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썼다, 한 잔 해라- 금주일지 239(2023.5.10.)
참, 허망한 날이다.
내 형제 중 맨 맏이인 큰형님의 발인이 진행되었다. 83세이시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피를 나눈 형제 중 큰형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신 것이다.
지는 달은 다시 뜨겠지만 망월동 흙 속에 몸을 부린 형님은 다시 모습을 드러낼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큰형님의 자녀들을 통해 아니 내 삶을 통해 스며있는 흔적들을 가끔씩 더듬게 되리라.
3일 동안의 장례를 치르면서 유난히 풀이 죽어있는 큰조카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 고애자가 됨을 실감하고 있겠지.
이미 50이 훨씬 넘은 조카이지만 아버지의 부재가 문득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으니 큰 산이 무너지는 듯하겠지.
끝내 ‘스스로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 하며 애써 외면하려 해도 자꾸 눈에 밟힌다.
망월동에서의 장례 절차를 마치고 오후에 집에 돌아왔으나 큰조카가 염려가 되었다.
아버지가 없는 방에 혼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찍어서 보낸 장례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아버지를 그리고 있을까?
전화를 했다.
통화가 되었다.
“집에 와서 술 한 잔 할래?”
“그래, 좋아요. 그런데 집에서 말고 밖에서 한 잔 하시죠?”
“왜? 집으로 오지 그러냐?”
“작은어머니 힘드시니까 그냥 밖에서 뵙죠?”
“그러자. 네가 편한 대로 하자.”
이윽고 우리 동네의 술집에서 마주하였다.
풀 죽은 조카에게 술잔을 건네며
“오늘은 딴 생각 말고 그냥 한 잔 해라. 네 아버지도 너를 두고 ‘네가 애썼다’고 칭찬하실 것이다“
”네, 작은아버지. 감사해요. 잠도 안 올 것 같고, 어디 대고 울 수도 없고, 허전하고 맘 둘 곳 없었는데 이렇게 불러주시고 위로해 주셔서 감사해요“
”나도 같이 한 잔 해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금주 중임을 이해해라. 대신 작은엄마랑 한 잔 해라.“
”네, 감사해요. 아부지가 너무 고생하시다 가셔서 불쌍해요. 제가 한다고 했는데 아부지 맘에 얼마나 흡족했는가 모르겠어요. 엄니도 너무 불쌍하고요.“
”아니다. 네 아버지는 너로 인하여 말년에 늘 흐뭇해하셨다. 너야말로 고생했다. 그리고 지금 네 어머니 또한 너로 인하여 편하게 지내고 계시잖니. 다 네가 수고한 덕이다.“
”사실 전 지금까지 일밖에 한 것이 없어요. 부모 모시고 형제를 돌보고 처자식을 위해 정말 열심히 죽어라고 일했어요.“
”알지. 알아. 너 얼마나 고생했냐!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힘껏 일한 덕에 오늘날 이만큼 안정되게 자리 잡고 살 수 있게 된 것 아니겠냐? 참, 많이 애썼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많이 흘렀고, 조카는 술기운이 입가에서 묻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갈게요.” 하며 일어서는데 다리에도 술이 한잔 들어간 모양이다. 휘청이는 것이.
그 와중에도 빵집에 들어가 작은 케이크 하나를 들고나와
“작은어머니, 이거!” 하며 내민다.
고마운 마음이 일렁인다.
대리기사는 손님이 많은 까닭인지 돈이 부족한 것인지 감감무소식이다.
조카가 돈을 올려서 부른 모양인데도 한참을 더 기다리게 한다.
이윽고 대리기사가 왔다. 대리비를 건네니 조카가 극구 사양한다.
“작은아버지의 마음이니 그냥 타고 가서 도착하면 문자하여라.”
“네, 감사해요, 감사해요.”
“조심하여라. 애썼다”
첫댓글 장조카를 위하는 애틋한 마음에 숙연해집니다.
든든한 작은아버지를 둔 조카는 씩씩하게 이겨낼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