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17) 좋은 시의 조건 - ③ 비유적 방법을 활용하라/ 시인 하린
좋은 시의 조건
네이버블로그/ [하린의 시클] 좋은 시의 조건 1 - 비유적 방법을 활용하라
③ 비유적 방법을 활용하라
다음은 비유적인 방법으로 진정성을 드러내고 있는 시의 예문이다.
‘시는 곧 비유다’라고 생각하는 시인들이 잘 구사하는 방식이다.
그는 무심과 무관심 사이에 있다
그는 좀 더 투명해져야 한다
그는 처음에 모자와 마스크로 변장을 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변장이란 것을 깨닫는다
그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입술을 지운다
그는 앞뒤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말과 말 사이에 갇혀 있다
말의 고삐에 꿰어 말의 채찍질을 받으며
그는 납작해진다
그는 양면이 인쇄된 종이가 된다
사람들이 그를 밟고 지나간다
그의 온몸은 발자국투성이다
어제는 피켓을 든 한 무리의 사위대와 함께 걸었다
그는 목소리가 없어 추방당했다
그는 앞뒤로 걸친 간판을 벗고
그늘에 앉는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낀 그늘
그림자와 그림자가 겹쳐 더욱 짙어지는 그늘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두툼한 줄 그제야 알아본다
―신철규, 「샌드위치맨」 전문, 『문장웹진』 2013년 8월.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중략)…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 「가재미」 부분,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
비유를 통해서 얻어지는 효과 중에 하나는 시의 언술이 갖는 단조로움을 탈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비유적인 장치 없이 시적 대상이나 시적 현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진솔함이 흠뻑 묻어나는 시를 창작할 수 있다.
그러나 언술로 그려지는 머릿속 그림이 단조롭게 되어 시를 음미하면서 읽는 맛은 떨어지게 된다.
통쾌하게, 시원시원하게 전달되는 맛은 좋지만 시를 음미하면서 되새김질하는 맛은 떨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신의 시에 음미하는 맛을 주고 싶다면 ‘비유모드’로 장착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비유모드’는 대상과 대상을,
또는 상황과 상황을 원관념과 보조관념화하여 표현함으로써 독자들의 마음속에 빗대는 즐거움을 주고,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시적 인식까지 확장시켜주는 효과를 갖는다.
‘비유모드’를 적용할 때 신철규 시인의 「샌드위치맨」처럼 하는 비유를 필자는 ‘통비유’라고 하고,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처럼 하는 비유를 ‘부분비유’라고 한다.
비유를 하는 두 대상의 속성이 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맞물리고 있으면 ‘통비유’라고 일컫고,
일정한 부분에서만 맞물리면 ‘부분비유’라고 일컫고 있다.
당연히 ‘통비유’가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비유를 쓰고 있다는 것을 독자가 아는 순간 나머지 비유가 신선하게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를 통해 연출하고 있군,
다음 내용도 이 부분을 서로 비유한 것 아니야.’ 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샌드위치맨」의 경우 “앞뒤로 광고판을 맨 사내를 샌드위치의 형상으로 비유했네.”라는 인식이 들게 할 수 있다.
그런 인식이 생기면 시의 그 다음 상황이 뻔하게 와 닿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샌드위치맨」은 그 ‘뻔함’에서 벗어나 신선함을 유지한다.
신철규는 어느 날 앞뒤로 간판을 걸친 사람을 발견했을 것이다.
사람은 사라지고 간판의 목적이 앞서는 상황, 이것은 분명 시적 소재다.
이제 세 가지 모드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
만약 그 사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심각하게 표현하면 ‘진지모드’가 된다.
그런데 신철규는 비유적 상상력을 동원해 그를 ‘샌드위치맨’이라 부르는 ‘비유모드’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가 가진 속성과 샌드위치가 가진 속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신선하게 맞물리고 있다.
처음 ‘사람 간판’을 보면 사람들은 ‘저 사람 뭐지?’하고 간판 속 사람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러다가 여러 번 자주 보게 되면 간판을 걸친 사람에겐 관심이 없다.
“또 ‘사람 간판’이 여기 있네.” 인식하고 슬쩍 간판 내용도 보지 않고 지나치게 된다.
그러니 그는 분명 “무심과 무관심 사이에 있”는 존재다.
‘샌드위치맨’이 투명한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는 결국 “모자와 마스크로 변장”할 필요가 없게 되고,
“말과 말 사이에 갇혀” “앞뒤를 구분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시를 진지하게 써본 사람이라면 이런 ‘통비유’를 통해 10행 내외는 쉽게 쓸 수 있다.
비유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속성과 속성이 맞물리는 부분을 진지하게 그려내면 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녹슨 자전거를 비유하면서 시를 쓴다고 치자.
그럴 때 자전거의 겉의 속성과 내적 속성을 진지하게 읽어내고
두 속성을 맞물리게 하면 할아버지가 가진 정서나 아픔을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속도를 잃은 몸―바람 빠진 채 녹슬어가는 바퀴’,
‘움직임이 둔한 몸―삐걱거리는 스프링’,
‘연금을 받으며 아날로그식으로 늙어가는 몸―기름칠과 타인의 발목을 빌려야만 작동이 가능한 페달’ 등만 맞물리게 해도
10행 정도는 쓸 수 있다.
문제는 내밀함과 시적 사유의 깊이다.
신철규는 내밀함과 깊이를 드러내기 위해 한 발 더 나아가 ‘사람간판’이 갖는 본질에 대해 생각한다.
‘간판’이라는 목적에 얽매여서 주체성을 잃어버린 존재가 바로 ‘샌드위치맨’이다.
투명해지다 못해 점점 ‘납작해’져서 자아를 상실해 가고 있는 존재,
시인은 그런 ‘샌드위치맨’에게서 주목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들의 속성을 발견한다.
주체성을 빼앗긴 존재들,
‘우리’라는 타인은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샌드위치맨’을 밟고 지나갔던가?
분명 “피켓을 든 한 무리의 시위대”는 존재감이 분명한 사람들이지만
‘샌드위치맨’은 간판 안에 갇혀 있기에 목소리가 없는 존재다.
그런 부분까지 한 발 더 새밀하게 다가가 심연을 읽어내야 내밀함과 깊이가 있는 시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도시 생태에서 주목받지 못한 존재들을 신철규는
‘샌드위치맨’이라 규정하면서 ‘통비유’를 통해 진지하게 형상을 표출했다.
‘통비유’는 그렇게 시적 긴장감을 유지한 채 양쪽의 속성을 보다 깊이 있게 내밀하게 맞물리게 하면서
그려낼 때 감흥을 주고 신선함도 전해주게 된다.
문태준의 「가재미」도
비유적 상상을 통해 탁월하게 창작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암투병중인 ‘그녀’와 비유되고 있는 존재는 ‘가재미’이다.
그녀의 속성과 가재미의 속성이 아주 적합하게 맞물리고 있는데,
신철규의 「샌드위치맨」과 다르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나’가 그 시적 상황에 개입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시에서 ‘그녀’와 ‘나’는 매우 가까운 사이다.
그래서 삶의 이력을 대부분 알고 있다.
잘 알다시피 시적 대상이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존재를 객관화시켜 놓은 시로 창작하기 어렵다.
간절함과 안타까움이 앞서서 시적인 요소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문태준의 「가재미」처럼 비유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를 쓰게 되면 가까운 존재를 객관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1장에서 제시한 공광규의 「소주병」도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비유모드’를 통해 진지하게 대상물의 속성을 읽어내고 형상화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독자의 눈치를 보지 말고 한번 설정한 비유적 상상력을 끝까지 펼쳐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시를 보면 적당한 선에서 비유를 하고 끝내는 경우가 있다.
어차피 ‘비유모드’는 자연스럽지 않으면 작위적인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내 비유가 억지인가?’,
‘너무 비약적인 것은 아닐까?’ 자기 검열을 하게 되면 패기와 상상력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독자의 눈치를 보지 말고 시적 논리가 성립되었다고 판단되면 무한대로 펼쳐 나가야 한다.
그 대신 ‘하나의 법칙’을 잊지 말고 집요하게, 섬세하게 하나의 상황과 하나의 장면, 하나의 대상만 가지고 펼쳐야 한다.
문태준의 「가자미」의 경우 하나의 상황은 병문안을 간 상황이고,
하나의 장면은 ‘나’가 간이침대에 누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은 가재미를 닮은 암투병중인 ‘그녀’이다.
시인은 ‘하나의 법칙’ 안에서 시상을 하나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지배적으로 다가오는 ‘연민’이라는 정서를 비유적 상상력을 통해 독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무한대로 펼치고 있다.
그런데도 독자들이 시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가재미로 비유된 시적 논리가 적절했고,
그 논리 안에서 펼쳐진 시상이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 ‘슬럼프에 빠진 당신에게 찾아온 21가지 질문, 시클(하린, 고요아침, 2016.)’에서 옮겨 적음. (2024. 2.13.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17) 좋은 시의 조건 - ③ 비유적 방법을 활용하라/ 시인 하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