貴人 이재진 교수
2주 전, 초저녁에 전화를 받았다.
“실례지만 문기정 교수십니까?”
“그렇소만...”
“저는.........이재진입니다.”
아직 면식은 없지만, 존경하는 박 교수님의 수제자라는 말을 듣고 반가웠다.
다짜고짜로 한번 뵙고 싶다기에 일정을 고려하여 지난 29일에 만나게 되었다. 이 교수와 긴밀한 나의 동료 임 교수, 나의 절친 홍 교수와 동석하였다.
첫인상부터 비범한 분이었다. 아직 정년을 2년 남기고 있고 대학 중요 보직을 맡고 있는 재직 대학의 대들보였다.
담양식을 맛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대학 연구실을 방문하여 차를 나누면서 이 교수의 면모를 더듬어 보게 되었다.
헤어진 뒤에 이 교수의 이력이 담긴 SNS도 들춰보고, 임 교수로부터도 그분의 활약상을 들으며 貴人을 만난 기분이었다.
‘이 처장님의 진실하고 친절한 환대, 너무 고마웠습니다. 어떻게 주변인으로 살고 있는 제게 이런 영광스런 초대를 해 주시니 더욱 세상 살맛이 납니다. 재삼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교수님과 가족 모두가 기쁨만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교수님 ~^^ 과분한 칭찬에 민망하기도 합니다. 그토록 뵙고 싶었던 교수님께서 제게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훌쩍 나들이 하고 싶으실 때 언제라도 연락 주시고 이곳으로 오십시오. 편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재진 올림’
고마운 마음을 문자메시지로 주고 받았다.
단편적이지만 貴人 이 교수님의 면모를 적어 둔다.
그는 한학을 하셨던 엄친의 슬하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춘부장께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가훈과 함께“‘의(義)’를 목숨보다도 더 중히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1978년 11월 병무청 모병실에 가서 가장 훈련이 고되고 빨리 입영할 수 있는 곳이 해병대 하사관 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그곳에 지원서를 내고 열흘 뒤에 입대 하였다. 군 생활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가 지닌 특유의 끈기로 4년 7개월의 만기 제대 끝에 얻은 것은 ‘군대 훈련받듯 하면 세상에는 안되는 게 없다.’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강인함을 배웠다.
83년 7월 말에 해병대를 전역하고, 84학번으로 조선대학교에 입학하여 학과 수석을 비롯하여 계속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쳤고 졸업과 동시에 모교인 조선대학교에 행정직으로 채용되어 석·박사 과정을 최단 시간에 수료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대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체득한 대학행정에 대한 경험은 새로 개교한 대학교의 여러 보직을 통해서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조선대학교 학생처에서 학생주임으로 근무할 당시는 소관 업무가 학생지도와 국제교류였다. 당시엔 학생 신분으로 외국을 여행하는 일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동구권이 개방되면서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발 빠르게 학생들을 선발해서 현지 적응을 위한 교육을 하고, 선진국(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과 일본, 미국, 중국) 대학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던 것은 대학의 세계화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관심을 갖는 첫 번째의 계기가 되었다.
재직 대학교는 몇 번의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 그때마다 교무기획실장 등의 보직을 수행하면서 학교의 안정화를 위하여 학교경영에 적극 참여했다.
대학 두 캠퍼스를 통합하는 것은 전국 최초의 사례였다. 양 대학의 학과, 교수들 간의 이견, 학생· 학부모, 나아가서는 지역주민과 동문들 간의 이견 등 생각지 못한 여러 어려움이 발생했지만 최선을 다한 설득으로 무리 없는 합의를 이끌어 내어 차질 없는 통합을 완료했다.
그는 대학교 교수협의회 의장을 두 차례(제3대, 제5대) 역임하면서 화합과 단결로 대학 현안을 슬기롭게 극복한 경험이 있다. 첫 번째는 두 지역의 캠퍼스 통합으로 교수들의 관계가 서먹서먹한 것을 화합하게 하고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전환했으며, 새롭게 총장을 초빙하는데 있어서도 집행부와 교협 간에 많은 협조와 합의를 이루어내기에 이르렀다.
제5대 때는 국립대학인 순천대학교·목포대학교의 집행부 및 교수협의회와의 교류와 협상으로 통합 MOU를 체결했었고, 무조건적인 통합에 합의한 목포대학교는 교육부의 사전 허가를 얻어 양 대학의 통합신청서 제출과 함께 실행 절차를 이행하기도 했다.
열악한 재정 형편으로 대학 교육기반 시설은 사실상 부족한 편이었고 이의 개선을 이루어내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부단히 노력한 결과 세 가지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첫 번째는 우연찮게 군수께서 실내체육관 부지를 물색하러 다닌다는 정보를 접하고 우리대학 부지를 무상으로 기부체납하도록 하여 부지 구입비를 건축비에 보탠 만큼 규모를 크게 지어서 대학과 군민이 공동으로 사용하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제안하여 이를 실행시켰다.
두 번째는 대학의 컴퓨터 관련학과 학생들로 “대학 PC119"를 창설해서 군민들의 컴퓨터 수리 및 교육봉사를 하게 했으며, 전기과 학생들은 군에서 제공하는 재료구입비로 농가의 노후 전선 교체와 시설 점검 및 수리를 무료로 봉사하게 했고, 각 마을 별 노인당과 요양 보호시설에서 학생 봉사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역할을 했으며, 300여명의 기숙사 학생들을 군으로 전입하게 하여 인구 늘리기 정책 등에 기여한 공적 등으로 군민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는 대학의 지역 사회에 대한 기여와 봉사기능을 실천하고 십분 활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
또한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 교류학자로 파견되어 인연을 맺게 된 그로끼사부르 교수와 나카오 교수, 오우미고치 교수 등과 꾸준히 인간적·학문적으로 교류와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이분들과의 관계를 자기 자신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조선대학교와의 교류 협정으로 이끌어냈으며, 더 나아가 인접한 전남대학교 법과대학과도 교류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또한 결성 초창기 때부터 (사)한국토지법학회의 관계자들과 일본에서 이분들이 이끌던 일본 학회와도 ‘한일 토지 법학회’를 결성하는데 기여한 바 있다.
오우미고치 교수 제자 중에는 중국의 대학교수분들도 여러분이 있었다. 이분들과의 교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서 한·중 토지법학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2008. 7. 26.에는 규모가 큰 대학에서도 개최하기가 힘든 ‘한·중·일 국제 토지법 학술대회’를 이 교수의 주선과 기획으로 재직 대학교에서 개최하여 저명한 한·중·일 학자들의 논문 발표와 토론이 전국적인 관심 속에 이루어졌다. 대학에서 토지법을 연구하는 학자뿐만 아니라 주택공사, 토지공사, 감정평가사, 토지분쟁전문변호사, 토지 관련 국가기관의 관련자 등이 참석했다.
그가 학생들을 인솔하고 유럽을 탐방했을 때,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넥카 강과 하류의 라인강을 답사하면서, 영산강을 이에 맞대어 동신대학교가 하이델베르크 대학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고 귀국하여 나주시 포럼에서 영산강 프로젝트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2017년 모교 중·고등학교 총동문회 회장으로 재임 시 그가 제정한 장학금 및 장학증서 수여식을 개최했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회갑을 맞은 그에게 ‘4차산업혁명시대, 부동산 법제의 전개’ 제목의 이재진 교수 회갑기념 논문집 출판기념 및 봉정식이 모교에서 진행됐다.
이 교수는 지난 30여 년간 수영과 등산 등으로 강한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러한 건강이 업무 추진력을 높이고 학교 발전을 위한 활발한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2022. 8. 1.)
첫댓글 전남 도립대 운곡 이재진교수님과 남곡님의 교학상장에 대한 꾸준한 연구에 공감, 두 교수님 만남에 박수를 보내며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두 분의 건강과 발전을 기원합니다.
이 교수는 불행하게도 2022.9.28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좋은 사람은 오래 곁에 있어야 하는데 너무 안타까워 슬픔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