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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쓰기의 몇 가지 방향 제시
-이용옥의 《석모도 바람길》
여세주
1.사사로운 일상이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수필은 자기반영적 글쓰기의 하나이다. 수필은 자전적 성격을 지닌다. 수필의 본질이 이러하므로, 자신의 삶을 회고적으로 기술하는 작품이 대세를 이룬다. 작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기록하는 일에 치중하는 수필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인생 역정의 편린들을 기록한 자전적 수필을 한 자리에 모으면 자서전을 방불케 한다. 작가가 걸어온 삶의 여정을 한 권의 수필집 속에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모형제 이야기와 자식 및 손주 이야기까지 곁들이면 삼대기에 걸친 가족사적 수필집이 완성될 판국이다.
수필의 자전적인 성격은 부정할 수 없고 또한 무가치한 것도 아니다. 일상의 가치나 의미에 끊임없이 주목하면서 자아를 성찰하고 다시 정의할 기회를 가진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사사로운 일상을 문학적으로 재구성 내지 재창조하지 않는다면 신변잡기에 머물고 만다. 신변잡기에서 벗어나 문학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경험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론이다. 여기서 보편적 의미란 포괄적으로 말해서 삶의 본질적 원리나 보편적 진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경험의 보편적 의미 부여만으로는 부족하다. 경험의 언어화에도 의미론적 질서를 부여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의도하는 보편적 의미를 잘 드러낼 수 있도록 경험의 문예미학적 재구성이 필요하다. 경험에 내장되어 있는 보편적인 의미를 이끌어내고, 이 의미가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경험을 재구성해야 수필은 비로소 의미론적 체계를 지닌 진정한 문학작품으로 창조된다.
경험을 텍스트로 옮기면서 의미론적 재구성을 한다 하더라도 경험 그 자체가 개인사적인 경험의 차원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문학적으로 온전히 승화되지 못한다. 경험의 재구성 과정에서 ‘나’의 경험을 ‘우리’의 경험으로 전환하기 위한 일반화도 수필을 문학이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사사로운 경험의 일반화’라는 점에서 이용옥의 수필집 《석모도 바람길》에 수록된 몇몇 작품이 주목된다.
수필가 이용옥은 작가 자신이나 가족의 인생 행적을 시시콜콜 기록하는 개인사적 수필 쓰기를 의도적으로 지양하고 있는 듯하다. 첫 수필집일수록 작가의 인생 역정을 속속들이 기록하는 작품들로 채워지기 마련인데, 그의 수필집은 다르다. 여류수필가들의 수필집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내용을 그의 수필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번민, 며느리로서의 의무와 갈등, 남편을 비롯한 가족과의 불협화음과 포용 등의 주제나 내용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가족들을 수필의 주인공으로 줄줄이 불러내는 것도 절제하고 있다. 물론, 사사로운 경험의 기록에 치중한 작품을 전혀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년 시절의 경험을 다룬 수필들 가운데 이런 작품이 몇 편 보인다. 그러나 <술 익는 집2>나 <그 겨울> 같은 수필은 개인의 사사로운 경험이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사사로운 경험을 그 시대의 풍속, 즉 세태 풍경으로 전형화 또는 일반화시킴으로써 문학으로서의 지위 상승을 이루어낸다. 여기서 유년의 경험은 작가 개인사적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생활 풍경이며 풍속으로 그려진다.
<그 겨울>은 눈 내린 산골 마을 아이들의 하루를 동화처럼 그려낸 수필이다. 눈 내린 아침 풍경에 대한 묘사로 작품은 시작된다.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과 밤새 내려 쌓인 싸락눈, 싸리 빗자루로 눈 쓰는 소리, 겉옷도 걸치지 않은 채 뛰쳐나와 겅중거리는 아이들, 입김 흩날리며 눈을 치우다가 아침인사 나누던 이웃들, 집집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가 산골 마을의 아침 풍경을 그려낸다.
큰 오빠들은 따라나서겠다는 어린 여동생을 뿌리치고 산토끼나 노루를 잡겠다며 올무를 들고 산을 오른다. 떼놓고 몰래 대문을 나서려는 막내오빠를 따라가 얼음지치기나 불장난을 하면서도 변변한 썰매 하나 갖추지 못하여 자존심 상하고 서럽다. 얼음판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점심때가 훌쩍 넘어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언 손을 녹여주고 산에 갔던 오빠들이 돌아온다. 점심을 먹고 나면 오빠들은 이미 달아나고, 심심해진 화자는 새끼줄로 엮어 만든 참새 덫을 놓고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참새는 걸려들지 않는다. 저녁이 되면 아버지는 옛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고 밤이 깊어 출출해지면 어머니는 쟁여놓은 홍시나 가래떡 같은 밤참을 내놓는다.
이처럼 작가는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그 시대 사람들 누구에게나 낯익은 장면들을 가급적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경험을 객관화하여 묘사함으로써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속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경험을 최대한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하면 된다. 그러나 동화가 아니라 수필을 쓰고자 했으므로, 작가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취하되, 유년시절의 겨울 풍경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나’의 경험을 ‘우리’의 세태 풍경으로 그려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술 익는 집 2>는 가정에서 술 담그는 것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애주가인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밀주를 담그곤 했는데, 어느 날 밀주단속반이 들이닥쳤으나 용케도 위기를 넘기는 상황을 그려주고 있다. 그 시절의 세태 풍속을 다룬 한 편의 짧은 영상을 보는 듯하다. 그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 한두 번은 겪었던 경험이어서 사사로운 경험의 일반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경험을 ‘우리’의 경험으로 객관화한다는 것은 동일한 경험의 폭넓은 공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각 가정에서 밀주를 담가 먹곤 했는데, 어느 날 단속반이 들이닥치면 발각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리저리 말을 돌리거나 서로 알만한 친분을 내세워 단속을 피하게 되었다는 서사적 패턴이 그 시절의 일반적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그럴 뿐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단속원을 특정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로 전형화하는 데서도 경험의 일반화를 이루어낸다. 어머니는 감추어 둔 밀주가 발각될까 봐 허둥대고 발각된 후에는 벌금을 모면하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대는 여느 가정의 안주인을, 위기의 상황에 불쑥 나타나 친분을 내세우며 단속을 무마시키는 아버지는 여느 가정의 가장을 대표하며, 안면 때문에 단속을 해 놓고도 은근슬쩍 눈감아 주는 단속원도 그 당시 공무원의 행태를 보여주는 전형적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 작품은 경험의 서사적 패턴과 인물의 전형적 형상화를 통해 ‘개인적 경험의 일반화’에 성공하고, 이로써 문학적 수필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이용옥은 이 두 작품을 통해서 사사로운 경험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해 준다. 작가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일반화하여, 당시의 사회문화적 세태가 반영된 문학적 구성물로 형상화하는 방법을 선보인다. 객관적 서술에 의한 개인사적 경험의 일반화를 통해 수필의 문학적 지위 상승을 시도하는 창작 방법의 하나이다. 이로써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시시콜콜 기록하는 타성에 빠져들지 않으면서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방법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2.여행수필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이용옥의 수필에는 여행지에서의 생각과 감정을 서술한 작품이 상당히 많다. 제1부에 묶어놓은 대부분의 작품이 이런 부류이다. 이들 수필은 기행문이나 기행수필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기행문과 기행수필은 구별해야 하는가, 구별한다면 어떻게 다른가, 기행수필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등이 그것이다.
근대에는 기행문을 수필이라는 장르에 종속된 양식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기행문과 수필은 다른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하여 기행수필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고 이 둘의 차이점을 규정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행수필은 기행문의 문학성을 강조하기 위해 생겨난 용어인 듯하다. 그러다 보니 기행문을 여행보고서 정도의 글로 폄하한다. 기행문은 실용적인 글쓰기이고 기행수필은 문학적인 글쓰기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여행 일정에 따라 보고 들은 사실이나 지식을 단순히 기록한 글은 여행보고서이지 기행문이라 할 수 없다. 기행문은 여정에 따른 견문이나 깨달은 지식을 감흥과 함께 표현하므로 여행보고서와 달리 문학성을 갖춘 글이다. 기행문이든 기행수필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문학성을 갖추고 있고, 있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여정도 드러나 있어야 한다. 문학성과 여정은 기행문이나 기행수필의 필요조건이다.
그렇지만, 여정에 따른 견문이나 감흥을 나열하는 분산 방식의 글쓰기와 여정에서 깨달은 지식이나 느낀 감동을 유기적으로 조직하는 집약 방식의 글쓰기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구성과 주제 구현 방식이 다른 이 두 가지 형태의 여행문학을 굳이 구분하여 부를 용어가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전자를 기행문 또는 여행기라 하고 후자를 기행수필 또는 여행수필이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기행문은 연쇄적인 구성과 분산된 부분의 주제를, 기행수필은 유기적인 구성과 집약된 전체의 주제를 갖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정비석의 <산정무한> 같은 작품은 기행문이고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와 같은 작품은 기행수필이다. 이용옥의 수필작품 가운데 <선인의 길을 따라>는 기행문이고, <석모도 바람길>・<붉은 백기>・<신의 나라 사람들>・<아오테아오라>・<소심한 복수> 등은 기행수필이다. 이들은 기행수필, 즉 여행수필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방향과 깊이를 제시한다. 한두 편만 보아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석모도 바람길>은 제목을 통해 일러주지 않는다면 어떤 여정인지 쉽게 알 수 없다. 길을 나서서 낚시터 둑길을 지나고 논다랑이를 끼고 가다가 보면 황폐화된 삼양염전을 만나며 다시 갈대밭을 통과하면 선착장에 이르는 힐링 코스가 이 작품의 여정이다. ‘석모도 바람길’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어느 지역에 있는 길인지도 모른 채 그저 어느 섬의 둘레길 정도로만 짐작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여정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은 것은 여정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석모도 바람길’은 이내 운명의 길이 되고 낚시터 옆 둑길을 지날 때는 운명 앞에서 각기 다르게 살아간 여주인공들을 떠올린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등장하는 블랑시와 <안티고네>의 여주인공 안티고네가 그들이다. 블랑쉬는 풍요롭던 과거의 삶을 욕망하며 궁핍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 세속적 가치의 희생자가 된 인물이다. 이에 반해 안티고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권력의 회유와 협박에 맞서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나간 초인적 인물이다. 기존의 가치와 운명을 개선하려는 노력 없이 세속적인 꿈을 좇는 블랑시와 평탄한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안티고네의 삶을 대립항으로 놓고 있다. 작가는 이들의 삶을 인간의 두 가지 삶의 양식, 실존 방식으로 인식한다.
한참을 걷다가 만난 논다랑이의 쭉정이 벼이삭, 알곡을 품지 못했으면서도 고개를 쳐들고 있는 쭉정이도 블랑쉬에 오버랩시킨다. 그러나 한때 번창했다가 지금은 황폐해진 삼양염전의 풍경에서 삶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며 살아낸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염전을 하던 사람들이 한때는 영화를 누리다가 값싼 수입소금의 유입으로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일손을 놓은 것인지, 더 나은 수익을 바라고 양식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것이지 알 수 없지만, 블랑쉬처럼 물질적 풍요와 대중적 가치를 좇아간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한다. 작가는 블랑시와 같은 삶에 갇혀 주체적으로 살지 못한 자신을 성찰하면서도, 안티고네가 걸어간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교훈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블랑쉬처럼 살아가는 삶도 결코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발가벗겨진 채 운명의 길 위에 서 본 적이 있느냐고 낮은 목소리로 따져 묻는 불랑시의 애절한 눈빛이 보이는 듯도 하다. 산다는 것이 누군가에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수도 있는 것. 그것은 어쩌면 밤새도록 헛그물질에 빈 배 저어 돌아오는 어부의 밭은 기침소리 같은 것, 추락하는 운명의 공포 속에서도 허세의 끈을 놓지 못하는 블랑시의 간절한 눈빛 같은 것, 폐염전에 이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힘없는 잡풀들의 뒤척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그들에게 당신은 왜 안티고네가 되지 못했느냐고, 왜 그녀처럼 운명에 저항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수 있을까.
-<석모도 바람길>에서
석모도 바람길을 걷는 여정에서 불려온 소재들은 어느 하나 허투루 소환되지 않았다. 이들은 하나의 주제를 향하여 각기 유기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석모도 바람길>은 길 위에서 인간의 속성을 이해하고 진정한 삶의 길을 찾으려는 자아의 번뇌가 고스란히 형상화된 작품이다. 여행수필의 전범이 될 만하다.
<붉은 백기>는 중국 쓰촨 구채구에서의 견문을 쓴 수필이다. 구채구의 유명한 풍경이 아니라 도로를 따라 군데군데 보이는 민가들, 집집마다 오성홍기를 내걸고 있는 티베트족의 연립주택에 주목한다. 분리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족이 중국의 국기를 항상 내걸고 있는 사정을 풀어낸다. 척박한 고산지대에서, 게다가 대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당장의 끼니와 잠자리가 절박한 그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배고픔을 해결해 준 중국 정부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작가는 그 모습을 보며 그럴 수밖에 없는 티베트 민족의 애환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산다는 것은 절박한 현실이고, 현실에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옷과 밥, 그리고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는 몇 평의 공간인 것을 깨닫는 데 이른다. 쓰촨 구채구의 여행체험에서는 에메랄드 빛깔의 신비한 풍광에 대한 감상과 감흥이 주된 관심사가 될 터인데, 수필가 이용옥은 엉뚱하게도 아름다움의 뒤꼍에 웅크린 티베트 민족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춰낸다.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행수필의 고정관념을 흔들고 무너뜨린다. 그의 여행수필은 이처럼 여행지의 아름다운 자연 경치나 이색적인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감동을 펼치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관심 밖에 있는 것들에 호기심을 갖는다.
<신의 나라 사람들>에서도 네팔 사람들의 세태인정에 주목한다. 심각한 빈부 격차와 경제 불평등에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거나 삶의 의욕을 잃지 않는 네팔인의 미소를 이해하려는 데에 작품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뉴질랜드 여행수필인 <아오테라오라>에서도 여행지의 풍경을 그리는 데는 관심이 없다. 빙하가 만들어낸 호수 밀포드 사운드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자연생태를 보존하고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뉴질랜드 사람들을, 테푸이아 마오리 민속마을에서는 영국에게 주권을 넘겨야 했던 마오리족의 비애를, 보타닉 가든에서는 삶의 행복론을 펼친다. <소심한 복수>는이웃하는 것들이 서로를 빛나게 한다면서 체스키크롬로프성과 볼타바강에 둘러싸인 도시 체스키크롬로프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서두에 툭 던져 놓는다. 그리고는 엉뚱하게도 화장실에서 마주친 일본인의 교양을 목도하고 남의 나라 소녀들을 성노예로 유린했던 일본인들의 야만적인 폭거를 떠올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얼마나 엉뚱한 여행수필인가.
이용옥의 여행수필은 여느 여행수필과는 다른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여행지의 풍경과 감상을 이것저것 나열하지 않고 여행지의 불편한 속살을 들춰낸다. ‘여행문학의 본질이 이런 것인가’라며 이 특별함에 시비를 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용옥의 여행수필은 문제적이다. 여행수필이 진정 지향해야 할 새로운 방향에 대하여 다시 생각도록 하기 때문이다.
3.동화 같은 수필은 어떻게 쓰는가
수필가 이용옥은 교직생활을 하면서 만난, 소외되고 상처받은 아이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다문화가정 아이의 이야기인 <장미와 소년>과 <아이의 꽃 성>, 편부 가정에서 컴퓨터 게임 중독에 빠진 아이의 변화와 성장을 다룬 <컴박 김도연>, 계모의 학대와 친부의 방관으로 목숨을 잃은 ‘원영이’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의 감정을 표현한 <황매꽃 피는 날>, 게임에 빠져 자식을 돌보지 않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의 문제적 행동을 살핀 <바람의 흔적> 등이 그들이다.
아이들에 관한 연민과 사랑을 드러내는 이야기라면 동화와 같은 서술양식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황매꽃 피는 날>과 <바람의 흔적>을 제외한 나머지 세 편은 동화를 방불케 한다. 미세한 갈등과 함께 현실의 세계와 환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아이의 꽃 성>이나 갈등과 반전까지 갖춘 <컴박 김도연>은 이야기 전체가 현실의 반영이기에 그 자체에서 전체적인 의미와 감동을 구현해낸다. 이런 점에서 두 작품은 동화 같은 수필이라기보다 수필 같은 동화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허구적인 사건을 다룬 것이 아닌 데다가 온전히 객관적인 서술을 지향하지 않고 작가의 음성을 군데군데 드러낸다는 점에서 동화의 정석은 아니다.
<장미와 소년>은 십일월의 끝자락에 핀 흑장미와 다문화가정의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전반부는 겨울 문턱에 핀 흑장미를 아주 여리고 섬세한 감성으로 바라보는 감동을 표현하여 서정수필에 가깝다. 후반부는 헨리 데이비드라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이다. 눈서리 내리는 계절에 의연하고 고고하게 핀 흑장미를 연민하며 어루만지고 있을 때, “뭐 하세요?” 하고 불쑥 나타난 검붉은 피부의 소년은 흑장미와 동일시된다. 이로써 흑장미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모티베이션motivation 기능을 한다. 흑장미를 끌어당겨 소년에게 보여주고 포즈를 취하게 하여 사진 몇 컷을 찍는다. 그러는 사이에 작가는 소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짤막하게 풀어낸다.
소년은 나이지리아 출신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부진 골격에 눈이 크고 입술이 두툼하다. 아파서 학교에 못 보낸다는 어머니의 문자가 오는 날은 사실 동생이 아프거나 사정이 있어 유치원에 가지 못하는 때였다. 결석이 잦은 소년은 그날도 여러 날 만에 학교에 온 터였다. 태생이나 외모만으로도 소년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게다가 가정형편상으로도 소외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러한 외적 조건이 소년의 성격을 형성한다.
녀석이 꽃가지를 놓고 멋쩍게 웃더니 운동장 쪽으로 뛰어간다. …(중략)… 아이가 달려간 쪽을 본다. 하지만 나는 뛰노는 서너 명의 아이들 중 녀석을 구별해 내지 못한다. 다행이다. 누군가 저를 구별하지 않더라도 그는 늘 무리 속에서 제 자신을 분리해내며 …(중략)… 편치 않게 살아왔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혹은 무심결에 건네는 칭찬이나 격려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면 주먹다짐도 불사하는 아이. 남과 다른 자신을 부정도 긍정도 못하면서 녀석은 본능적으로 자기방어의 벽을 쌓아왔으리라.
-<장미와 소년>에서
이 작품이 동화처럼 느껴지는 것은 소년을 주인공으로 형상화한 때문이다. 작가는 그런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연민의 감정을 애써 감춘 채 소년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기원한다. 아직 피지 않은 흑장미 꽃봉오리를 소년에 비의한다. 도톰한 꽃잎과 검붉은 색채가 제 계절에 핀 장미보다도 싱싱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소년도 알고 자기 자신도 피워내야 할 꽃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찬바람만 좀 더 잦아든다면 햇살만 좀 더 비춰준다면 꽃봉오리도 그 망울을 터뜨릴 것”이라는 문장에는 소외된 아이들의 생활환경 개선에 대한 기대와 희망까지 응축되어 있다.
<아이의 꽃성>은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길고양이를 화자로 설정한 작품이다. 그럼으로써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판타지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 외톨이인 계집아이와 고양이의 일상이 무리 없이 조화되어 있다. 현실과 가상으로 엮어지는 동화적 구성을 갖춘 셈이다. 외롭고 소외된 아이에게 따뜻한 눈길을 주는 작가의 심성이 고양이를 통해 사실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계집아이는 다문화가정에다가 결손가정의 아이이다. ‘지은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계집아이의 아버지는 한국인으로서 마흔을 넘긴 나이에 열여덟의 러시아인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다. 은영이 아버지는 은영이 엄마를 처음에는 사랑했다. 은영이 엄마는 병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도와야 했기에 저녁에 출근하여 새벽에 귀가하는 일을 나갔다. 이 때문에 은영이네 가정에 불화와 폭력이 이어졌고 결국 은영이 부모는 이혼을 했다. 은영이는 일 년 가까이 할머니와 고모 집을 전전하다가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또래들로부터 로스케 양공주라는 놀림을 받는 외톨이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고양이로 위임된 작가는 아이의 감성을 가지고 아이의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언제나 혼자인 계집아이가 하굣길에 고양이를 만나 함께하는 이야기를 작가는 매우 리얼리티하게 그려낸다. 또래들과의 잔잔한 갈등을 그려낸 이 작품은 고양이의 시선을 통해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소외와 외로움과 함께 비정한 인간에 대한 반감까지 드러낸다. 코스모스 꽃이 한창 어우러진 마을 모퉁이 공터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방인의 꽃 성, 즉 계집아이와 고양이의 이상적인 세상을 상징한다. 그리고 소외의 공간, 도피의 공간이기도 하다.
허구적인 사건인가 아닌가, 그리고 갈등의 유무나 서술의 객관화 정도가 동화적인 수필과 수필적인 동화를 가름한다면 <장미와 소년>에 비해 <아이의 꽃성>이 동화에 가깝다. <컴박 김도연>도 동화를 방불케 한다.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아이가 화자인 선생님의 관심과 노력으로 컴퓨터를 매우 능숙하게 다루는 아이로 변화하고 성장해 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인물관계가 설정되어 있고 이들 사이에 미세한 갈등이 그려져 있으며 서사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서술이 이루어져 있다. 허구적으로 꾸미지 않았을 뿐이지, 이들 작품은 동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주변의 따돌림이나 가정의 결손으로 냉혹하고 가난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를 지닌다. 대부분의 동화가 낭만적 이상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는 데 반해, 이들 작품은 현실주의적이기 때문이다.
4.인간의 삶을 함부로 단정해도 되는가
수필은 인간이나 삶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학이다. 그래서 많은 수필이 작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반성적 성찰에 이르고 그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추구하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정의하고 다시 위치시키려는 과정에서 세속적인 현실의 삶은 부정되고 이상적인 삶만을 인정하기 일쑤다.
이용옥은 이와 같은 보통의 수필문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어느 한쪽의 삶을 무조건 부정하지도 않고 긍정하지도 않는다. 인간에 대하여, 그들의 삶에 대하여 합리적인 이해에 이르고자 한다.
<석모도 바람길>에서 작가는 블랑시와 같은 삶에 갇혀 주체로 살지 못한 자신을 성찰하면서 안티고네와 같이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물질적인 풍요를 좇던 블랑시의 삶에 연민을 느끼고 그런 삶도 이해하려고 한다.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붉은 백기>에서도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을 그토록 원하던 티베트족이 중국의 국기를 항상 내걸고 있는 사정을 무조건 비난하지 않는다. 대지진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당장의 끼니와 잠자리가 절박한 현실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준 중국 정부에 감사의 표시를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애환을 이해하려고 한다. 지금 비록 오성홍기 아래에서 굴욕의 세월을 보낼지언정 내일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무조건 부끄러운 밥알을 거부하고 독립 의지를 불태우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신의 나라 사람들>에서 빈곤한 생활이나 빈부 격차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에 삶의 의욕을 잃지 않고 항상 미소 짓는 네팔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인간의 삶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작가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인생의 짐을 신에게 맡긴 채 항상 홀가분한 미소를 짓는 네팔인, 있는 그대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내세에 대한 믿음으로 궁핍한 오늘을 미소로 살아가는 네필인의 삶을 무조건 긍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실현시켜 준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지도 않지만, 빈곤은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것이라는 인식도 지니고 있다. 작가는 행복한 삶의 조건에 대해 그 어떤 속단도 내리지 못한다.
<먼 훗날> 같은 작품에서도 삶의 의미나 방식에 대한 사유를 드러낸다. 그러나 작가는 진정한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유신 시절 신랄한 사회비판을 하다가 선동 혐의로 옥고를 치렀던 어느 철학자가 강연에서는 왜 당신이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길을 가라고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한다. 젊은 날에 꿈꾸었던 새로운 날이 오늘이고 오늘 또다시 새로운 날을 꿈꾼다면 내일이 오늘이 되어 다가오는, 삶은 그렇게 소모되어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고 할 뿐이다.
이용옥은 형태가 각기 다른 삶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삶이 진정한 것인가를 속단하지 아니한다. 어떤 삶은 부정하고 어떤 삶은 긍정하면서 흑백논리로 인간을 바라보지 않는다. 바람직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를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이해하려고 한다. 어떠한 삶이 행복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쉽게 단정하지 못한다. 그의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시각에는 인간의 삶을 함부로 단정해서도 안 되고 단정할 수도 없다는 작가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이용옥의 진중한 태도는 진정한 삶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함부로 속단해 버리곤 하는 한국수필에 하나의 경종을 울릴 만하다. (《수필미학》 통권 26호, 2019 겨울)
첫댓글 선생님. 글은 읽습니다마는 본문이 없어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아쉽습니다.
( 이왕이면 선생님 글에 언급된 작품이라도 선생님 카페에서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면 너무 많이 바라는 건 알지만요
곳에 따라서는 그럴 수가 있어 죄송하지만 말씀드립니다.)
이왕 말씀드린 참에 한 가지 부연하자면요, 작품집 작품 제작 날짜가 있으면 도움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