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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클 제650차 2017년 제1차 토요클래식 특강 (48) 2017-03-25)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1)
(Metamorphoses of Ovid 1)
강사: 이기언 선생
1. 작가에 대하여
Ovidius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Publius Ovidius Naso BC43-AD17)는 이탈리아 중부 아브루치 주의 술모에서 지방의 부유한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많은 기사층 출신의 자녀들처럼 오비디우스는 일찍 로마로 유학하여 관리가 되기 위한 필수교육인 수사학과 웅변술을 배웠다. 법조계로 진출하는 것이 부친의 소망이었으나 본인은 법률 공부보다는 시작이나 화려한 사교를 즐겨, 법정변론을 하려 해도 "말이 저절로 시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문화의 중심지 아테네로 유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로 돌아와 약간 관리 경력을 쌓지만 곧 이를 포기하고 시인이 되고자 마음을 굳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문인들을 후원하는 메살라 코르비누스에 발탁되어 당시의 유명 문인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티불루스 등의 시인 서클에 가담, 당시 유행했던 엘레게이아풍의 연애시로 필재를 휘둘러 명성을 얻었다. 그가 남긴 시 중에는 사랑에 관한 저작이 압도적으로많다.<여걸들의서한(Heroides)>(BC19),<사랑의노래(Amores)>(BC15),<사랑의기술(Ars Amatoria)>(AD2) <사랑의 치유(Remedia Amoris)>(AD 2) 등등. 이 중 <사랑의 기술>과 <사랑의 치유>는 묶어서 한 작품으로 취급되는데, <사랑의 기술>은 남자를 위한 여자 꼬시는 법, 여자를 위한 남자 꼬시는 법을 설명하고 로마 버전 PUA... <사랑의 치유>는 실연 당했을 때 극복하는 법을 설명한다. 이 외에도 <로마의 축제일(Fasti)>(AD 8) 등의 시를 썼다. 그러나 연애의 농락술을 교훈시풍으로 엮은 《사랑의 기술(Ars Amatoria)》이 풍속을 문란케 하는 책이라 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 후 연애시와는 결별하고 이야기시의 제작에 몰두, 필생의 대작 《변신이야기(Metamorphoses)》를 완성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헌정하려던 《행사력(Fasti)》을 제작 중이던 서기 8년 황제로부터 돌연 로마 추방을 선고 받았는데 이 추방에 얽힌 경위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만년은 전반이 화려했던 것에 비해 비참했다. 흑해 연안의 벽지 토미스에서 호소와 애원이 담긴 서신을 고국에 띄우며 10년을 보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2. 플루토의 사랑. 케레스와 프로세르피나 (Book 5 : The Rape of Proserpine)
The Rape of Proserpine
무우사는 칼리오페가 했던 노래를 자기가 한 양 다음과 같은 사연을 엮어내었다. <케레스>여신께서는 처음으로, 꼬부라진 쟁기로 굳은 흙을 일구시고, 처음으로 씨앗을 뿌리시고 곡물을 거두셨으며, 처음으로 세상의 법을 지으신 분이시니, 우리 가운데 그분의 은덕을 입지 않은 자가 없다. 내 이제 그분의 은덕을 노래하지, 바라건데 내 노래가 그 분 은덕을 드러내는데 모자람이 없을지니, 그분이야말로 모자람없이 칭송받아야 마땅하신 분이심이라. 거대한 트리나크리스가 튀폰의 사지를 짓누르니, 아 자가 누구인가, 감히 천궁을 넘보다가 이 거대한 섬에 깔린 자가 아니던가. 이 자는 이따금씩 이 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거나 몸을 일으키거나 했다. 그러나 이 자가 무슨 수로 이 신들의 감옥을 벗어나겠는가. 이 자의 오른손은 아우소니아의 펠로로스 곶에 묶여 있었고, 왼손은 파퀴노스 곶에 묶여 있었으며 양다리는 릴뤼마에온 곶에 묶여 있었는데......머리는 아이트나 산에 깔려 있는 채로 이 자는 입으로 재와 불꽃을 사방으로 뿜어내었구나. 이 괴망한 튀폰이 이 무겁디 무거운 산을 밀어내고 도시의 산 위를 구르려 하는구나. 그럴 적마다 대지가 몹시 요동했고 그래서 저 적막한 어둠의 나라를 다스리던 저승왕 플루토36)는 날마다 좌불안석이었다. 행여 그 저승왕 플루토라면 이런 참화를 미연에 방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암흑세계의 무단자 플루토는 검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트리나크라스 땅을 둘러보러 지상으로 나왔더란다. 그러나 모두 아다시피 땅의 바탕이 어디 그렇게 쉬내려 앉는 것이라더냐. 플루토는, 땅을 둘러보고 나서 오늘 내일 내려앉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음을 놓았더란다. 그러나 에뤽스의 여신은 자신의 성산에서, 이승으로 나온 이 저승의 무단자를 보고는 날개 달린 아들 쿠피도를 껴안으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는구나. <내 아들아, 내 손이자 내 팔이자 내 기둥인 내 아들 쿠피도야, 세왕국의 왕 자리를 놓고 제비를 뽑을 때 세번째 제비를 뽑아 그 땅의 왕이 된 저 자의 가슴을 너의 화살로 꿰뚫어 주려무나. 너는 이미 천궁의 신들까지 정복한 사랑의 신이 아니냐? 유피테르 신을 비롯, 천궁의 신들조차 네 손안에 들지 않았느냐? 바다 신들의 우두머리인들 어디 네 화살을 당할 수 있다더냐? 그런데 어째서 타르타로스만은 네가 지배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어째서 저승까지 네 수중에 넣어 네 판도와 내 판도를 넓혀보려 하지 않느냐? 저승 땅은 세계의 3분의 1이다. 장차 이 저승을 정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천궁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게다. 사랑의 신이 휘두르는 권능이 이래서야 되겠느냐? 이래가지고서야 어디 네가 나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느냐? 팔라스와 저 사냥쟁이 디아나는 네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있지 않느냐. 이래서는 안된다. 네가 손을 쓰지 않으면 이 케레스의 딸 역시 처녀로 살아가게 될 게다. 너와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해도 좋으냐? 너에게, 조금이라도 너와 나의 영토와 직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거든 이 케레스의 딸과 그 백부를 사랑으로 엮어 버려라.> 여신의 말이 끝나자 쿠피도는 화살통을 열고, 제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화살중 에서도 가장 날카롭고, 가장 실하고, 주인의 뜻을 가장 잘 따르는 살 한 대를 골랐지. 화살 고르기를 마친 쿠피도는 활을 무릎에 올리고 구부려 시위에다 화살을 메기고는 플루토의 가슴 한복판을 겨누고 쏘았다는군. 헨나 성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페르고스라고 하는, 아주 깊은 호수가 있어. 카위스트로스엔들 백조가 여기만큼 많을까? 나무가 빈 데 없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 나뭇잎이 차양막이 되어 포에부스의 빛을 가리는 곳이 바로 이곳...가지는 늘 그늘을 지어내는 곳, 늘 봄이라서 풀밭에는 늘 꽃이 만발해 있는 곳도 이곳. 프로세르피나(페르세포네)는 틈만 나면 이 풀밭으로 나와 오랑캐꽃이나 백합을 꺾었지. 이날도 프로세르피나는 동무들과 함께 나와 동무들을 이기려고 열심히 바구니와 앞치마에 꽃을 따 담았구나. 플루토는 이 프로세르피나를 보는 순간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지. 왜? 쿠피도의 화살을 맞았으니까. 플루토는 염치불구하고 이 처녀를 납치하기로 마음먹었지. 무서워라, 쿠피도가 부리는 손속! 플루토가 쫓아오는 것을 본 프로세르피나는 비명을 지르며 어머니와 동무들을 불렀어. 동무들을 부르기보다는 어머니를 더 많이 불렀을 테지. 프로세르피나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허리띠는 풀어지고, 치마 가장자리는 찢겨나가고, 치마가 찢겨나가자 거기에다 따 담았던 꽃들이 우수수 떨어졌어. 어리고 순진한 프로세르피나에게는 꽃 떨어지는 것 또한 눈물거리. 프로세르피나를 사로잡은 저승왕 플루토는 수레에 올라 말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검은 고삐로 말의 목과 갈기를 때렸지. 저승왕의 수레가 어디를 지났느냐. 깊은 호수를 지나고, 찢긴 대지 틈으로 유황이 거품을 일으키며 끓어오르는 팔라키 연못 위를 지나고, 원래 코린토스 지협 출신인 바키아다이(옛 코린토스 왕인 바키스의 자손들)가 성벽을 세웠던 큰 항구와 작은 항구 사이를 지났지. 퀴아네 샘과 피사의 아레투사 샘 중간에는 두 개의 곶이 있는데, 이 해협에 퀴아네라고 하는 요정이 살고 있었더란다. 시켈리아(시실리) 요정 중에서도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요정 퀴아네가. 그래서 샘 이름도 퀴아네 샘... 퀴아네는 플루토의 수레에 실려가는 프로세르피나를 알아보고는 몸을 일으켰지. 그러고는 감히 플루토에게 이렇게 탄원했대.
<플루토 신이시여, 더 이상은 못 가십니다. 케레스 여신께서 원치 않으시는 바에, 플루토 신께서는 결단코 여신의 사위가 되실 수 없습니다. 플루토 신께서는 그분의 따님을 납치하실 일이 아니라 그 분께 따님을 주십사고 청하셨어야 했습니다. 견주기가 황송스럽기는 하나 저 역시 강의 신 아나피스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분의 신부가 된 것은 그분이 당신의 신부 되어주기를 저에게 청하셨고 제가 그분의 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플루토 신께서 납치하신 그 처녀처럼 협박을 못 이겨 혼인했던 것은 결탄코 아니랍니다.> 퀴아네는 이렇게 말하면서 두 팔을 벌려 샘물로써 플루토의 앞길을 막았다지. 사투르누스(크로노스)의 아들 플루토가 한갓 샘에 지나지 않는 이 퀴아네의 충고에 귀를 기울였을까? 플루토는 역정을 내면서 고삐로 말잔등을 치는 동시에, 그 힘 좋은 손에 든 저승의 왕 홀로 탁, 이 샘을 쳤다지. 그러자 샘 바닥이 갈라지면서 타르타로스로 통하는 길이 열렸지. 플루토는 이 길을 통하여 저승으로 들어갔고, 퀴아네는, 납치당해 끌려가는 프로세르피나가 불쌍해서, 샘의 권리가 짓밟힌 것이 분해서, 한없이 울었는데... 가엷어라, 퀴아네, 얼마나 울었으면 슬픔이 요정의 육신을 녹여 물이 곳 요정, 요정이 곧 물이게 했을까. 요정의 사지가 녹기 시작하자 뼈와 손톱 발톱도 흐물흐물해졌다지. 맨 먼저 그 늘씬하던 몸이 녹았고, 이어서 검은 머리카락, 손가락, 다리, 발이 차례로 녹아서 물이 되었지. 가느다란 사지가 녹아서 물이 되는 차례가 어쩌면 그렇게 간단했던지. 사지가 물이 되자 어깨, 등, 옆구리, 젖가슴이 사라지면서 혈관으로는 피 대신에 물이 흐르고...하릴없어라. 미친 듯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딸을 찾아온 땅, 온 나라를 누비는 케레스여. 이슬로 머리카락을 적시는 아우로라(에오스)도, 초저녁별 헤스페로스도 이 여신이 쉬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니. 케레스 여신은, 아이트나 산에서 불을 붙여온 횃대를 들고 낮비, 밤이슬을 맞으며 딸을 찾아다녔다. 낮이 별빛을 끄면, 해뜨는 동쪽에서부터 해지는 서쪽까지 두루 누비며, 가엾어라. 피로와 갈증에 시달리다 못해 입술 축일 만한 샘을 찾아다니던 이 대지의 여신 앞에 오막살이 한 채가 나타난 것은 해질녘. 여신이 문을 두드리자 나와서 응대한 사람은 허리 꼬부라진 노파. 여신의 행색을 보고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안 이 노파, 물에다 볶은 보리가루를 풀어 마실 것을 만들어주었다는 군. (시리얼은 케레스의 영어식 발음 시어리즈에서 나온 말)
케레스 여신이 이걸 받아 마시는데, 건방진 아이 하나가 지나가다가 여신의 얼굴을 보고는, 할마시, 참 게걸스럽게도 처먹는다, 이랬다던가. 아이의 말에 화가 몹시 났던 케레스 여신은 물과 보리알이 섞인 이 마실 것을 아이의 얼굴에다 확 끼얹어버리는데... 아, 그 순간 아이의 얼굴에는 거뭇거뭇한 반점이 나타나면서 팔 있던 자리에서는 다리가 돋아났고, 엉덩이에는 꼬리가 나오기 시작했대. 이 건방진 아이, 여신을 비웃었다가 도마뱀으로 둔갑한 것이지. 노파가 기겁을 하고 이 괴상하게 생긴 것에 손을 대려 하자, 이 도마뱀은 황급히 도망쳐서 그 몸을 감추고 말았다는 것. 이 동물의 몸에는 지금까지도 알락달락한 반점이 있어. 이 <반점>이라는 말이 결국은 이 동물의 이름이 되고 만것...(아스카라보스,'도마뱀' 라틴어 '스텔리오') 누가 이 여신이 헤맨 땅 이름 바다 이름을 다 섬길 수 있으랴, 온 바다를 다 건너고 온 땅을 다 헤맸는데. 온 세상을 다 뒤진 여신은 다시 시카니아(시실리의 별명)로 되돌아갔지. 여신은 이 섬에 이르자마자 요정 퀴아네를 찾았다는군. 하지만 이를 어째. 물로 화하지 않았더라면 이 퀴아네가 케레스 여신께 자기가 본 것, 겪은 것을 다 이를 수 있었으련만. 말이야 하고 싶었겠지만 물로 화한 요정에게 입이 있을 리 없고, 혀가 있을 리 없으니. 그런데도 요정은 딸 잃은 어머니에게 어떻게든 뜻을 전하고 싶어서 마침 그 물에 떨어져 있던 프로세르피나의 허리띠를 살며시 물 위로 떠올려 여신께 보여주었다지. 케레스 여신이 외딸 프로세르피나의 허리띠를 알아보지 못할 리 있으랴. 여신은 허리띠를 보자마자 딸 잃은 설움이 북받쳐 새삼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는군. 하지만 울부짖는다고 어디 될 일이던가. 여신은 딸의 행방을 귀띔해 주지않는 온 땅을 원망했구나. 곡물을 기르게 해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것들이라고 했구나. 곡물을 안아 기를 자격이 없는 것들이라고 했구나. 여신은 땅을 원망하다가 이번에는 실종된 딸의 유품을 보여준 트리나크리아(시실리 섬)를 원망했구나. 그래서 여신은 손을 들어, 그 땅을 가는 쟁기라는 쟁기는 모조리 그 날이 부러지게 하고, 그 땅을 가는 쟁기를 끄는 황소라는 황소는 모조리 다리가 부러져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말들었지. 하지만 그런다고 분이 풀릴까. 여신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이번에는 땅에 명하여 농부들의 믿음을 저버리게 하고, 씨앗에 명하여 싹을 틔우지 못하게 했어. 비옥하기로 소문나 있던 그 고장 땅은 여신의 명을 받들어 황무지로 둔갑. 농부들의 희망을 저버려도 철저하게 저버렸고, 씨앗은 여신의 명을 받들어 싹을 틔우지 않거나, 싹을 틔우더라도 곧 말라버렸다지. 용케 한동안 자라던 싹이 있었어도, 오래지 않아 햇볕에 말라버리거나, 폭우에 씻겨 가버리거나 새 먹이가 되고는 했다지. 그래도 자라는 싹은 독보리, 엉거시, 잡초가 거들어 쓰러뜨렸다지. 그러니 옥토가 황무지 될 수밖에. 그러던 차에 강의 신 알페이오스의 사랑을 입던 샘의 요정 아레투사가 제 샘에서 고개를 들고, 물이 뚝뚝 듣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케레스 여신께 이렇게 일렀더라지.
<위대하신 대지의 여신, 곡물의 여신이시여, 따님을 찾아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셨으니, 여신의 믿음을 배신한 땅을 원망하실 만도 하지만요, 땅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만일에 땅이 입을 벌려, 따님을 납치한 자를 숨겼다면 그야 어쩔 수 없어서 그랬을 테지요. 저는 제가 고여 있는 이 땅을 용서하시라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이 고장 요정이 아니고 엘리스의 요정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피사입니다. 여신이시여, 이 땅이 저에게는 타관입니다만 저는 어느 누구보다 이 땅을 사랑합니다. 지금은 이 아레투사의 고향, 이 아레투사의 고국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자비로우신 여신이시여, 원하옵건대 이 땅을 은혜롭게 하소서. 제가 고향을 떠나 저 넓은 바다를 건너 이곳 오르튀기아까지 온 내력은, 여신의 분노와 근심이 다소 가라앉은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 말씀만은 먼저 여쭙겠습니다. 저는, 대지가 저를 위해 열어준 길을 따라 이곳까지 도망쳐왔습니다. 대지 속 깊은 굴을 지난 저는 고개를 들고 낯선 별들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곳에 이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 두 눈으로 프로세르피나님을 똑똑히 뵌 것은 대지 저 깊은 곳에 있는 스튁스의 심연을 흐를 때였습니다. 따님께서는 슬픈 얼굴을 하고 계시었습니다. 공포의 그림자가 어려 있었지요. 하지만 그분은 저승세계의 왕비, 지하세계 지배자의 배우자가 되어 계시더이다.> 이 말을 들은 케레스 여신은 한동안 돌이라도 된 듯이 그 자리에서 있었더라지. 여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자기가 그런 지경에 처해 있는데도 모르는 체하고 있는 천궁의 여러 신들을 벼르고 있었으리라. 여신은, 천궁으로 올라갔지. 천궁에 오른 여신은 헝크러진 머리카락에 험상궂은 눈매를 하고 유피테르 신의 면전에서 대신께 대들었다는구나. <유피테르 대신이여, 내 딸이자 그대의 딸인 프로세르피나 문제로 청원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왔으니, 내 말을 들으세요.(케레스와 유피테르는 남매간이나 프로세르피나는 이 둘 사이에서 난 딸이다) 딸의 어미가 그 아비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해서 딸이 그 아비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아이 어미가 나라고 해서 그 아이를 업신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토록 오래 찾아다니던 그 아이 행방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대신께서 보시기에는, 내가 그 아이를 잃은 것이나, 이제 그 행방을 알아낸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행방을 알았으니 찾아오면 되지 않느냐고 하실 테지요? 하지만 나는 대신이 아닙니다. 내 딸을 돌려주게만 하신다면, 내 딸을 도둑질해 간 자(플루토)의 허물은 잊겠습니다. 도둑맞았으니 이제는 내 딸이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대신의 딸도 아닙니까? 만일에 그 아이가 대신의 딸임에 분명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
니까, 약탈자를 지아비로 섬기라고는 않으시겠지요?> 대신은, 케레스가 종주먹을 들이대는데도 화도 안 내고 이렇게 대답했지. <프로세르피나가 그대에게 귀한 딸이라면 내게도 귀한 딸이오. 따라서 나 역시 그대 못지않게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오. 그러나 그대는 사상에 이름을 붙이되 온당한 이름을 붙여야 하오. 우리 딸을 데려간 자의 행위는 약탈행위가 아니라 조금 도를 넘은 사랑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그대가 동의한다면 이 사위 되는 자도 우리를 그리 불명예스럽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비록 그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고는 하나, 아무나 이 유피테르의 형제일 수 있는 것은 아니오. (플루토는 유피테르보다 먼저 태어났으나 나중 자란, 말하자면 형이자 아우인 동시에 사위가 된다.) 그러나 그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것도 아니오. 그는 이 세상을 상속받을 때 제비를 잘못 뽑아 이 천궁을 나에게 양보하고 저승 왕이 된 것뿐이오. 그대가 이렇게 우기니 프로세르피나를 마땅히 천궁으로 데려와야 할 일이기는 하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소. 프로세르피나는, 그곳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았어야 하오. 나를 야속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이것은 파르카에(모이라이)가 정한 법이니까.> 유피테르로부터 이 말을 들은 케레스는, 프로세르피나가 저승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이 딸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손을 썼지. 하지만 파르카에의 법은 카레스의 소원이 넘어야 할 크고도 험한 걸림돌. 프로세르피나가 저승에서 금식의 법을 어겼구나. 어쩔꼬, 프로세르피나가 이 저승에서 손질이 잘 된 뜰을 지나다가 무심코 석류를 하나 따서 그 알 일곱 개를 먹었으니...(석류알을 먹었다는 것은, 사랑을 나누었음을 상징한다.) 프로세르피나가 석류알 먹는 것을 누가 보았을까? 오르프네(암흑)라는 요정의 아들 아스칼라포스였다는군. 아베르노스(저승의 입구)의 요정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요정 오르프네가 아케론(비통: 저승의 강)의 씨로 지어 그 음습한 강 언덕 숲에서 낳은 아들...아스칼라포스는, 프로세르피나가 석류알 먹는 것을 보고는 이 소문을 퍼뜨려 결국 프로세르피나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게 했지. 아레보스(암흑)의 왕비(프로세르피나)는 이에 앙심을 품고 이 수다쟁이를 불길한 새로 전신하게 했으니, 보라. 왕비가 이 자의 머리에다 플레게톤(화염; 저승의 강)의 물을 뿌리자 이 수다쟁이의 입에서 부리가 생겨나면서 몸에는 깃털이 돋았으며 눈이 커지기 시작했어. 오래지 않아 인간의 형상이 없어지면서 날개도 돋았지. 이어서 머리가 엄청나게 커지고, 발에는 꼬부라진 발톱이 생겨나고... 새가 되었는데도 이 새는 제힘으로 제 날개를 들지 못한다던가. 무슨 새가 되었는가 하면, 인간에게 불길한 소식을 전하는 새, 불길한 전조를 보이는 기분 나쁜 새, 올빼미가 된 것이지. 아스칼라포스가 이런 벌을 받은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럼 아켈로오스의 딸들은? 어째서 아켈로오스의 딸들은 새로 변하였으되 몸은 새, 얼굴은 인간인 괴상한 새로 변하였을까? 이시레네스(사이렌)가 이런 벌을 받은 게, 프로세르피나와 함께 꽃을 꺽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이들 역시 프로세르피나를 찾아 바다 위를 날면서 바다의 신들에게 기도했기 때문이다. 프로세르피나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하게 해달라고 바다의 신들에게 조르다가 이 꼴이 된 것이다. 이들의 몸에 금빛 깃털이 생겨난 것은, 바다의 신들이 이들의 소원을 이루어주기로 작정하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면 바다의 신들이, 이들을 새로 만들되 인간의 음성, 인간의 얼굴만은 그대로 둔 까닭은 무엇일까? 바다의 신들은, 그렇게 소식을 전하고 싶으면 전하여라, 이런 생각에서 인간의 소리, 인간의 얼굴을 남겨놓은 것이지. 인간에게 소식을 전하려면 인간의 소리가 있어야 하고, 인간의 소리가 있으려면 인간의 혀가, 인간의 혀가 있으려면 인간의 얼굴이 있어야 하니까... 그래야 아름다운 노랫소리와 뛰어난 말재주로 그 천직을 다할 수 있게 될 터이니까. 유피테르는, 슬픔에 잠겨 있는 케레스와 정든 아내를 내어놓지 않으려는 풀루토를 화해시키려고 애썼어. 일년을 반으로 나누고, 반은 어머니 나라의 땅, 반은 지아비의 나라 저승에서 지내게 한 것. 프로세르피나는 이 두 나라에서 번갈아가며 살 수 있게 된 것이지. 이렇게 되자 프로세르피나의 표정과 분위기가 그렇게 달라졌을 수가 없었다는 군. 디스(플루토)가 보기에도 견줄 데 없이 어둡고 슬퍼 보이던 아내의 얼굴이, 비구름 헤치고 나온 태양처럼 환해 보이더라나.(프로세르피나의 운명은, 일년의 반은 땅 속에 묻혀있고, 나머지 반은 지상에 나와 있는 씨앗의 운명을 상징한다.)
3. 미네르바 여신과 아라크네의 솜씨 겨루기 (Book 6 : Arachne)
The Spinners (Athena and Arachne), by Diego Velázquez
아라크네는, 베 짜는 솜씨에 관한 한 미네르바 여신에 못지않게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처녀였다. 미네르바 여신 자신도 이러한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이 아라크네를 유명하게 한 것은 베 짜는 재간이었다. 아라크네의 아버지는, 포카이아 땅에서 나는 보라색 염료로 양털을 염색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머니 역시 초라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딸은, 위파이파 마을의 오두막에서 태어나 그 오두막에서 베 짜는 재간은 온 뤼디아를 흔들어놓을 만한 이름을 얻고 있었다. 이 처녀의 놀라운 손재주를 구경하러 가느라고 트물로스 산 요정들은 포도밭을 떠났고 팍톨로스 강 요정들은 물을 떠났다. 아라크네가 짜놓은 베만 아니라, 짜고 있을 때의 손놀림도 훌륭한 구경거리였다. 가령 실을 실꾸리에다 감는 것이라든지, 손가락으로 실을 빗어 구름같은 털실의 거스러미를 털어내고 긴 실타래를 뽑아내는 것이라든지. 베틀에 앉아 무늬를 짜넣는 모습은 자체가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구경거리였다. 사람들은 팔라스 여신으로부터 그런 재간을 배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라크네는 이를 부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를 내기까지 하면서 ‘그럼 팔라스 여신더러 와서 저와 겨루어보시라고 하지요. 제가 진다면 어떤 벌이라도 받겠어요.’
팔라스 여신은, 이 소문을 듣고는 백발 노파로 둔갑하여 아라크네의 집을 찾았다. 지팡이가 없으면 걸음을 옮겨놓기도 힘들어 보이는 그런 노파의 모습을 잠시 빌린 여신은 이 집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이것 보아요, 처녀. 나이먹은 할망구의 말이라고 해서 다 귓가로 흘려버리면 안 됩니다. 나이를 먹은 사람은 본 것 들은 것이 그 만큼 많은 법이니 더러 쓸 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을 귀담아 들으세요. 인간만을 상대고 겨룬다면 그대가 가장 솜씨 좋은 분임에는 틀림이 없겠지만요. 여신의 신성은 그렇게 욕보이는 게 아니랍니다. 그러니, 속알머리 없은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하고 여신께 용서를 비세요. 그러면 여신께서도, 너그러운 분이시라니까 처녀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라크네는 감던 실꾸러미를 뽑아들고 노파를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그것으로 노파를 갈길 것 같았다. 그러나 갈기는 것만은 가까스로 참아낸 아라크네는, 팔라스 여신인 줄도 모르고 이 노파를 꾸짖었다.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할머니가 너무 오래 사신게지요. 아니면 연세를 너무 잡수셔서 망령이 나셨거나. 며느리나 딸이 있으시거든 거기에나 가셔서 그런 말씀 들려 주세요.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까요. 그런 소리 듣는다고 내 마음이 달라질 줄 아세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왜. 팔라스 여신더러 몸소 오시라고 하시지 그래요? 팔라스 여신이 왜 내 도전을 피하기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여기 왔다. 여신은 이렇게 대꾸하고는 노파의 모습을 벗고 팔라스 여신의 참 모습으로 돌아섰다. 요정들과 뮈그도니아 여자들은 모두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여신을 경배했다. 모두가 겁에 질려 몸둘 것을 몰랐다. 아라크네만 제외하고. 아라크네는 벌떡 일어났다. 아라크네의 빰은 잠깐 붉게 상기되었다가는 곧 핏기를 일었다. 새벽의 손길에 붉게 물들었다가 해가 돋으면서 창백해지는 하늘빛 같았다. 아라크네는 제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오직 이길 수 있다는 일념으로 제 운명과 맞서려 할 뿐이었다. 유피테르의 딸도 더 이상은 이 아라크네를 달래려 하지 않았다. 여신은 이 도전을 받아들여 곧 겨루기에 들어갔다. 여신과 아라크네는 방 이쪽저쪽에 놓은 베들로 올라가 날실을 걸었다. 둘 다 부테허리를 하리에 감고 잉아에 날실을 꿴 다음 재빠른 손놀림으로 씨실을 북에다 물려 날실 사이로 밀어넣었다. 씨실이 날실을 지날 때마다 바디가 이 씨실을 쫀쫀하게 짰다. 옷을 걷어올려 젖가슴을 질끈 동여매고 여신과 처녀는 있는 힘과 기를 다해 베를 짰다. 이 둘의 손은 쉴새없이 베틀 위를 오고갔다.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이들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까맣게 잊고 일했다. 이들이 베에다 짜넣은 실에는, 튀로스 염료로 물들인 보라색
실은 물론이고 색조가 조금 씩 다른 여러 가지 색실이 섞여 있었다. 한 가지 색실이 다른 색실과 겹치는 부분에서는 어디서부터 이 색실에서 저 색실로 바뀌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소나기가 하늘에다 그려놓은 긴 활꼴 무지개와 흡사했다. 무지개가 지닌 여러가지 색깔의 띠는, 맞물리는 곳에서는 하나로 보이지만 여기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전혀 다른 색깔로 보이는 법이다. 옛이야기의 내용이 그림으로 짜여 들어가면서 금빛 색실도 이 갖가지 색실에 섞여 팔라스 여신은 케크롭스가 쌓은 성채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마르스의 바위와, 이 도시의 이름을 두고 옛날 자신과 넵투누스가 겨루기하던 광경을 베폭에다 짜넣었다. 이 겨루기 마당에는 올륌포스의 12신 중의 나머지 신들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유피테르를 중심으로 높은 보좌에 열석해 있었다. 신들은 외관만으로도 어느 신이 어느 신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제왕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알아보기가 쉬웠다. 해신 넵투누스가 선 채로 그 긴 삼지창으로 바위를 치자 바위 틈에서는 물이 솟아나왔다. 넵투누스는 이로써 이 도시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데, 이 모든 광경이 미네르바 여신이 짜는 베폭에 그려지고 있었다. 팔라스 여신은, 창과 방패를 든 자신의 모습을 거기에 짜넣었다. 베폭에 나타난 여신은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가슴은 아이기스로 가리고 있었다. 팔라스 여신이 창으로 대지를 찌르자 거기에서는 열매가 잔뜩 달린 감람나무가 솟아나고 있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신들의 면면도 볼만했다. 여신은 이 베폭 그림에다 니케그림을 짜넣음으로써 자신과 넵투누스의 겨루기 그림을 마무리지었다. 여신은 이로써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이 그림의 네 모서리에다 네 개의 겨루기 장면을 더 짜 넣었다. 다 자신의 겨루기 상대인 오만 방자한 아라크네에게, 신들을 가볍게 여기면 어떤 벌을 받는지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 이 네 개의 그림은 크기는 작아도 색채는 그지없이 현란했다. 첫번째 그림에는, 위대한 신들의 이름을 도용했다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눈 덮인 산으로 변한 트리키아의 하이모스 산과 로도페 산이 그려져 있었다. 그 다음 모서리는 퓌그마이오이의 슬픈 운명을 증언하는 그림, 즉 유누가 겨루기에서 이 족속의 여왕을 이긴 뒤, 이 여왕을 학으로 전신시켜 제 족속에게 싸움을 걸게 했던 사연이 그림으로 짜여들어가 있었다. 팔라스 여신은 또, 전능한 유피테르의 배우자와 그 아름다움을 겨루겨 하다가 바로 그 유노에 의해 새로 전신 한 안티고네이야기도 그림으로 짜 넣었다. 안티고네의 상대가 유노 여신이었던 만큼 일리온 도성도 아버지 라오메돈 왕도 나설 수가 없었다. 유노 여신의 저주를 받은 이 처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돋아난 순백의 날개를 퍼득거리고, 뽀족하게 돋아난 부리를 달싹거리며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아라크네는, 황소로 둔갑한 유피테르에게 속아 순결을 잃은 에우로파 이야기를 그림으로 짜넣었다. 황소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고 파도는 베폭 위에서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에우로파는 떠나온 해변을 돌아다보면서 함께 놀던 동무들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에우로파는 바닷물이 차가웠던지 발을 움츠리고 있었다. 아라크네의 베폭에는 독수리에 타눌린 아스트리아, 백조의 날개에 붙잡힌 레다 그림도 들어가 있었다. 아라크네는 이 밖에도 둔갑한 유피테르의 갖가지 모습을 짜넣었다. 뉘테우스의 아름다운 딸에게 쌍둥이를 끼치고 있는 사튀로스, 티륀스 왕의 왕비를 사랑하는 암피트뤼온, 청동탑 속으로 들어가 다나에를 사랑한는 황금 소나기, 아소포스의 딸을 취하는 불꽃, 므네모쉬네를 사랑하는 양치기, 데오의 딸 포로세르치나와 사랑을 나누는 얼룩뱀.... 이 모두가 둔갑한 유피테르인 것이었다. 아라크네는, 황소로 둔갑하여 아이올로스의 딸을 범하는 넵투누스의 모습도 그림으로 짜넣었다. 넵투누스가 강의 신 에니페우스로 둔갑하여 알로에오스의 아내를 취하고 쌍둥이 아들을 끼치는 장면, 숫양으로 둔갑하여 비살티스를 감쪽같이 속이는 장면도 짜 넣었다. 오곡의 어머니 포에부스의 이야기도 있었다. 포에부스가 농부로 둔갑하는 대목도 있고, 매의 깃털로 온몸을 가린 대목, 사자로 둔갑하는 대목도 있었다. 목동으로 둔갑하여 마칼우스의 딸 이세를 희롱하는 대목도 있었다. 포도송이로 둔갑하여 에리고네를 취하는 리베르, 말로 둔갑하여 반인반마인 켄타우로스 케이론을 끼치는 사투르누스도 있었다. 베폭 가장자리의 좁으장한 테두리에는 담쟁이덩쿨과 꽃이 뒤엉킨 그림이 들어가 있었다.
베짜기의 여신인 팔라스 자신은 물론, 잘된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리볼 조차도 흠잡을 수 없은 참 완벽한 솜씨였다. 겨루기 상대의 솜씨가 인간의 도를 넘은 데 격분한 이 금발의 여신은, 신들의 비행을 낱낱이 폭로한 이 베폭을 찢어버리고는, 들고 있던 퀴토로스 산 회양나무 북으로 아라크네의 이마를 서너 번 때렸다. 아라크네는 그제서야 여신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얻은 줄을 알고는 들보에 목을 매였다. 여신은, 제 손으로 들보에 목을 맨 이라크네를 가엾게 보고 그 끈을 늦추어주면서 이렇게 일렀다. ’이 사악한 것아, 네가 누구 마음대로 네 목숨을 끊으려 하느냐? 목숨을 보존하라. 보존하되 늘 이렇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 이것을 벌은 벌이나 겁벌이어서 끝이 없을 것인즉, 네 일족, 네 후속들까지 이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말 끝에 여신은 헤카데(마법, 요술에 능한 여신)의 약초즙을 한 방울 이 아라크네의 몸에 뿌렸다. 이 독초즙이 묻자 아라크네의 머리에서는 머리카락이 빠지면서 코와 귀가 없어졌다. 머리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만큼 줄어들었다. 이와 함께 몸통도 아주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갸름하던 손가락은 양 옆으로 길어져 다리가 되었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 배가 되었다. 아라크네는 꽁무니로 실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이때 거미가 된 아라크네(거미)는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실을 내어 공중에다 걸고는 거미에 매달려 산다.
4.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Book 6 : Tereus, Procne, and philomela)
Tereus Confronted With the Head of His Son, by Peter Paul Rubens
이웃나라의 왕들은 이 펠레프스를 위로하러 테바이로 모여들었다. 도시국가 시민들이 왕들에게 테바이로 가서 펠로프스를 위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기때문이다. 아르고스, 스파르타, 펠로프스의 고향 땅인 뮈케나이, 당시에는 디아나 여신으로부터 분노를 사지 않았던 칼뤼돈(62), 비옥한 오르코메노스, 구리가 많이 나는 것으로 이름높은 코린토스, 사람들이 용맹스럽기로 소문난 메세나, 파트라이, 크게는 국력을 떨치지 못하고 있던 클레오나이, 넬레우스가 지배하고 있던 퓔로스, 피테우스의 치하에 들기 전의 트로이젠, 바다를 낀 코린토스 지협양쪽의 여러 도시국가들...... 이 모든 나라에서 왕들이 펠레프스를 위로하러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믿어지지 않겠지만 아테나이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당시 아테나이는 전쟁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바다를 건너온 야만족들이 성을 에워싸고 백성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라카이 사람 테레우스는 원군으로 아테나이로 달려가 이 야만족을 물리치고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아테나이 왕 판디온은, 테레우스가 군사적으로 막강하고 재물이 많은데다가 저 위대한 그라보스의 후손인 것을 마음에 두고 그와 끈을 맺어두기 위해 딸 프로크네를 주어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식에는, 가정의 여신인 유노도, 결혼의 신인 휘메나이오스도, 그라티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 대신 저 무서운 에우메니데스가 화장하는 데서 옮겨붙인 횃불을 들고 찾아왔다. 첫날밤의 잠자리를 꾸민 것도 이 복수의 여신들이었다. 복수의 여신들이 나다니자 올빼미도 한 마리 신방이 있는 집 지붕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러한 흉조는 프로크네와 테레우스가 결혼할 때도 나타났지만, 이들 사이에서 첫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나타났다. 트라키아 백성들은, 이들의 앞날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왕과 왕비가 맞은 경사를 축복했고, 왕과 왕비는 자기네 일족과 왕국에 내린 은총을 신들에게 감사했다. 테레우스는, 자신과 저 판디온의 딸 프로크네가 결혼한 날을 축제일로 선포한 데 이어 아들 이튀스가 태어난 날도 명절로 삼았다. 하기야 인간이 무슨 수로 한치 앞을 볼 수 있으랴! 세월이 흘러 가을이 다섯 번 지나간 어느 날 프로크네가 어리광을 부리느라고 지아비 테레우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를 사랑하신다면 사람을 보내어 제 친정 동생을 이리 오게 하든가 전하께서 좀 데려다주세요. 제 아버지께는, 곧 돌려보내겠다고 하시고요. 필로멜라를 만나게 해주신다면 저에게 이보다 나은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테레우스는 곧 배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그러고는 날을 잡아 트라키아를 떠나 돛과 노의 힘을 두루 빌려 케크롭스의 땅에 이르러 피라에오스에 상륙했다. 장인 판디온과 사위 테레우스는 만나자마자 얼싸안고 그간의 긴 회포를 풀었다. 텔레우스는 자기가 아테나이에 온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청을 받고 처제를 데리러 온 것인 만큼 함께가게 해주면 오래지 않아 돌려보내 주겠노라고 말했다. 장인과 사위가 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마침 필로멜라가 들어왔다. 필로멜라는 아름다운 옷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나 바탕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오히려 이 성장이 무색했다. 필로멜라의 용모는, 물의 요정 나이아데스나 깊은 숲 속에 사는 드뤼아데스를 묘사하는 데 어울리는 말로써나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이들이 필로멜라를 보는 순간 테레우스의 가슴속에서는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불길은, 마른 옥수수 대궁이 아니면 건초 창고를 태우는 불길만큼이나 빠른속도로 테레우스의 가슴속을 번져갔다. 필로멜라의 아름다움이라면 능히 그럴 만했다. 그러나 테레우스는 제 성격 탓에, 그럴 만한 정도 이상으로 애를 태웠다. 원래 트라키아 사람들은 지극히 감정적이기 때문이었다. 이 민족성과 테레우스 자신의 성격 때문에 이 불길은 삽시간에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테레우스는, 자기 왕국을 털어서라도 필로멜라를 옹위하는 시녀들에게 뇌물을 주고, 필로멜라를 기른 유모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필로멜라 자신에게도 귀한 선물을 안기고 싶다는 충동, 필로멜라를 납치하여 멀리 데려다놓고는 이 아름다운 볼모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 고삐 풀린 충동에 따른다면 테레우스에게는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의 가슴은 안에서 번지며 타오르는 불길을 이기지 못했다. 그에게, 장인의 궁전에 더 머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시 바삐 아내 프로크네가 바라던 대로 필로멜라를 데리고 떠나 자기 속마음을 고백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사랑에 신들린 그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그는, 필로멜라를 데려가게 해달라는 자신의 요구가 무리라면, 그 책임은 바로 그 일을 맡긴 프로크네에게 있다고 강변했다. 그는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자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기까지 했다. 마치 프로크네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기라도 한 듯이....오, 신들이시여, 이렇게 눈이 먼 인간들을 굽어살피소서. 테레우스가 검은 마음을 품고 이렇듯이 고집을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아테나이 백성들은 그를 참으로 보기드문 애처가라고 칭송했다. 결국 그들은 악행할 음모를 꾸미는 테레우스를 칭송하고 있는 셈이었다. 심지어는 필로멜라조차 그의 애절한 소망을 편들었다. 필로멜라는 두 팔로 아버지의 목을 안고 형부를 따라가 언니를 만나게 해 달라고 응석을 부렸다. 아버지는 딸이 좋아한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어했다. 그러나 형부를 따라가라는 말 한마디가 딸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가 알리 없었다. 테레우스는, 아버지를 조르는 필로멜라를 보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이 공주를 품에 안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필로멜라는 아버지의 목을 안은 채로 아버지의 뺨에 입을 맞추었는데, 바로 이 광경이 테레우스의 불붙은 욕망에 끼얹는 기름이자 던지는 섶이었다. 딸이 아버지 판디온을 껴안는 것을 보는 순간, 테레우스는 자신이 판디온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속을 끓였다. 하기야 필로멜라의 아버지였더라도 테레우스의 의도가 불순하기는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마침내 아버지 판디온은 두 딸, 그러니까 동생을 보고 싶다는 큰딸 프로크네와 언나를 보고 싶다는 작은딸 필로멜라의 간절한 소망 앞에서 굴복했다. 필로멜라는 기뻐 날뛰면서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이 가엾은 필로멜라는 아버지가 승낙함으로써 자신과 언니 프로크네는 승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둘 다 파멸하게 되는 줄도 모르고....포에부스가 갈 길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천마들은 저녁으로 통하는 비탈길을 숨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왕실에는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 황금 술잔은 포도주로 그득그득했다. 이 잔치가 끝나자 손님들 모두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그러나 트라키아의 왕 테레우스는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공주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잠이 올 턱이 없었다. 테레우스는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몸짓을 그리며, 자기가 보지 못한 것,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필경은 자기 차지가 될 것들을 상상했다. 요컨대 그의 욕정은, 잠을 이루기에는 너무 뜨거웠다. 새벽이 오자 테레우스는 귀국을 서둘렀다. 판디온 왕은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데려가는 딸을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한 다음 이런 말을 덧붙여 했다. “여보게, 자네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보니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네. 그래서 자네 소망에 따라 이 딸마저 자네를 딸려 보내네. 테레우스, 이제 나는 두 딸을 자네에게 맡기고 말았네. 내, 자네의 명예에 기대고, 하늘에 계신 신들을 증인 삼고, 우리를 이렇게 하나 되게 한 장인과 사위라는 관계를 믿고 부탁하네만, 이 아비를 대신해서 이 아이를 잘 돌보아주고, 되도록이면 하루라도 빨리 내게로 보내어주게. 나는 이 아이를 내 만년의 낙으로 사네. 때가 오면 이 아이마저 떠나보내야 하겠지만....그리고 너 필로멜라, 네가 이 아비를 사랑하거든 되도록이면 하루 속히 돌아오너라. 네 언니가 친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은 이미 넉넉하게 아프다. 그러니 네가 이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 속히 돌아오도록 하여라” 이 말 끝에 판디온 왕은 소리없이 울면서 이 딸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딸과 작별인사를 나눈 왕은 테레우스와 필로멜라의 손을 잡고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하게 한 다음 이 둘의 손을 잡게 하고는, 멀리 떠나있는 딸과 외손자에게 안부를 따뜻이 전하라고 당부했다. 목이 메었던지 판디온 왕은 더 이상은 말을 못했다. 그의 마음에는, 근심과 걱정과,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였을 텐데도....이윽고 필로멜라가 배에 올랐다. 바다가 나라의 노 끝에서 뒤로 밀려남에 따라 육지도 멀어지기 시작하자 미개한 나라의 왕 테레우스는 외쳤다. “내가 이겼다. 나는 드디어 그렇게 손에 넣기를 바라던 공주와 한배에 올랐다.” 승리에 도취된 테레우스는 그토록 기다리던 그 사랑의 순간을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었던지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자신의 전리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모습은 발톱으로 메토끼를 채어 제 둥지에다 내려놓고, 오갈데 없는 이 희생물을 탐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약탈자인 독수리와 흡사했다. 이윽고 긴 항해를 끝마친 테레우스는 제 나라 해변에다, 이 긴 여행에 지친 배를 대었다. 테레우스 왕은 판디온의 딸 필로멜라를 끌고, 태고의 숲 속에 숨겨져 있는, 담이 높은 오막살이에로 데려가 거기에 가두어버렸다. 필로멜라는, 무섭지 않은 것이 없는 판이라 당연한 일이겠지만, 창백한 낯색을 하고 바들바들 떨면서 언니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테레우스는 프로크네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는 대신, 자신의 검은 마음을 고백하고는, 아무도 돕는 이 없는 이 불쌍한 처녀를 힘으로 차지했다. 필로멜라는, 아버지를 부르면서, 언니를 부르면서, 하늘에 계신 신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도와줄 것을 빌었으나 하릴없었다. 필로멜라는 내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잿빛 이리의 이빨에 뜯기고 쫓기면서도 숨을 곳을 찾지 못해 떨고 있는 어린양, 아니면 제 피에 젖은 제 몸을 억센 독수리의 억센 발톱에 붙잡힌 채 떨고있는 비둘기같이.....제정신이 돌아오자 필로멜라는 초상난 집에서 애곡하는 여자처럼 헝클어진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제 팔을 할퀴고, 제 가슴을 치며 몸부림쳤다. 그러다 두팔을 벌리고 외쳤다. “이 정떨어지는 야만인, 이 무정한 약탈자야! 나를 보내면서 눈물로 당부하던 내 아버지를 보고도 마음에 남은 것이 없더냐? 내 언니의 근심 걱정, 내 때묻지 않은 젊음, 네가 했던 혼인에 생각이 미치지 않더냐? 너는 인간의 도리를 짓밟았다. 이로써 나는 내 언니의 원수가 되었고, 너는 우리 자매의 지아비가 되었으며 내 언니 프로크네는 내 원수가 되었다. 이 배신자야, 이런 죄를 지으려 했으면 왜 나를 죽여놓고 짓지 못했느냐. 그랬더라면 좋았을 것을....그랬더라면 나를 더러운 공모자로 만들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을......그랬더라면 내 혼백만은 순결을 잃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그러나 하늘에 계신 신들께서 이 광경을 보셨다면, 신들에게 놀라운 권능이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이 지경이 되었다만 신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온전하다면 너는 언젠가 이 죄값을 물어야 할 게다. 나 역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람들에게 네가 한 일을 낱낱이 고하리라. 내가 이 숲에 갇혀 있어야 할 팔자라면 나는 이 숲을 소리로 가득차게 하여, 내가 턱없이 당하는 것을 목격했을 터인 저 바위까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리라. 하늘이 이 소리를 들을 것이다. 하늘에 신들이 계신다면 신들이 이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 말이 이 폭군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그런 그에게 두려운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분노와 만용의 노예가 된 테레우스는, 한 손으로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필로멜라의 머리채와 두 손을 뒤로 모두어 쥐고 있는 힘을 다해 아래로 내리눌렀다. 칼을 본 필로멜라는, 죽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던지 그에게 목을 들이대고는 그를 조롱하고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자 테레우스는 손가락으로 필로멜라의 혀를 잡고는 칼로 사정없이 잘라버렸다. 남은 혀뿌리는 여전히 필로멜라의 입 안에서 부르르 떨었고, 잘려진 혀는 검은 대지 위를 뛰어다니면서 못다 한 말을 마저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잘려진 혀는 갓 잘린 뱀 꼬리처럼 오그라들면서 주인의 발아래서 죽어갔다. 필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이 잔인한 테레우스는, 이렇게 못할 짓을 해놓고도 만신창이가 된 이 필로멜라를 끌어안고 몇 번이나 그 죄많은 정욕을 채웠다는 소문이 있다. 이런 짓을 해놓고 테레우스는 염치좋게도 아내 프로크네에게로 되돌아갔다. 왕을 본 왕비 프로크네는 동생은 어떻게 하고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테레우스는 이야기를 꾸며, 아내에게 그럴듯하게 둘러대었다. 즉 슬픔에 잠긴 목소리, 비탄에 잠긴 얼굴로 필로멜라가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꾸민 목소리, 만든 얼굴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듣던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프로크네는, 금실로 가장자리를 한 옷을 어깨에서부터 단숨에 찢어버리고는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주검 없는 무덤을 만들게 하고는 있지도 않은 필로멜라의 혼백에 제물을 바쳤다. 프로크네는 이렇게 하고 동생의 기구한 팔자를 애곡했다. 그러나 프로크네가 정말 애곡했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태양신이 태양수레를 하늘의 12궁 사이로 두루 몰고 지나가자 1년이 갔다. 독자들은, 필로멜라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필로멜라는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다 단단한 돌로 쌓아올린 담은 여자가 깨뜨리기에는 너무 튼튼했다. 게다가 필로멜라는 혀를 잘려 벙어리가 되었는지라 자기가 당한 일을 누구에게 발설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은 사람을 강하게 하고 역경과 곤경은 사람을 창조적이게 하는 법이다. 필로멜라는 베틀 같지도 않은 베틀에다 실을 걸고는 흰 바탕으로 베를 짜면서 거기에다, 자기가 그런 고통을 받게 된 사연을 붉은 글씨로 짜넣었다. 이 일이 끝나자 필로멜라는 이것을 몸종에게 주면서 손짓발짓으로, 그 나라 왕비에게 전하게 했다. 몸종은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필로멜라가 부탁하는 대로 이것을 프로크네에게 전했다. 폭군의 아내는 그 천을 펴보고 나서야 사연을 알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불행을 알리는 사연이었다. 프로크네는 쓰다달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프로크네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연은, 한마디 말로 그 반응을 나타내기에는 지나치게 슬픈 사연이기 때문이었다. 말을 하고 싶어도 응분의 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슬픈 사연이었다. 프로크네에게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프로크네는, 복수할 계획을 세우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이 복수 계획은, 선악의 잣대를 깡그리 벗어난, 참으로 상궤를 멀리 벗어난 것이었다. 트라키아의 젊은 여자들이 박쿠스를 기려 3년마다 한 번씩 여는 엄숙한 축제기간이었다. 이들이 베푸는 의식은 밤에 시작되는데 이 의식이 시작되면 로도페산은 신도들이 지르는 고함소리와 바라소리로 찌렁찌렁 울린다. 밤이 되자 왕비 프로크네도 이 신을 경배하는 데 필요한 제구를 모두 갖추고 집을 나섰다. 머리에 쓰는 포도덩굴 관, 왼쪽 어깨에 드리우는 사슴 털가죽, 오른쪽 어깨에 둘러메는 짧은 창, 이러한 것들이 박쿠스 신을 경배하는 제사에 필요한 제구이자 무기였다. 프로크네는 몸종들을 거느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가슴은 갖가지 생각으로 착잡했다. 프로크네는, 박쿠스 신의 광란에 쫓기는 신도로 가장하고 있었으나 사실 프로크네가 쫓는 것은 슬픔 뒤에 오는 분노였다. 이윽고 프로크네는, 동생이 갇혀 사는 오두막에 이르렀다. 오두막 문은, 박쿠스 신도 특유의 외마디소리와 광란의 몸짓과 함께 부서져나갔다. 프로크네는 동생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다가 박쿠스 신도들 의상을 동생에게 입히고는 머리에 담쟁이덩굴 관을 씌워 얼굴을 가려 왕궁으로 데려왔다. 필로멜라는, 자신이 그 저주받을 자의 집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낯빛을 잃고 부들부들 떨었다. 프로네크는 동생의 머리에서 박쿠스 신도의 관을, 몸에서는 박쿠스 신도의 옷을 벗겼다. 프로크네는 동생을 껴안았으나 필로멜라는 얼굴을 들고 언니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지 못했다. 자기 때문에 언니가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로멜라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필로멜라는 이로써, 말로써 전하는 것 이상으로 명백하게 자신의 뜻을 언니에게 전하고 있었다. 필로멜라는, 하늘에 계신 신들에 맹세코, 테레우스의 폭력에 저항할 힘이없어 순결을 잃게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프로크네는 흐느끼는 필로멜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칼을 갈아야 할 때다. 아니, 칼보다 나은 무기가 있다면 그것을 벼려야 할 때다. 필로멜라, 내게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왕궁을 불바다로 만들고 테레우스를 그 불길 속에 던져 넣으면 네 분이 가라앉겠느냐, 이 자의 혀를 자르고 눈알을 뽑고, 너에게 범죄한 사지를 잘라 육신으로부터 죄많은 영혼을 풀어내면 네 분이 풀리겠느냐. 시시한 복수는 안 된다.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방도를 모르겠구나”
프로크네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아들 이튀스가 제 어머니 방으로 들어왔다.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프로크네의 머리 속에는 한가지 방도가 떠올랐다. 매정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면서 프로크네가 내뱉었다.
“어쩌면 제 아비와 이렇듯이 똑같이 생겼느냐?”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프로크네는 속으로 분을 감춘 채 복수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어미의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들이 가까이 다가와 그 가녀린 팔로 어머니의 목을 안고 뺨에다 입을 맞출 때는 프로크네의 마음도 흔들렸다. 프로크네는 마음의 고삐가 풀려가고 있는 데 당혹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을 하는데도 프로크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복수의 결심을 어지럽히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 프로크네는 시선을 이 아들에게서 동생 쪽으로 옮겼다.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프로크네는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어째서 하나는 나에게 사랑의 말로 응석을 부리는데, 하나는 혀가 없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이튀스는 나를 어미라고 부르는데 어째서 필로멜라는 나를 언니라고 부르지 못하는가. 아, 이 어리석은 판디온의 딸아, 네가 누구와 혼인하였느냐? 너에게는 판디온의 딸이라고 할 자격도 없다. 테레우스 같은 자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프로크네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강게스 강둑에 사는 호랑이가 새끼사슴을 깊은 숲 속으로 끌고 가듯이 아들 이튀스를 왕궁에 있는 한적한 밀실로 데리고 갔다. 아이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닥치고 있음을 예감했는지 두 손을 내밀고 두 번이나, “어머니, 어머니”하고 부르면서 프로크네의 목을 껴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프로크네는 칼을 꺼내어 아들의 옆구리를 찌르고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치명상이었으나 프로크네는 거기에서 손길을 멈추지 않고 다시 칼로 아들의 목을 도려버렸다. 이 이튀스의 몸이 산 사람의 몸과 다름없이 온기를 간직하고 있느데도 자매는 이 아이의 사지를 몸에서 발라내었다. 방바닥은 이 아이의 피로 바다가 되었다. 자매는 이 사지의 살을 요리하되 일부는 청동솥에 넣어 삶고 일부는 구웠다. 프로크네는 준비가 끝나자 아무것도 모르는 테레우스를 특별한 음식을 대접하겠다면서 불렀다. 부르면서, 친정 나라의 풍습인 신성한 의식이라는 토를 달고 반드시 혼자 와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프로크네는 이로써 경호병이나 시종이 왕을 따라다니지 못하게 한 것이다. 테레우스는, 신성한 의식이라는 말에 조상 전례의 예복으로 치장하고 왕비의 초대에 응하여 앞에 놓인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물론 제 살인 줄도 모르고 맛나게 먹었다. 무슨 고기인지도 모르고 한참을 먹던 그가 말했다. “이튀스를 이리 불러오오” 프로그네는 더 이상, 감격의 순간을 유예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프로크네는, 자기의 입으로 이 복수가 성취되는 순간을 선언하고 싶은 마음에서 지아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찾는 아이는 여기에 있소. 바로 그대 뱃속에 있소” 테레우스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튀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는 다시 이튀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튀스 대신, 조금 전에 죽은 이 아이의 피로 피투성이가 된 필로멜라가 피 묻은 머리카락을 산발한 채 이튀스의 머리를 들고 나타났다. 필로멜라가 테레우스에게 내미는 이튀스이 머리에는 피가 뚝뚝 들었다. 필로멜라는, 자기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겼을까?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 이 순간에 어울리는 말을 적절하게는 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대노한 테레우스는 식탁을 걷어차고, 스튁스 나라에 사는, 배암 머리카락의 자매 이름을 불렀다. 테레우스가 만일 복수의 여신들을 부를 수 있었다면, 저 자신의 가슴을 찢고, 제 손으로 발라먹은 인간의 살, 제 자식의 살도 토해 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테레우스는 이제는 자식의 무덤이 되어버린 제 육신을 저주하면서 울부짖었다, 그러던 그는 칼을 뽑아들고 판디온의 두 딸을 뒤쫓았다. 판디온의 두 딸은, 도망치다 말고 문득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같은 숲으로 날아들어갔고 또 하나는 지붕 밑으로 날아들어갔다. 지붕 밑으로 날아들어간 새의 가슴에는 살인한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채 진홍빛 핏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슬픔에 잠긴 채 복수를 서둘던 테레우스 왕도 새가 되었다. 머리에는 깃털로 된 긴 볏이 돋고, 부리가 칼날만큼이나 긴 새가 된 것이다. 금방이라도 싸우려는 것처럼 무장하고 있는 듯한 이 새를 사람들은 <후투티>라고 부른다.
(자료: 이윤기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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