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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만나야한다> 요한복음 4장 5-24절
“우리는 만나야한다”라는 말은 “바위섬”으로 널리 알려진 민중가수 김원중의 <직녀에게>라는 노래의 마지막 노랫말입니다. 이 노래는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고 해서 1987년 노래 발표 즉시 금지곡이 된 노래입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거리에서 모임에서 참으로 많이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만나야 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 되어도 만나야 합니다.
아무리 상처가 깊어도 만나야 합니다.
아무리 그 통증을 헤아릴 수 없어도 만나야 합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얼룩져 있어도 만나야 합니다.
남과 북만이 아니라 동과 서도 만나야하고
어른과 아이도 만나야하고 남편과 아내도 만나야하고
부모와 자식도 만나야합니다.
지난 수요일 무연고자 장례식에 갔는데 젊은 사람 남자 두 사람과 여자 한분이 장례식에 왔습니다. 알고 보니 고인의 자녀, 아들 둘에 며느리 한분이셨어요. 아버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찾아오신 겁니다. 10여 년 전에 어머니와 이혼을 하시고는 줄곧 어머니와 살았는데 나이를 보니 청소년 시절부터 어머니와 살아온 듯합니다. 전 아내와 자식들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살았는데 어느 날 구청으로부터 부고장이 날아와서 찾아오게 된 겁니다. 장례예배를 마쳤는데 그 중에 남동생으로 보이는 남자분이 질문을 합니다. 장례절차를 잘 모르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염을 하고 입관은 언제 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관절차는 이미 다 끝났고 지금 화장 들어가기 직전인 상태라고 담당자가 이야기를 해줍니다. 딱 보니 그 아들이 아버지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염과 입관을 담당하셨던 병원 관계자를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입관하시는 과정에서 고인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들도 공영장례식이기 때문에 서류상 보고를 해야해서 사진을 찍어 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장 정도는 있을 거라 예기하십니다. 사진을 확인하고는 그분에게로 갔지요. 고인의 마지막 입관과정에서의 사진이 있다고 하는데 혹시 뵈올 생각이 있으신가 하고 여쭈었죠. 그랬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냐고 그러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연결을 시켜드렸더니 그 아드님이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예요. 그러더니 눈물을 뚝 뚝 흘리는 겁니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따로 떨어져 살았는지 모르지만 아들은 그래도 마지막 까지 아버지를 기다렸던 모양입니다. 하다못해 마지막 떠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고 뭔가 모를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을 가지고 살았던 겁니다. 아버지 나이를 보니 제 또래예요. 젊은 나이죠.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니 떠나시기 전에 좀 한번이라도 만나서 풀건 풀고 화해할 건 화해하고 용서할 건 용서하고 떠나시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살기 힘들고 관계가 어려워져도 마지막에는 풀거 풀고 멜건 메고 떠나야 합니다. 산자들이 남은 세월을 살아갈 세월을 생각해야합니다.
남과 북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오늘은 남북 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입니다. 우리는 외세에 의해 지배받고 외세에 의해 광복을 맞이하고 외세에 의해 분단을 맞았습니다. 분단의 세월이 이제는 78년을 맞이합니다. 분단이라고 하는 현실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위협과 전쟁과 폭력 속에 놓여있습니다. 남은 세대가 좀 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라도 만나서 풀고 철책선을 걷어 내야합니다. 엄마 아빠가 냉전중이면 그 사이에서 사는 자식들이 숨조차 쉬지 못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살아갑니다. 최근에 쓰여진 글을 읽다보니 우리나라 통일운동에 있어서 미국 독일 등지 소위 제3지대에서 민족의 통일을 꿈꾸면서 1960-70년대부터 계속적으로 역할을 해왔던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그런데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면 해외 목회자 신학자들이 많았는데 그분들은 북한과 대화를 할 때는 사회주의식 기독교를 이야기하면서 끝없이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남한을 향해서는 공존과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 바탕을 둔 평화적 통일의 실현 가능성을 염두해 두면서 정부와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계속 대화를 모색합니다. 그래서 북한의 경우는 계속적으로 만나고 지속적인 대화속에서 인식의 변화를 겪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980년대 성경이 출판되고 찬송가가 출판되고 실제적으로 봉수교회와 장충 성당 등이 건립이 됩니다. 김일성 종합대학에 종교학과가 신설됩니다. 공공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적 기독교와 평화와 공존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내세워 서로 공산주의, 반공주의적인 이념갈등을 넘어서서 만날 수 있는 제 3지대를 만들어낸 거죠. 그러나 남한에서는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국시를 반공으로 하면서 아예 대화 자체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반공주의를 정치에 이용하고 더 강한 이데올로기로 내부를 강화합니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 이후 선언된 6.15 남북공동선언의 핵심도 외세에 의존하지 말고 상호 동등성을 인정하면서 존중하고 그 존중을 기반으로 자주적으로 지속적으로 만나자는 게 핵심입니다.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대화하고 만나다보면, 서로의 이해와 존중의 틀거리가 확장되고 그러다보면 더 확장성 있는 제 3지대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통일은 둘째치고 만나야합니다. 반드시 통일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교류하고 만나고 서로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 살아가다보면 평화와 공존의 지대가 넓어지고 그래야 미래세대가 좀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본문에 보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예수님께서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 어쩌면 사마리아여인은 그 첫 대화의 지점에서는 어쩌면 지나가는 나그네려니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대화를 지켜보면 예수님도 그 여인의 삶의 문제에 대해 진지했습니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이 여인도 자기 인생의 문제에 깊어집니다. 단순한 우물가에서의 만남이었지만 삶의 문제에 깊어지고 심지어 종교적 문제에 까지 그 만남이 깊어집니다. 나중에 보면 이 여인이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고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소문을 낼 정도입니다.
마르틴 부버라는 신학자는 만남의 관계를 <나와 너>, <나와 그것>의 관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상대를 사물, 대상화시키고 타자화시키는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이 관계에 속합니다. 심지어 평생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가족도 사물화시키 는 관계들이 있습니다. 의미없이 형식적으로만 만나는 모든 만남도 여기에 속하지만 때때로 타자의 문제를 내 시각으로만 보면서 쉽게 판단하고 심판하면서 타인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문제화시켜가는 관계, 상호 관계적이거나 유기적이지 못한 모든 관계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러나 <나와 너>의 관계는 다릅니다. 내가 타인에게 내 진정성을 싣습니다. 타인도 내 말에 진정성을 담아 반응합니다. 그래서 상호유기적이고 관계적입니다. 단순한 사물이 아니고 신뢰와 사랑을 담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짧은 만남속에서도 변화가 있고 인격적인 만남이 있고 사람의 마음을 느끼는 관계입니다. 내가 너를 통해 상호유기적으로 나와 너가 변화되지만 더 나아가서는 나와 너로인해 나 자신 스스로도 변해가는 그런 만남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대립을 막을 길은 없지만 상대를 사물이 아닌 살아있는 또다른 나, 감정과 변화와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는 생명으로 보면서 진정성 있는 대화를 해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가는 힘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에 있고 대화와 만남의 과정이야말로 우리를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이 비록 잠시 잠깐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예수님도 그 여인도 서로를 그것으로 대상화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는 삶의 깊은 고뇌가 있었고 그 고뇌를 향한 진정성이 있었고 서로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또 다른 나처럼”여기는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한 주간을 보내면서 단 한순간이라도 그 장례식장에서 만났던 분들의 관계에 짧더라도 이런 시간들이 있었더라면 남과 북, 동과 서, 어른과 아이, 자식과 부모안에서도 마르틴 부버가 말하는 <나와 너>의 진정성 있는 만남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가 결코 절망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전설적인 영화음악 작곡가인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분의 인생을 다룬 영화인데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영화음악들 즉 황야의 무법자, 원스 어 폰어 타임 인 아메리카, 피아니스트의 전설, 시네마 천국, 미션 등 굵직굵직한 영화음악을 작곡하신 분입니다. 세계적인 거장이시고 결국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 그래미상을 석권한 세계적인 거장입니다. 영화 제일 마지막에 그런 대사가 나옵니다. 수없이 많은 영화음악을 만들어왔어도 다시금 새로운 음악을 만들게 되면 마치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처럼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장도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씩 하나씩 구상하고 써내려가다보면 음악이 되고 노래가 되고 그런다는 겁니다. 이런 거장도 자신의 삶 앞에서는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담은 음악을 마음에 품고 백지장같은 망망대해에서 새롭게 시작합니다. 삶의 어느 순간도 포기함없이 말입니다. 남북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오늘, 누구에게든 관계가 쉽지는 않지만 영혼을 담은 마음으로 저마다의 삶속에서 “나와 너”의 영혼있는 만남을 위해 또다른 그물질을 포기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