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22) 퇴고를 끊임없이 즐겨라 - ① 문을 밀까, 두드릴까/ 시인 안도현
퇴고를 끊임없이 즐겨라
Daum카페/ 문을 밀까, 두드릴까
① 문을 밀까, 두드릴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퇴고(推敲)’라는 말은 당대의 시인 가도(賈島)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가까운 데 이웃이 적어 한가로운데 閑居隣竝少
풀숲의 길은 황량한 들판으로 들어가네. 草徑入荒園
새들은 연못가 나무 위에 잠들고 鳥宿池邊樹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 僧鼓月下門
이 시의 마지막 행 두 번째 글자인 ‘고(鼓)’는 “두드리다”는 뜻이다.
시인은 애초에 이 글자가 들어간 자리에 “민다”는 뜻의 ‘퇴(推)’를 썼다고 한다.
스님이 문을 민다고 해야 할지, 두드린다고 해야 할지 고심을 거듭하던 그는
어느 날 노새를 타고 가면서도 ‘퇴(推)’로 할지, 고(鼓)로 할지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길을 지나던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고관 앞에 끌려간 가도는 글자 한 자를 결정하지 못해 실수를 범했노라고 아뢰었다.
그 고관은 당시의 최고 문장가 한유(韓愈)였다.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토(推)’보다는 ‘고(鼓)’가 낫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때부터 둘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 이후 글을 수정할 때 퇴고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그러면 한유는 왜 ‘퇴(推)’보다 ‘고(鼓)’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일까?
이것을 단순히 취향에 의한 단어 선택의 문제로 보면 곤란하다.
새들도 잠든 한가하고 고요한 밤에 스님이 문을 ‘밀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그 뒤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도 사건도 등장인물도 필요 없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거처이므로 스님은 발 닦고 이불 펴고 잠들면 그만이다.
자신의 집이 아니라고 해도 주인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으므로 거리낌 없이 들어가면 될 뿐이다.
긴장이 없는 정황은 울림이 없는 시를 만들고 만다.
그러나 스님이 낯선 집의 대문을 두드리게 되면 그 대문까지 걸어온 탁발의 고된 길이 보이고,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개를 푸덕이는 소리도 들린다.
또 집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와 스님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문을 두드리는 순간에 시가 역동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스님을 맞이하는 이가 수염이 덥수룩한 산적 같은 사내면 어떻고 어여쁜 여인이면 어떻겠는가?)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4, 2,2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22) 퇴고를 끊임없이 즐겨라 - ① 문을 밀까, 두드릴까/ 시인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