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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누구이기에 바다도 순종하는가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마가복음 4장)
풍랑이 일어나는 바다
“풍랑이 이는 바다.” 예고 없이 고난이 들이닥치는 인생을 말하고자 할 때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풍랑이 없는 바다가 없는 것처럼, 고난 없는 인생도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바다의 풍랑을 배경으로 하는 신화와 전설과 이야기들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바다를 건너다 거센 바람과 파도에 부닥치게 된 예수 일행을 보여주는 오늘의 본문 역시 뜻하지 않은 역경을 만나는 인생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까요?
신앙심을 가진 이들은 예수와 함께하면 풍랑을 만나지 않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타고 계신 배가 광풍에 위태롭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험한 바닷길이 되리라고 예측하지 못하셨을까요? 혹은, 바다는 미친 듯이 날뛰고 있지만, 예수께서 타신 배는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유유히 항해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더 낫지 않았을까요? 마지막까지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보다는 승리의 기쁨과 찬송으로 이야기가 종결되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요?
풍랑을 만난 이유 (35-36절)
무슨 이유로 인생이 광풍을 만나는가에 관하여, 신앙인들 사이에 회자하는 흔한 가정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위급한 어려움을 만난다는 것이지요. 요나의 사례가 이런 견해를 대표합니다.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요나는 사나운 풍랑을 만나고 맙니다(욘1장). 바다의 풍랑은 신의 진노 때문이라는 고대인들의 보편적 이해에 대하여 성서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갈릴리를 건너가는 예수와 제자들의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된 원인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다(갈릴리) 저쪽으로 가자”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그 명령을 따라서 배로 이동하다가 거센 바람에 부닥칩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배를 탔다가 바다에 빠지게 된 요나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제자들이 풍랑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가 예수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이며, 게다가 예수께서 그 배에 타고 계셨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35절)
배를 타고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는 것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엄격한 금기입니다. 갈릴리 건너편은 거라사(5:1)를 포함하여 열 개의 이방 도시가 있는 데카폴리스(데가볼리, 5:20) 지역입니다. 이교도의 신전에서 우상숭배가 들끓는 곳, 돼지와 비견되는 부정한 이방인들이 사는 갈릴리 저편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이라면 절대 가까이할 수 없는 금단의 땅입니다. 당연히, 갈릴리 저편으로 가자는 예수의 명령은 유대인인 제자들로서는 고분고분 따를 수 없는 지시입니다.
갈릴리를 건너자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때는 “저물 때”입니다. 상식적으로, 어두워질 때는 배를 띄우지 않습니다. 금단의 땅인 이방인 지역으로 가자는 것이나 때가 저녁이라는 이유 모두에서, 제자들은 강하게 반대했을 것이고, 일단 배가 출발한 뒤에도 혼란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배가 봉착한 풍랑이란 이러한 이견과 충돌을 가리키는 은유일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무슨 이유로 제자들에게 이처럼 명하셨을까요? 씨앗을 소재로 한 세 개의 하나님 나라 비유로 이루어진 4장은 예수께서 바닷가에서 배에 올라앉으셔서 하신 말씀입니다(4:1). 마지막 겨자씨 비유는 “공중의 새들이 그(겨자풀, 하나님 나라) 가지에 깃들게 된다”(32절)는 언설로 끝납니다. 공중의 새들은 밭이나 씨앗에 천적 관계라는 점에서 이방인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비유를 끝내신 예수께서는 이방인에게로 가자고 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 일행은 네 번에 걸쳐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넙니다((4:36; 5:21; 6:45; 8:31). 두 번(4:36; 5:21)은 갈릴리를 건너 이방인의 땅으로 가신 것이고, 나머지 두 번은 유대인의 땅으로 돌아오신 것인데, 성서학자들은 이 갈릴리 도해(渡海)가 예수 공동체의 이방인 선교를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갈릴리를 건너는 중에 거센 역풍을 맞아 곤경을 겪는 일이 두 번 등장하는데, 두 번 모두 이방인의 땅으로 넘어가던 항해 때입니다. 이방 선교를 위해 경계를 넘는 일이 늘 험난했다는 사정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예수께서 타고 계신 배 (36절)
원시교회 중 하나인 ‘마가복음 공동체’는, ‘갈릴리 건너로 (이방지역으로) 가자’는 예수의 명령을 따라가던 배가 풍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로 이방 선교의 난관을 표현합니다. 이 풍랑은 모든 인생이 의례 겪는 격랑이 아니며,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이들이 당하는 징벌도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을 실행하기 출항한 이 배에는 주님이 타고 계시고, 이 항해는 예수와 동행하는 제자들이 선교의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항해입니다.
배는 교회를 상징하는 가장 오래된 이미지입니다. ‘교회의 회중석’인 “nave”라는 단어는 배라는 뜻의 라틴어 “navis”에서 왔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사람을 잡는 어부”들로 지칭되었고, 이는 곧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통합니다. 노아의 방주가 구원 공동체인 교회의 원형으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해에 기반하면,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풍랑 속의 배는 예수의 말씀에 따라 나아가고 있는 교회이며 그리스도 공동체인 셈입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교회들이 가장 힘겨워했던 진통은 ‘이방인 선교’ 문제였습니다.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던 베드로는 다른 동료 사도들로부터 몰매를 맞듯이 비난을 당합니다(행10:1-11:3). 이방인들의 사도로 알려진 바울은 여러 교회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실로, 장벽을 넘어 이방인들에게 다가갈 때마다, 여지없이 거대한 풍랑을 만난 교회의 역사를,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들은 일관되게 언급합니다.
배 안에서 주무시는 예수 (37절)
놀라운 일은, 금세라도 뒤집힐 것 같은 배 안에서 예수께서 잠들어 계신다는 점입니다. 광풍이 일어나 파도는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고, 물이 배에 가득 찬 상황에서도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치는 제자들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장면입니다. 어떤 풍랑도 범접할 수 없는 평화가 절체절명의 순간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훼손되지 않는 신뢰가 압도하는 풍경입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를 깨우면서 “죽게 된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합니다(38절). 하지만 예수의 잠드심은 무관심이 아니라 초연(超然)의 상태입니다. 돌봄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소리 지르지만,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는 예수는 잠들어 계십니다. 이는 어머니의 품에 있는 아가의 고요함과 평온함에 비견됩니다(시131:2).
바람을 꾸짖으시다 (39절)
예수께서는 풍랑과 맞서 싸우지 않고, 바람을 꾸짖습니다(39절). “꾸짖다(epitimao)”는 동사는 마가복음에서 특별히 돋보입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내쫓으실 때(1:25), 귀신들에게 경고하실 때(3:12),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실 때(9:25), “epitimao”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꾸짖으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8:33). 이는 풍랑을 그치게 하는 이적이 귀신을 축출하는 이적과 같은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람을 꾸짖으신 예수께서는 바다를 향해 “고요하고, 잠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고요해집니다.’(39절) ‘아주 고요해졌다’는 말은 ‘“거대한 고요(galh,nh mega,lh, great calm)”가 되었다’는 원어의 번역입니다. 여기에서 “거대한(큰, megas)”이라는 형용사는 ‘큰 광풍’(37절)의 “크다”와 같은 낱말입니다. 고요해진 바다, 바다는 치유된 것입니다. 마치,꾸짖어 귀신이 물러갔을 때 사람이 치유된 것처럼, 꾸짖어 바람이 그쳤을 때 바다는 치유됩니다. 이 치유는 치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셨을 때,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이다”(1:27)라고 응답했지요.
심히 두려워하다(evfobh,qhsan fo,bon me,gan) (41절)
바다의 광풍과 물결을 제자들이 무서워한 것은 사실입니다(40절). 그런데, 예수께서 바람을 잠잠하게 하신 다음에 그 무서움보다 훨씬 심한 두려움이 제자들을 사로잡습니다(41절). 훨씬 심한 두려움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거대한 공포’로 두려워했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도 “거대한(megas)”라는 수식어가 다시 사용됩니다.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풍랑이 잦아들어 위험이 사라졌는데, 무슨 이유로 제자들은 더 큰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일까요?
노련한 뱃사람들일수록 인간은 바다의 힘과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어부 출신인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38절). 고대인들은 귀신 같은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신이 바람과 파도를 무기로 바다를 다스린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지배적인 세계관이었던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바다의 신(포세이돈)은 하늘의 신(제우스)조차도 쩔쩔맬 정도로 강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의 꾸짖음에 바다가 잠잠해졌으니, 이 예수는 도대체 누구이신가요? 이를 본 이들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가?”(41절)
예수께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현장을 목도한 제자들은 “그(예수)가 누구인가?”고 묻습니다. 이는 가버나움 회당에 있던 이들이 물었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바람과 바다를 굴복시키는 ‘예수의 힘’에 탄복하기보다는, ‘예수의 존재’에 극도의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관한 물음과 연결됩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이는 마가복음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물음이며, 동시에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구약성서에 바다에 사는 리워야단이라는 괴물이 언급되는데, 이 괴물을 제압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시74:14; 사27:1). 욥기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 문으로 바다를 가둔 분”(38:8)이시고, “파도의 경계선을 그으신 분”(38:11)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고 파도가 일어날 때 잔잔하게 하시는 분(시89:9)이라고 시편은 선언합니다. 이런 말씀에 의거하자면, 예수는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풍랑을 피하고 평안을 추구함이 교회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거센 바람이 부는 바다를 건너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안전한 항구에 머무르기보다, 항구를 떠나 건너편으로 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의 뜻을 따라 나아가는 배에 풍랑이 들이치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거센 물결을 만나고 있다는 것은 교회가 제 길을 가고 있다는 표지입니다. 풍랑이 겁나지 않을 순 없지만, 교회는 더 크신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믿는 공동체입니다. 이 믿음으로 인해, 교회는 검은 바다를 향해 돛을 올리고, 신앙인은 세찬 풍랑 속에서도 안연히 잠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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