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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20명의 여성 영화인들을 인터뷰를 통해서, 한국영화사에서 여성들의 역할과 의미를 되새기는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의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기획으로, 그동안 남성 위주로 전개되던 영화계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정립하는 과정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주말마다 대여점에서 빌린 비디오테이프를 쌓아놓고 영화를 즐기던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다. 인터뷰 대상자들이 언급한 작품들과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들이 나에게는 충분히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성들이 영화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책의 목차는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소외의 벽을 넘어 눈부신 성취로'라는 제목으로 1990년대 활동했던 6명의 여성 영화인들의 인터뷰를 싣고 있다. 영화제작자와 감독들 그리고 마케터와 배우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이 겪어온 1990년대 영화계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이전까지 주로 남성들만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영화판'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자리를 잡고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이전에는 영화배우로서 활동한 여성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들은 남성중심의 영화계에서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하겠다.
1990년대에 활동했던 제작자인 심재명, 영화전문기자로 활동한 안정숙, 영화감독 임순례, 편집감독 박곡지, 홍보를 담당한 마케터 채윤희와 배우 전도연의 인터뷰가 1부에 수록되어 있다. 여성들이 영화계에 자리를 잡아가던 초창기의 힘들었던 상황이 그들의 목소리에 실려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초창기 여성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소외의 벽을 넘어 눈부신 성취’로 나타났음을 그 소제목에서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사의 첫 번째 30년 동안 여성 감독은 다섯 명에 불과’했으며, 그들조차도 지속적인 작품 활동에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내가 본 영화 중에서 임순례 감독 이전 여성 감독의 영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성 영화인들의 인터뷰를 싣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은 그래서 1990년대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이 책을 기획한 '여성영화인모임'의 등장으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 영화계의 모습은 예전에 비해서 여성들의 활약과 그 비중이 점점 늘어났다. 물론 그 배경에는 ‘여성영화인모임’과 같은 조직과 여성 영화인들의 다방면에 걸친 활동이 전제되어 있다. ‘더 넓고 더 깊게, 전문가들의 시대’라는 제목의 2부에서는 모두 8명의 여성 영화인들의 인터뷰가 소개되어 있다. 이 시대를 선도했던 인물들로 문소리라는 배우와 강혜정이라는 제작자를 인터뷰 대상자로서 가장 앞에 위치해놓고 있다. 이어지는 미술감독인 류성희, 음향과 편집을 담당하는 최은아, 조명감독 남진아, 편집감독 신민정, 마케터 박혜경과 영화프로듀서 김영덕에 이르기까지 여성 영화인들의 활동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제작 상영된 영화들의 개성이 보다 강해졌고, 그 이면엔 여성 영화인들의 활약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에 이르면 영화산업이 점점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면서, 멀티플렉스의 스크린 독점과 그로 인해서 이른바 '천만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시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것은 영화계가 안고 있는 '빛과 어둠'의 양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영화의 출현은 한편으로 반가운 현상이지만, 그 이면에 영화가 점점 산업화되면서 독과점의 문제로 인해서 상당수의 작품들은 상영할 공간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3부에서는 '단단한 자기 중심과 새로운 감수성'이라는 제목으로, 역시 6명의 영화인들이 다뤄지고 있다. 제작자인 제정주, 활영감독 엄혜정, 성적 소수자에 앵글을 맞추는 다튜멘터리 감독 김일란, 윤가은과 전고은이라는 두 신예 감독, 그리고 개성적인 연기로 주목을 받는 천우희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최근의 영화를 즐겨보지 않았던 나에게는 3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 기회가 닿는대로 그들이 제작하고 출연했던 영화들을 찾아서 보고, 그들의 목소리에 공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1부에서 3부까지 각 항목의 제목들이 그대로 여성 영화인들의 성장 서사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즉 남성 위주의 영화계에서 여성 영화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소외의 벽을 넘어’ 차츰 성장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여성 영화인들의 참여로 인해 ‘더 넓고 더 깊게, 전문가들의 시대’를 열 수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제는 여성 영화인들이 영화계에서 ‘단단한 자기 중심과 새로운 감수성’을 확보하면서,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각 항목의 제목을 통해서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앞으로도 여성 영화인들이 각 영역에서 주체적으로 활동을 하면서, 그로 인해 영화 산업이 활성화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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