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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유하는 공간의 심리학’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의 내용은, 공간을 지각하는 인간의 감각을 분석하여 그 결과를 치료의 수단으로 삼고자 한 것이라 이해된다. ‘치유의 공간’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힐링 스페이스>라는 제목도 책의 성격에 잘 들어맞는다고 여겨진다.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공간과 건축이 주는 치유의 효과에 주목한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러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이 책은 뇌과학의 측면에서 공간을 지각하는 인간의 감각에 대해서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겪은 다양한 임상 사례와 그것을 뇌과학적으로 분석한 내용이 곁들여져, 치유 효과에 대한 이론적인 측면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처럼 공간, 구체적으로 건축과 의학적 치유 효과를 연결시켜 연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한 관심이 결국 ‘신경건축학’이란 학문 분야를 파생시켰는데, 이는 ‘공간과 건축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끼치는 영향을 측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건축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즉 심리학과 건축학을 결합시켜 환자의 치료, 혹은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활용하는 분야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공간의 배치가 환자의 치료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것을 뇌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모두 3부로 구성된 목차를 보면, 우선 1부에서는 인간의 감각이 지닌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2부에서는 공간이 빚어내는 효과의 의미, 마지막 3부에서는 특정한 공간이 많은 사람들에게 ‘힐링 스페이스’로 여겨지는 까닭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자신의 어릴 적 부모들과의 일화를 예시로 제시하면서, 공간과 감각이 인간에게 주는 효과가 적지 않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공간을 찾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치유의 공간의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의 감정과 기억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뇌와 마음속’을 연결하여 해석하는 ‘뇌과학적 방법’을 원용하여, 치유의 효과에 주목한 것이다.
‘치유가 시작되는 곳, 당신의 머릿속’이라는 제목의 1부는 주로 인간의 다양한 감각과 그것이 작동하는 기제 등에 관해 뇌과학을 원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과 촉각 등의 감각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단순한 감성적 설명이 아닌 뇌과학의 분석을 통해 이론적으로 의학적 치유의 효과를 강조하고 있다. 2부는 ‘공간과 기억이 빚어내는 마술’이라는 제목으로, 미로와 디즈니랜드의 공간이 지닌 특징과 그것이 인간에게 주는 감각적 의미 등을 짚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뇌과학의 분석 결과로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쉽게 길을 찾을 수 없는 미로는 인간에게 적절한 스트레스를 주어 건강에 오히려 긍정적인 측면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스트레스 없이 살기’를 꿈꾸고 있지만, 적절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적절한 긴장을 제공해주어, 때로는 일의 효율을 높이고 생활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환상적인 공간 배치가 특징인 디즈니랜드를 예로 들어, 그 공간 배치가 주는 의미를 ‘길찾기의 신경과학’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저자는 이처럼 공간과 감각 그리고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 등을 자신의 경험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그것을 다시 뇌과학적 분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마지막 3부는 ‘힐링 스페이스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성모마리아의 기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루르드 마을’이 사람들에게 치유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까닭을 분석적으로 설명한다. 특히 이러한 공간이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안겨주는 것을 위약효과(플라시보 효과)와 연결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특히 환자들에게는 ‘위약효과’가 치료의 측면에서는 상당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역시 다양한 임상 사례를 통해, 뇌과학적인 분석 결과를 함께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공간이 주는 의미가 적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시키고 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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