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너와 그것(I-Thou, I-It)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이름으로 살아가는 날보다 역할로 살아가는 날이 더 많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름을 묻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디에 속해 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먼저 묻는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직함이 된다.
목사.
의사.
사장.
환자.
은퇴자.
아이러니하게도 이름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점점 역할 속으로 사라진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나와 그것(I-It)'.
그리고 '나와 너(I-Thou)'.
'그것'은 대상이다.
필요하면 가까이 두고, 필요가 끝나면 돌아선다.
측정하고, 평가하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너'는 다르다.
'너'는 설명보다 먼저 만나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부버는 말했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그 문장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서도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고객을 만나고, 환자를 만나고, 교인을 만나고, 목사를 만나고, 유권자를 만난다.
그러나 이름을 만난 적은 얼마나 있었던가.
김춘수는 「꽃」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다.
한 사람을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로 맞아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이름은 호칭이 아니라 관계이다.
성경은 놀랍도록 조용한 방식으로 이 진실을 들려준다.
하나님은 사람을 역할로 부르지 않으셨다.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야." 하셨고, 성전에서 잠든 소년에게 "사무엘아." 하셨으며, 무덤 곁에서 울던 여인에게 "마리아야." 하셨다.
그 한마디에 길을 잃었던 사람은 자신을 다시 찾았다.
부르심은 사명보다 먼저 존재를 일깨웠다.
하나님은 일을 맡기기 전에 사람을 만나셨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순서를 바꾼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 같고, 더 많이 헌신해야 사랑받을 것 같고, 더 큰 사명을 감당해야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거꾸로 시작한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명은 그 다음이었다.
사랑이 먼저였고, 존재가 먼저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역할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살아간다.
직함은 명함과 함께 서랍 속으로 들어가고, 아이들은 부모의 품을 떠나며, 건강도 어느 날 말없이 등을 돌린다.
끝내 우리 손에 남는 것은 이름 하나이다.
아니,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셨던 것도 이름 하나였다.
언젠가 세상의 모든 이름표를 내려놓는 날이 올 것이다.
'목사'라는 이름도,
'아버지'라는 자리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마지막 역할도 조용히 벗겨질 것이다.
그날 하나님은 내 삶의 이력을 펼쳐 보지 않으실 것 같다.
얼마나 이루었는지,
얼마나 남겼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먼저 묻지 않으실 것 같다.
다만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던 내 이름을, 한 번 더 다정하게 부르실 것만 같다.
"응길아.“
2026.6.30.
푸른숲참기쁨교회 원응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