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25) 시쓰기 전략 체험기 - ① 객관적 상관물/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
시쓰기 전략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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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객관적 상관물
시라는 것이 무슨 심각한 사변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내적 체험의 언어적 등가물(等價物) 또는,
주관의 사회화를 꾀하는 객관적 상관물들의 협동체임을 실감하면서 내 시 쓰기는 본격화되었지 싶다.
시 쓰기가 모종의 심각(深刻) 위에 매력적인 수사(修辭)를 입히는 행위라고 여겼던 중고교 시절의 수업상태에서
개인적 습작과정상의 터득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관념어로 허무의 냄새를 풍기거나 전통적 서정에 맹목적으로 우월적인 지위를 주던 당대 교과서적인
시 풍토에서 한 걸음 비켜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알다시피, 엘리엇(T. S. Eliot)의 ‘객관적 상관물’이란 영미 모더니즘―이미지즘이나 신고전주의의 핵심논리가 되는 용어이다.
창의적 체험의 순간, 그것을 특정의 이미지나 특정 상황 또는, 사건 등으로 구성해 내는 일이다.
새로울 것도 아닌 것이, 동아시아 예술미학의 핵심 개념인 의경론(意境論)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시는 물론 모든 예술작품의 형상에는 물(物)과 아(我)가 함께 있고 의경은 모든 형상에 원천적으로 잠재되어 있다.
정경교융(政經交融)이요, 상상(想像)의 연상(聯想)이다.
나는 지금껏 의경 또는 객관적 상관물, 이것이 모든 예술의 기본 자질이자
시 역시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양식적 기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내게 있어 창의적 주체, 객관적 상관물을 이끌어야 할 시적 자아의 정체 자체가 혼란스럽기만 한 것이었다.
적응하고 타협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 자체 시시각각 자아의 정체감을 혼란스럽게 흔들어대었다.
교육 받아온 인간의 자유와 정의에 대한 당대의 문화적 윤리와 ‘시적 자율성’이란 격식 사이에는
현실적 진정성이 결여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상호 모순되고 충돌되는 것이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나의 시적 주체는 불만과 회의의 현실을 멀리 에돌아 가거나 가해자든 피해자든
두루 사랑하면서 자해(自害)에 가까운 화해를 꿈꾸곤 했다.
어둠 속에 날린 연처럼
참으로 오랫동안 그대 아름답구나
강물에 던진 돌처럼
네 목소리가 가라앉듯 가라앉듯 떠오르고
비 듣는 소리에
조개껍질 냄새로 숨결 피어오르네
잠 못 드는 시간이면
그대
쏟아지는 땡볕이었네
어둠 속에서 살을 찢는 싯퍼런 칼이었네
공원에서 거리에서 버스 안에서
손바닥 붉게 젖도록 손뼉을 쳐도
내 손바닥 사이에 맞지는 않고
두 눈 감아도 눈꺼풀 사이에 갇히진 않는
그대
밤마다 문고리 잡고
흔적만 남기는 그대
어둠 속에 날린 연처럼
참으로 오랫동안 아름답구나.
―졸시, 「그대의 흔적」 전문
‘그대’는 거의 절대적 가치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어둠 속에 날려버린 연(鳶), 가라앉듯 가라앉듯 떠오르는 강물 위의 물수제비,
비오는 날에도 조개껍질 냄새로 다가온다.
잠 못 드는 시간이면 더욱 잠들지 못하게 땡볕이 되는 떨쳐낼 수 없는 대상,
사람 많은 곳일수록 새롭게 만나지만 만나기 곤란하다.
홀로 차지할 수도 없는 일. 하지만 아침마다 문을 열면 다시 생생한 흔적으로 살아서 다가온다.
그는 군중 속에도 있고 시적 자아 내부에도 가득 찬 존재,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고 가려져 있지만,
지울 수 없는 절대적 가치였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를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등에 맞추어야 할 때였다.
‘그대’는 다름 아닌 잃어버리고자 해도 잃을 수 없는 현실적 자유와 정의를 에두른 표현이었다.
사회적 주체로서의 양심은 포기되지 않았다. 「통금시간의 애인」, 「건방진 거지 이야기」, 「건방진 가수 이야기」,
「4월제」, 「엿장수」 외 다수의 체제 비판적인 시도 쓰게 되었다.
하지만 정면 대응하거나 내놓고 도발하는 일은 삼갔다.
당시로서는 간접화하는 것이 최소한의 시적 자율성을 지키는 일이라 믿었고
그 이면에는 잡혀갈까 지레 겁을 먹은 속사정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대학 시절의 나는 조향,
구연식 등으로 이어지는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가 아니면 시로 취급하지 않는 풍토의 압박을 심하게 받아야 했다.
나는 다다이즘의 ‘파괴와 우연’에 대한 맹종(당시에도 캠퍼스의 문화 분위기는 언어 파괴 놀이에 천착하고 있었다),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이 주는 극단의 주관주의와 본능주의, 그들의 격식화한 무의식과 무질서에 온전히 승복할 수는 없었다.
그때 실감할 수 없는 우연성과 무의식성을 객관화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 신화(神話)의 세계―
비논리적이긴 하지만 인류가 현실에서 쌓아온 사회 보편이 이미지 세계였다.
김남조, 이원섭 시인의 추천을 통한 대뷔작(1974, 『시문학』) 「유혹」도 자연 생태의 세계 혹은
신화의 세계가 당시로서는 부질없는,
그러나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라 여겼기에 붙여진 제목이었다.
첫 시집의 제목 『목저 있는 풍경』의 목관 피리. 목저는 다름 아닌 태내(胎內) 공상적 생성과 신화나 설화 동굴 유추가 결합한
원형적 이미지들의 패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 한 마리 달려 나온다
그 목소리 길게 눕는다
성냥을 그으면
손뼉 치는 소리 들린다
소 한 마리 달려 나온다
무너지는 복숭아밭 그 아득히
갈매기
자전거 탄다
―졸시, 「바다·B-목저 있는 풍경」 전문
음양조화의 절대 조화 이미지, 존재와 존재, 시간과 공간의 논리 초월적 동시성을 그리고자 한 연작시 20여 편 중 한 편이다.
심층적 성(性)에너지,
황소울음과 바다소리, 달리는 황소에 복숭아밭이 짓이겨지는 소리와 향기,
화해와 생성의 집단 무의식, 신화적 심층의 세계를 의도했다.
소 울음과 바다의 숨쉬는 소리는 남성성을, 바다와 복숭아는 서왕모(西王母)를 비롯한 신화적 여성성의 이미지,
음양의 일체적 정황이 비현실의 추상에 그치지 않고, 성냥 긋기,
손뼉 치기 그리고 갈매기와 자전거 타기로 상징되는 현실의 차원에서도 어우러지는 생성,
화해의 상황으로 실현되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고자 했다.
지금 보면 추상적인 이미지 나열에 지나지 않는 듯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실재에 가까운 유혹이었다.
화해 지향적 장손 윤리에, 내가 가까이 했던,
서구 전위시의 해체성과 개방성 노장(老壯)의 도가사상 등의 영향이라 할 수 있겠다.
내 20대의 시는 사회적 갈증이나 개인의식을 떠나 이미지나 정황 사건들이나,
신화의 세계에서 발원하는 상징적 이미지를 이용한 정서적 등가물로 표현하는 한편,
그를 통한 현실적 본원적 에코토피아에 의해 위안 받기도 했다 할 수 있다.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만상, 만물의 넘나듦, 그리고 현실의 권력과 그 피해자 사이의 윤리회복, 공평의 질서,
이런 것들을 나름의 객관적 상관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관념적 이미지들, 신화적 동경의 세계에서 위로와 구원을 끄집어 낼 수는 없었다.
상황을 직시하고 언어를 통해 삶과 존재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적인 걸음을 걷게 되었다.
< ‘차이 나는 시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에서 옮겨 적음. (2024. 2.19.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25) 시쓰기 전략 체험기 - ① 객관적 상관물/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