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1부 황하의 영웅 (69-1)
■ 1부 황하의 영웅 (69)
제2권 내일을 향해 달려라
제10장 제족의 선택 (8)
피난처에서 돌아온 정여공은 성안이 폐허가 된 것을 보고 마음이 울적했다.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였다면 이처럼 우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제족(祭足) 탓이다.“
정여공은 제족을 원망하는 마음이 컸다.
그가 제족(祭足)을 제거할 마음을 품게 된 것은 이 무렵부터의 일이었다.
하지만 제족은 이미 군주의 권력을 능가하는 실권을 쥐고 있었다.
조정 대부들 모두가 제족(祭足)의 사람이라고 보아야 했다.
섣불리 손을 썼다가는 오히려 정여공이 당하기 쉽다.
분노를 참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듬해 봄이었다.
주환왕이 죽고 세자 타(陀)가 새 왕에 즉위했다.
그가 주장왕(周莊王)이다.
주환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여공은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기로 했다.
그런데 제족(祭足)이 나서서 말렸다.
"죽은 주환왕은 정장공과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더욱이 지난날 우리나라 장수 축담은 주환왕을 활로 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신을 보내보았자 욕이나 얻어먹고 돌아올 것이 뻔합니다."
정여공은 제족(祭足)의 말에 따르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니었다.
'이놈은 내가 하려는 일은 무엇이든 반대만 하는구나.‘
그는 더욱 제족을 죽일 것을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후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 뒤를 대부 옹규가 따르고 있었다.
산책하던 정여공은 새들이 나무 사이로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뒤따르던 옹규가 이상히 여기고 물었다.
"주공께서는 부족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한숨을 쉬며 우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십니까?“
"과인의 신세가 저 새들만도 못한데, 어찌 기쁨이 있겠는가.“
"혹시 제족(祭足)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정여공은 대답 대신 옹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옹규가 한결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임금은 부모와 같고, 신하는 자식과 같습니다.
자식이 그 아비를 위해 근심하지 않으면 이는 곧 불효이며,
신하가 임금을 위해 힘쓰지 않으면 이는 불충입니다.
만일 주공께서 저를 믿고 상의하신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실행하겠습니다.“
"그대는 제족(祭足)의 사위가 아닌가?“
"신이 제족의 딸과 결혼한 것은 송장공이 시켜서 한 일일 뿐입니다."
옹규의 진심을 알게 된 정여공은 듣는 사람이 있을까 주변을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제족(祭足)을 죽일 수만 있다면 제족의 자리를 그대에게 주겠소.“
"주공께서 원하신다면, 신이 제족을 죽이겠습니다.“
"제족(祭足)은 여우와 같은 자라 머리가 잘 돌아가오.
웬만한 계책으로는 성공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정여공의 염려에 옹규가 자신있게 말했다.
"지난번 송나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성 동쪽마을이 심하게 약탈당했습니다.
주공께서는 제족(祭足)에게 명하시어 그 곳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신이 미리 가서 술자리를 마련한 뒤 술에 독을 타마시게 하여 제족을 죽이겠습니다."
옹규의 계책을 들은 정여공은 뛸 듯이 기뻤다.
"모든 것을 그대에게 맡기겠소."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옹규는 아내 옹희(雍姬)를 보는 순간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눈을 정면으로 맞출 수가 없었다.
옹희는 아버지 제족을 닮아 눈치가 빠른 여인이었다.
남편의 기색이 여느때와 다른 것을 알았다.
"오늘 궁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소.“
옹희(雍姬)는 남편의 표정이 더욱 심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부부는 한 몸이나 다름없습니다.
일이 크건 작건 간에 아내가 알 것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옹규가 마지못해 우물쭈물 대답했다.
"이번에 장인께서 동쪽 교외로 나가 백성들을 위로하기로 했소.
그외에 별다른 일은 없었소."
그러나 옹희(雍姬)는 어딘지 의심스러웠다.
그 날 밤 옹희는 술상을 차려놓고 남편 옹규에게 술을 권했다.
옹규는 장인 제족(祭足)을 죽일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불안했다.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권하는 술을 모두 받아 마셨다.
마침내 크게 취하여 곯아 떨어졌다.
옹희(雍姬)는 정신 없이 자고 있는 남편을 내려다보다가 남자 목소리를 흉내내어 물었다.
"자네는 오늘 낮에 무슨 일을 꾸몄는가?“
술에 취한 옹규는 생시인지도 구별하지 못하고 웅얼웅얼 대답했다.
"주공을 위해 제족(祭足)을 없애기로 했다네.“
옹희는 기절할 듯 놀랐다.
이튿날 아침,
옹규가 일어나자 옹희(雍姬)는 남편을 다그쳤다.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죽일 작정이지요?“
"말도 되지 않는 소리!
어찌 내가 그런 일을 꾸밀 수 있단 말이오?“
"어젯밤 취해 주무시면서 잠꼬대하는 소리를 들었단 말이예요.
그러니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옹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뭇 목소리가 엄해졌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부인은 어떻게 하시겠소?“
"지어미는 지아비만을 좇을 뿐입니다.
다른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아내의 말에 옹규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옹규는 어제 궁중 후원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들려 주었다.
옹희(雍姬)는 남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걱정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우리 친정 아버지는 궁중 외에 바깥 출입을 잘 하시지 않습니다.
동쪽마을로 나가실지 어떨지 걱정이 됩니다.
제가 먼저 친정집에 들러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를 동쪽 마을로 나가시도록 해보겠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이번 일이 성공하면 나는 그대 아버지의 벼슬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으니,
당신 또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오."
옹희(雍姬)는 그 즉시 친정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를 보자마자 소매를 잡아 끌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물었다.
"친정아버지와 남편 중 어느 쪽이 더 소중합니까?“
"그야 둘 다 소중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아니고... 두 사람 중 하나를 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어머니는 딸이 농담을 하는 줄 알고 웃으며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남편보다는 아버지가 더 소중할 것 같구나.“
옹희(雍姬)의 표정이 변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여자는 시집을 가기 전에는 남편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가 없이는 세상에 나올 수 없다.
또 여자는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남편이 죽으면 다시 시집갈 수 있으나,
아버지는 죽으면 다시 얻을 수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 남편보다는 아버지가 소중하지 않겠느냐?"
어머니는 딸 내외가 잘 살고 있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옹희(雍姬)는 남편을 죽이느냐, 아버지를 죽이느냐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대답을 듣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저는 이제 아버지를 위해서 남편을 버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옹규가 꾸미고 있는 음모를 다 털어놓았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딸의 말에 어머니는 기절초풍했다.
남편인 제족의 방으로 달려가 딸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제족(祭足)은 말을 끝까지 들은 후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다."
다음날이었다.
제족(祭足)은 정여공의 분부에 따라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밖 동쪽 교외로 나갔다.
물론 그 전에 공자 강서를 시켜 비수를 품에 감춘 심복 부하 10여명을 잔칫상 주변에 숨겨놓았다.
공자 알(閼)에게도 무장 병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마을 주변에 숨어 있게 했다.
이윽고 제족(祭足)이 마을에 도착했다.
옹규가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앞으로 나와 잔에 술을 가득 따라 건네며 말한다.
"먼저 술 한잔을 받으시고 백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해주십시오.“
"고맙네“
제족(祭足)은 손을 내밀어 잔을 받는 체하다가 갑자기 옹규의 손목을 움켜 잡았다.
동시에 술잔을 빼앗아 연못 속에 던졌다.
잠시 후 연못 속의 고기들이 배를 하얗게 뒤집으려 떠올랐다.
제족이 주변을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누가 나를 위하여 이 불측한 놈을 끌어내지 않겠는가?“
호령 소리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