예수의 첫 복음 선포의 일성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언입니다(막1:15).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주제이자 가르침의 내용이며, 행하시는 표적들이 가리키는 목적지입니다. 예수께서 전개하신 말씀과 실천 전체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천국)는 땅이 아닌 다른 어느 곳(하늘?)에 있는 특별한 ‘장소’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나라’(바실레이아)라는 의미는 ‘통치(권)’의 뜻을 지닌 명사로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뜻) 아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 있는 미국 대사관 영내가 한국 나라가 아니라 미국 나라인 이유는, 미국 땅이어서가 아니라, 미국의 통치권이 작동하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곳이라면, 하늘이나 땅을 가릴 것 없이, 하나님 나라인 셈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곳이 천국(하나님 나라)임을 믿는다”는 감리교교리적선언의 신조는 이런 의미를 반영합니다.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다 (26, 30, 33절)
마가복음 4장에는 “씨앗”을 소재로 한 세 개의 비유가 등장하는데(3-8; 26-29; 30-32절),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입니다. 비유는 예수께서 가장 즐겨 사용하신 가르침의 방식이면서, 예수께서 구사하신 말씀의 고유하고도 독특한 문학적 양식입니다. “비유”라고 알려진 헬라어 “파라볼레(parabole)”는 ‘-곁에(파라)’라는 접두어와 ‘던지다(발로)’라는 동사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말하자면, 쉽게 파악되지 않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수사학적 언설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비유의 말씀이 복음서에 상당하게 나타나기에, 비유를 읽기에 앞서 비유라는 장르의 특성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1. 비유가 가르침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되는 짧고 쉬운 이야기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실상은 이해하기 어렵고 동의하기 곤란한 이야기이다(막4:10-12).
2.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동시에 감추는 이야기이다. 누군가(귀 있는 자들, 막4:9)는 알아듣도록, 누군가는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다.
3.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와 신뢰 관계에 있는 내부자들(집 안의 사람들, 막3:20, 34-35)이 비유를 알아듣게 된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따로 해석하신다(4:10-20).
4.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비유이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을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는 없다.
스스로 자라는 씨앗 비유 (26-29절)
목자 없이 양이 생존할 수 없는 것처럼, 농부 없는 농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파종에서 추수까지 농부의 손이 닿지 않는 구석이 없고, 어쩌면 수확의 성과는 농부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의 농부는 씨를 뿌려(던져, ballo)만 놓고 아무것에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농부는 밤낮으로 자고 깨는 일상을 살 뿐입니다. 씨앗은 농부와 무관하게 자력으로 성장해 갑니다. 심지어는 농부는 씨앗의 성장을 보면서도 어떻게 그리되는지 알지도 못합니다(27절).
28절은 한술 더 뜹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는 말은 씨앗이 농부의 돌봄이나 역할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싹이 트고 이삭이 자라고 곡식이 익는” 과정은 농부가 공들여 진행해 가는 절차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입니다. 씨앗에서 곡식이 되는 일은 씨앗 자체의 본성에 기반하고 있고, 그 일의 완성은 사람의 힘에 의하지 않고 생명과 자연 본연의 섭리에 따릅니다. 어느 때가 되면 씨앗은 열매가 되어 있을 터이고, 씨앗을 뿌렸던 농부는 추수할 뿐입니다(29절). 이토록 농부의 역할을 철저히 배제하는 이 비유를, 독자들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정말로 농부 없이 씨앗이 스스로 자라서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 저절로 자란다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말하는 “하나님 나라(하늘나라)에 간다”는 표현이 정작 성서에는 없습니다.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사람에게) “임한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임한다는 말은 온다는 뜻으로, 이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무관하게 하나님 나라가 스스로 도래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의 의도와 열심에 상관없이 때가 이르면 봄이 오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래도 이와 같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런 특성이 “스스로 자라는 씨앗 비유”(26-28절)에 표명됩니다.
씨앗은 복음,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씨앗을 던지는 이들인 농부(일꾼)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구도는 4:3-9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드러납니다. 씨앗(하나님 나라)이 싹트고 자라고 열매를 여는 것은 씨 뿌리는 농부(인간)의 소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씨앗(하나님 나라)은 스스로 발아되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 “때”는 사람의 기여나 간섭이 미치지 않는 고유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진리가 이렇게 선포됩니다.
하나님 나라,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앞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했습니다(3:6).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은 예수가 바알세불(귀신의 왕)에 들렸다고 공식 판결을 내렸습니다(3:22). 이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예수 공동체가 직면한 위기이고, 씨앗(복음)을 뿌린 농부들의 수난이며, 하나님 나라의 실패가 예상되는 시기입니다. 4장의 첫 번째 비유(3-9)에서,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 땅에서 씨앗들이 허무하게 죽어가는 상황이 예수 공동체가 맞은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정황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심겨진 씨앗들이 있어 삼십, 육십, 백 배로 열매를 맺어 온 들판을 덮으리라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첫째입니다. 둘째는, 농부들이 씨앗을 지켜내고 돌보고 키우지 못한다고 해도, 씨앗 스스로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리라는 확신을 표방합니니다. 이는 아무도 그 나라의 완성을 막을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인간의 좌절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틀림없이 도래합니다. 제아무리 겨울이 깊고 길어도 봄이 오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비유에 등장하는 씨뿌리는 사람(농부)들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성장(도래)을 지켜볼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때와 관련하여 “깨어 있으라”는 명령이 주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밤에 자고 아침에 깨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씨앗)가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지각(知覺)이 아니라, 예기치 못하고 해명할 수 없는 은밀함이며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얘기지요.
겨자씨 비유 (30-32)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31절)는 예수의 선언은 충격적입니다. 겨자는 잡초일 뿐, 포도나무처럼 곡식이나 열매를 맺는 식물이 아닙니다. 나무가 아닌 풀이라서(32절) 크게 자라도 2m를 넘지 못해, 백향목처럼 귀한 목재로 쓰일 용도도 없습니다. 흔히 이스라엘이 포도나무로 상징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시는 새로운 비전에 백향목이 등장하기는 하지만(겔17:22-24), 겨자를 하나님 나라에 비견하는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밭이라면, 겨자는 그 밭을 망치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농부도 겨자씨를 심지 않습니다. 오히려 밭에 겨자가 자란다면 뽑아버리려 하겠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밭을 망가뜨리는 가라지에 불과한 겨자를 하나님 나라에 포함하십니다. 농부가 거부하는 씨앗을 하나님은 자신의 밭에 심으십니다. 바로 앞의 비유에서처럼, 겨자 씨앗도 농부의 외면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고 가지를 낼 터입니다. 양식이 되는 곡식은 아니겠지만, 또다른 씨앗들을 품은 열매들도 맺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양식도 되지 못하고 재목으로 쓰지도 못하는 겨자 씨앗을 무슨 이유로 심느냐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하등(何等)의 쓸모가 없는 존재를 배타하지 않고 품습니다.
씨앗은 작습니다. 겨자씨는 더욱 그러하여, 한 알의 겨자씨는 티끌이나 먼지처럼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도 될 정도입니다. 무(無)와 같은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집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지요. 아무리 제거하려 해도 엄청난 생존력을 지니고 있어서 박멸되지 않는 식물이 잡초입니다. 농부의 손길 없이 저절로 자라는 씨앗으로 잡초인 겨자씨가 거론되고, 하나님 나라를 대표합니다.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 (32절)
겨자씨가 자라서 큰 풀이 된다 해도 잡초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잡초들이 크면 클수록 농작물에 위협이 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중의 새들이 겨자 가지 그늘에 깃들인다”는 상황 역시 달갑지 않습니다. 새들 역시 씨앗과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새들이 밭에 있는 겨자풀에 둥지를 틀고 있다면, 농사꾼들에게는 최악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씀에 누구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한데 생각해 보면, 하나님 앞에서라면 누군들 겨자와 같은 존재 아닌 이가 있을까요?
또다른 전망이 그려집니다. 씨앗들을 먹어 치우는 새들은 겨자 씨앗의 천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새들의 위협에서 살아남아 자란 겨자풀들은 새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줍니다. 이런 최종 그림은 잡초에 불과한 겨자가 하나님 나라의 한 구성원임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도 위협을 받아 죽음에 이르셨지요. 하지만 모두를 구원하십니다. 그분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풍성한 결실을 위해 잡초를 제거하지 않고, 겨자풀은 원수인 새들에게 둥지를 내어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인간의 무관심과 무지, 세상의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일어설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과 무시받고 배척되는 이들을 품고 돌보는 다스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는 이들은 기다립니다. 기다림이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에, 그 자체로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자 가장 치열한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어떤 훼방과 장벽을 넘어, 우리의 예상과 기대까지도 넘어, 가장 하잘것없는 존재와 멸시당하는 생명까지 품으면서 말입니다. 오늘날,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세상에 존재하도록 교회는 보냄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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