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16) 좋은 시의 조건 - ② 진지한 태도로 써라/ 시인 하린
좋은 시의 조건
티스토리/ 김해준 상처
② 진지한 태도로 써라
옥탑은 섬이다. 주민들은 난간을 경계로 마주한다.
달은 집열등이 되어 고향이 그리운 사람의 눈을 빼앗고 이사 온 중국인 부부는 체위를 바꿔가며 그림자극을 한다.
곪은 달이 빠져 나왔다 모낭을 찢고 완숙이 된 염증 주위로 구름이 멍들었다 대기가 천천히 말라 벼락을 뿌렸다 젖은 땅에서 풍장 냄새가 났다 어둠이 썩고 나자 짐승들이 눈을 떴다 가문 사회에 촉을 틔우는 눈알들, 몇몇 고양이가 보호색을 입고 하얀 발로 달을 만졌다 묽어진 빛이 눈가에 번졌다 통증이 천천히 실핏줄을 점거했다 충혈된 뿌리에 감긴 사물들이 선명해졌다 천공에 상처가 덧씌워지고 덜 여문 달은 새로운 무늬를 몸에 새겼다 헌 달은 부서러져가는 순간에도 땅에 그림자 묘석을 올렸다 싸르륵 잔상이 퇴적했다 얇은 일력의 페이지 밑으로 다음 날이 비쳤다 여태 찢어버렸던 지평선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한 상처는 어제의 나이테를 둘렀다 과거가 간절한 이들은 제 흉곽에 상처를 심는다
―김해준, 「상처」 전문, 2012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당선작.
이 모든 과정이 이루어진 다음에 해야 할 일이 바로 언어화 과정이다.
아무리 모든 것이 진지하게 되었더라도 언어화가 진정성있게 나타나지 않으면 그 시는 실패한 시가 되고 만다.
시인은 시로 말하고 시로 평가받는다.
시인의 가치관이나 진지한 태도가 시에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시적 형상 자체가 진지한 현상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시인이 아닌 화자가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 시의 성격과 태도가 자리하는데,
진정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진정성이 비유적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진정성이 풍자적으로 드러나는 경우, 세 가지가 존재한다.
이 세 가지의 태도와 방향성를 필자는 ‘진지 모드’, ‘비유 모드’, ‘풍자 모드’라고 부르겠다.
김해준 시인의 「상처」는 ‘진지 모드’로 이루어진 시다.
‘진지 모드’는 화자의 태도가 엄숙하고 심각하다.
분위기가 침울하거나 태도가 허무적이거나 냉소적이어서 시의 색깔이 어둡다.
시인은 옥탑에 사는 존재들의 외연과 내면을 진지하게 읽어낸다.
소외된 자들이 사는 옥탑을 개별 공간인 섬으로 인식한 후 그 섬을 둘러싼 풍경을 팽팽한 긴장감 속에 그려낸다. 풍경의 중심에는 달이 있다.
달에 대한 화자의 태도가 처음부터 암울하다.
“달은 집열등이 되어 고향이 그리운 사람의 눈을 빼앗”고 염증으로 가득 찬 채 곪아있다.
달의 “염증 주위로 구름이 멍들었”고
“대기가 천천히 말라 벼락을 뿌렸다.
젖은 땅에서 풍장 냄새가 났다 어둠이 썩고 나자 짐승들이 눈을 떴다”.
음습한 기운이 맴도는 하늘 아래 “몇몇 고양이가 보호색을 입고 하얀 발로 달을 만”지자
“가문 사회에 촉을 틔우는 눈알들”을 감싼 눈가에 “묽어진 빛”과통증이 번진다.
달을 둘러 싼 모든 존재들이 전부 침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 나오는 달은 더 이상 기원의 대상이 아니다.
어두운 정서와 절망적 상황을 대변하는 상관물일 뿐이다.
“부스러져가는 순간에도” 달은 옥탑에 사는 존재의 외상과 내상을 대변하듯
“천공에 상처”를 덧씌우고 “땅에 그림자 묘석을 올”린다.
시인은 달의 그러한 암울한 현상을 통해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한 상처”를 심도 있게 이야기한다.
당연히 그 상처는 “과거가 간절한 이들”이 제 흉각에 심는 상처이다.
김해준의 「상처」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진 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숙한 태도의 진정성 있는 시로 창작됐다.
외곽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가난한 존재들의 내적·외적 속성을 진지하고
섬세하게 읽어낸 후 상처로 가득 찬 달을 객관적 상관물로 활용해
가난한 존재들의 상태를 암시적으로 깊이 있게 그려냈다.
< ‘슬럼프에 빠진 당신에게 찾아온 21가지 질문, 시클(하린, 고요아침, 2016.)’에서 옮겨 적음. (2024. 2.10.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16) 좋은 시의 조건 - ② 진지한 태도로 써라/ 시인 하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