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세거지(世居地) 인구(仁邱)마을의 내력
앞거랑’의 오른쪽 인구마을의 수몰 직전의 모습- 기와집들은 하천 및 타지로 이건 되었다.
수몰 후 인구마을 터전의 모습
수몰 후의 ‘앞거랑’(호계)에 물이 차 있는 모습
인구마을은 서에는 보현산 줄기인 기룡산과 이어진 고깔산 줄기가 서 있고, 북에는 마당지산이 동네를 뒷 둘렀으며, 동에는 운주산 줄기가 뻗어 멀리서 병풍역할을 하고 있었다, 앞에는 백암산 밑을 흐르는 죽장에서 발원한 자호천이 감돌아 흘러 그 기슭에 농사를 지었으며. 인구와 월연 사이에는 작은 실계천 즉 앞거랑(호계)이 있어 식수와 생활용수를 가까이에서 확보하기에 편리하여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3,000 여 년 전인 신석기시대 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랐던 자취인 고인돌이 마을 뒤에 산재 되어있어 오랜 세월 인간들이 살았으리라 생각된다. 우리와의 관계는 500 여 년 전 선무랑께서 노항마을에 입촌하셨고, 4대에 걸처 사셨으며 인구마을에는 호수공께서 자호 언덕에 자호정사(강호정)을 지으셨고, 그 뒤 손자 삼휴공의 입촌으로 후손들이 대를 이어 400 여 년 간 살아온 터전이다. 이 고장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1.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고인돌이 산재 되어있었다.
뒷솔밭의 고인돌
월연마을의 고인돌
지금부터 3,000 여 년 전인 신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으로 고인돌이 많이 남아있다. 1978년 7월 15일부터 8월 3일까지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용산리 고인돌은 금호강의 한 지류인 자호천 근처의 전망 좋은 선상지(扇狀地)에 입지하고 있고, 발굴 당시 현존하던 10기의 고인돌 중 7기가 조사되었다. 조사된 자료 중 6기는 모두 반경 20m 내외 1호와 7호의 부석 시설은 평면 방형의 범위를 띠고 있어 고인돌의 영역을 표시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인돌 떼의 상석 평면은 대체로 부정형이 많았고, 1·2·7호는 평면 장방형이였다.
2.월성이씨(月城李氏) 집성촌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인구마을 뒤의 ‘뒤솔밭’ 근처에는 공동묘지 처럼 묘가 집단적으로 있었는데 이 묘가 월성이씨들의 묘라고 했다. 우리 일가의 묘는 하나도 없었다. 그르니 인구마을에는 월성이씨들의 집성촌으로 추정된다. 인류의 세거지를 살펴보면 몇백 년 잘 살던 성씨들이 쇠퇴하고 타성이 들어와 세를 넓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이곳도 결국 우리들이 득세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산 것이다.
3.호수공(湖叟公)께서 자호언덕에 자호정사를 건립하셨다.
호수공께서 지으신 자호정사(강호정)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하천묘역으로 이건 된 오늘날의 모습
호수공께서 대전에서 1599년(선조32) 자호(紫湖)의 언덕에 자호정사(紫湖精舍)를 짓고 자연을 벗하여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셨다. 여기에서 따서 호를 호숫가의 늙은이란 뜻으로 호수(湖叟)라고 한 듯하다. 이곳에서 여러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말년을 유유자적하게 보내셨다. 호수공께서는 그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詩)로 남겼다.
웅지로 적장의 목벨 것을 기약했건만, 壯志期梟賊將頭
쇠잔해진 몸에 문득 귀밑머리 희어져 놀라네. 殘骸驚却鬢邊秋
오랏줄이 있었지만 종군의 청 못 이루고, 有纓未遂終軍請
힘없으니 두보의 수심을 부질없이 생각하네. 無力空懷杜老愁
노쇠하여 병드니 어찌 환로에 치달리겠는가? 衰病豈宜馳世路
한가로이 물러나 맑은 시냇물 완상함이 마땅하리. 退閒端合玩淸流
흰 갈매기도 이 강호의 늙은이를 싫어하지 않으니, 白鷗不厭江湖叟
이제부터 청안으로 죽을 때까지 쉬리라. 靑眼從今至死休
4.삼휴공(三休公)께서 석동(石洞) 마을에서 인구마을에 살림 나시다.
삼휴고택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하천묘역으로 이건 된 오늘날의 모습
삼휴정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하천묘역으로 이건된 오늘날의 모습
삼휴공께서 살림을 인구로 나신 것은 자양(紫陽)은 조부 호수공(湖叟公)께서 태어나 사셨고 은거(隱居)하신 땅이며, 부공 호군공도 이곳에서 태어난 선조의 고향이다. 그래서 인구마을에 집을 짓고 사셨다. 공께서 그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그 마을 호계(虎溪) 가 인구마을에 집을 짓고 시를 지어 읊으면서 마음이 가는 대로 유유히 생활한 그 집을 삼휴정(三休亭)이라 하였다. 그 후 자손들이 대를 이어 약 400여 년을 이어 살아온 터전이 되었다..
o題從弟德基三休亭 종제 덕기의 삼휴정에 표제하여
寅丘山水是靑氈 인구의 산수 우리 집 세전의 보물이라
인구산수시청전
肯構新功屬惠連 정자 짓기를 기꺼이 종제가 돌보다.
긍구신공촉혜연
峀畫蛾眉雲黛聚 산봉우리가 나비 눈썹을 그리니 운대가 모이고
수화아미운대취
塘開鏡面鷺絲牽 연못이 거울을 여니 해오라기의 털이 번진다.
당개경면노사견
心遊太極人如玉 마음이 태극에 노니 사람이 옥 같고
심유태극인여옥
家未全貧菊有錢 집이 가난하지 않으니 국화에 돈이 있다.
가미전빈국유전
始識化工偏餉我 조물주가 나를 유독 잘 그리니 처음으로 알겠으니
시식화공편향아
炯嵐朝暮露機權 조석으로 안개와 남기가 기지와 권모를 드러낸다.
형람조모노기권
5.사과공(司果公)께서 귀미마을로 거처를 옮기셨다
삼휴공의 아드님 삼 형제의 장남으로 숙종(肅宗) 2년 병진(丙辰)(1676년) 봄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내외(內外) 여러 직(職)을 거처서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 재직(在職)하다가 당시(當時)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의 횡포(橫暴)을 보자 그날로 그 직을 버리고 고향인 자양으로 낙향(落鄕)하여 이르기를 “지금 내가 양친(兩親)이 모두 돌아가셨으니 부모봉양(父母奉養)을 위해서도 아닌 이상 관직(官職)에 더 연연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고는 인구로부터 귀미로 거처를 옮겨 두 아우와 더불어 학문(學問)을 토론(討論)하고 담락(談樂)하게 지내셨으며, 모든 자질(子姪)들을 가르치고 기르며 모두 다 의방(義方)으로 이끄셨다.
6.모재공(慕齋公)께서 인구마을에 살림 나시다.
수몰 전 모재고택의 모습
소몰 후 이건하여 중수한 모재고택의 모습
증조부이신 삼휴공과 조부이신 사과공이 사시던 인구 마을에 살림나셨다.
통덕랑의 셋째 아드님으로 이곳에 터를 잡으셔서 후손들이 대를 이어 수몰전까지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다. 타성은 몇 집 없었다. 모재공께서는 할아버지의 명(命)으로 백형(伯兄) 구계공(龜溪公)을 따라 횡계에 가서 소의(小儀)와 제자직(弟子職)등을 청(請)해 익히니 훈수선생(塤叟先生)께서 이른바 제자(諸子) 좌우(左右)에서 오직 쇄소응대(灑掃應對)註-3)의 가르침을 삼가 보는 자(者)는 바로 이 사람이라 하였다.
또 진사(進士)인 종형(從兄) 인재공(忍齋公) 중직(重稷)과 매부(妹夫)인 박공 (朴公) 태후(泰厚)와 손공(孫公) 효숭(孝舜)과 김경석(金慶錫)과 권만전(權萬銓) 등과 더불어 창수(唱酬)하면서 학문(學文)을 논(論)함에 날과 달로 갈고 닦은 공(功)이 많았다.
o一男二女를 낳으니 아들은 휘 일필(一鉍)이요. 딸은 민노현(閔魯賢)과 조옥신(曺沃臣)에게 시집갔다.
7.자언공(紫彦公)의 숭조활동(崇祖活動)
공은 자질이 특이하여 5.6세 때 이미 천자문(千字文)을 알았고, 8세 때 종숙인 인재공(忍齋公)에게 글을 배웠는데 가르치고 훈독하는데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문장을 잘 깨닫고 사서(四書) 등의 깊은 뜻을 체득하고 대체의 뜻을 능히 통달했고, 형제가 없고 아버지께서 늙으셨기 때문에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독서에 더욱 뜻을 두어 동생(董生)의 행실을 읽는 데 까지 이르렀고, 주경야독(晝耕夜讀)하였다.
1)남성재(南城齋)의 소임을 맡아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 기축1769년 - 현령(縣令)에게 간청하여 수리안전답(水利安全畓) 5 두락(斗 落)을 추가로 납입하고 영원불환(永遠不換)의 계약을 맺었다.
(2) 갑진1784년-1785년에 걸쳐 허물어진 남성재(南城齋)를 19간으로 확장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비각을 세우웠다.
(3). 1761년- 1787년 사이 13회나 묘사에 참사하였고, 1778년부터는 10년간 개근(皆勤)을 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2)문중의 중요 송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 을미1775년 5월- 영천군지의 정찬판공 주각상(註脚上) 본역의장 (本域義將) 4자를 삽입한 사실을 고소하는 글에 연기명(連記名) 하였다
(2) 신축1781년 5월 10일- 권(權), 손(孫), 정(鄭)이 세덕사(世德詞) 무고(誣告) 사실을 변명하는 글에 연기명(連記名) 하였다.
(3) 임인1782년 5월- 세덕사 피무(被誣) 사실을 변명하는 글에 연기명 하였다.
(4) 을사1785년, 병오1786년 10월 - 원당의 외선조 묘소 인유장(人兪葬) 사건 소송에 연기명 하였다.
(5) 갑인1794년, 정사1797년- 2회에 걸쳐 영일읍을 다시 시조 묘하 (墓下)로 옮기지 말라는 진정서에 연기명 하였다.
o자손(子孫) : 4남 2녀를 두니 아들 하문 (夏汶)과 하신(夏澵)과 딸 장일민(蔣逸民), 남래환(南來煥)은 최씨에서 났고, 아들 하주(夏澍)와 하로(夏潞)는 김씨에서 났다.
o 하문(夏汶)의 아들 범휴(範休)이고 딸은 최윤해(崔潤海) 이한경(李漢慶)에게 시집갔다.
o 하신(夏澵)의 아들은 헌휴(憲休) 가휴(家休) 보휴(寶休)이고 딸은 남대건(南大楗) 신우성(辛宇成)에게 시집갔다.
o 하주(夏澍)의 아들은 성휴(性休), 진휴(進休), 채휴(採休), 정휴(禎休)이며,
o 하로(夏潞)의 아들은 후휴(煦休) 서휴(書休)이고 딸은 서원 일(徐元一)권찬운(權贊運)에게 시집갔다.
8.자언공 후손들의 인구마을 분포도
수몰 전에 인구마을 사림들의 거주 분포도
자언공의 아드님 4형제분의 자손들이 인구 월연마을에 분포하여 살았는데. 인구마을에는 주손이신 휘 하문(夏汶)의 후손들은 자손이 귀하여 몇 집 되지 않았고, 둘째이신 휘 하신(夏澵) 후손은 중귀미마을 일대에 살랐고, 주로 셋째이신 농와공 휘 하주(夏澍) 후손이 20호로 제일 많았고, 다음이 넷째이신 송암공 휘 하로(夏潞) 후손들이 15호 살았다. 그 외 일가들이 3호 였고, 타성은 5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