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패에 들어가
이어산
남몰래 기념패에 들어가 숨어 있기로 했다 기념패 만들어 준 위원회는 사라지고 위원회가 추진했던 상징물은 산봉우리 하나로 솟아 있다 달이 가고 해가 가고 풀꽃이 피었다가 사라지고 다시 피려고 반짝이는 계절에 상징물은 더 높이 더 멀리 역사로 들어가고 있다 위원들은 제 일 제 자리로 가 역사와는 반대로 목련이 거듭 피거나 천리향 다시 향기로운 날에는 더 멀리 더 아래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 앉고 있다.
우리의 상징물에는 햇빛을 타고 천년이 와 쉬고 바람을 타고 파발마 소리 요란히 당도하는데 시민들은 모래알처럼 무명으로 무기명으로 상징물을 우러러 보면 그만이다 위원도 때로는 저 상징물 만들 때의 무용담을 골목 돌 때마다 메아리로 새겨놓고 싶지만 하늘은 높고 상징물은 나날이 푸르러 그저 아득하면 되리라 아득한 김치가 되어 뚜껑 닫힌 독에나 쟁여 있을 뿐이다
남몰래 기념패에 들어가 숨어 있기로 했다 돌을 져 나르던 날의 이름 석자와 돌을 져 나르던 날의 의미를 개괄해 놓은 문맥 몇 이랑에서 수건 머리에 쓰고 풀이나 매는 기념패 속의 생애를 살아 보기로 했다 역사는 제 상징물 이름표 달고 강의 상류를 쳐 올라가기도 하고 강의 하류나 선사시대 고분군으로 널뛰기하고도 지금 더 멀리 살아서 피로 흐르고 있다 거기 국중 위란(危亂)도 뜨고 논개도 뜨고 선비도 뜨고 경의(敬義)도 뜬다
오,단색의 질펀 질펀이여 길가에는 개망초 꽃이 삼일 만세 대열로 질펀히 피어 있다 저렇게 일제히 난만히 어우러져 전신 무식으로.
그는 지금 아프다
이어산
시인들이 모여 시시한 이야기를 시처럼 하는데
자세히 봐야 보이는 별처럼 시인이란 이름표 달고
그녀가 있었다
약속의 피는 뜨거웠고 만남의 날들을 기록한
나이테가 불룩해질 무렵 모반의 정황이 드러나
마른 호수 같은 마음들이 일그러져
무딘 도끼에 갈라지듯
나는
어두워졌고
너는
뜨겁지 않은
햇살이 되었었다
윤회의 기억처럼 세상은 돌고 돌아
시인이란 이름표 달고
젖은 신발 서로 숨기며 차마 건네지 못한 말들에
믿줄을 긋는데
묻어두었던 서러움이 눈물에 덴 자국처럼
툭툭 불거지고
시린 추억도 의지가 된다며
쉼 없이 술잔을 들이켜 세월의 더께가 불룩한
만삭의 추억이 양수처럼 터질 때
창백한 햇살이 추적추적 빠져나와
꽃이 흐르던 강 어둑한 근심이 시가 되고
주르르 흐르던 눈물도 밥이 되던,
유치환처럼 이영도처럼 백 통의 편지를
더듬다가 희끗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사랑도 가고 시도 갔으나
시인이란 이름표를 달고
증오처럼 피워 올린 세월을 판독하는데
이젠 별이 될 것이라며
어둠이었던 나에게
머리를 기대는
햇살이었던
너는
지금……
해갈
이어산
남강을 다시 보네
청춘을 앞장세워 쌓아 올린
티끌 같은 것들
근신과 배신의 와중에도 고향에 가 있었네
돌도 돌아 진짜 고향에 돌아왔냐는
구름의 속삭임 들었네
힘센 말 내려놓으라네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네
날개는 구름의 언어
비가 올지 모르는
땅은 아직도 먼지네 티끌이네
오면 좋겠어 당신
바람이 부네
비올라비올라 선율이네
새가 손짓하네
나무는 자라네
텃밭에는 새싹들이네
날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네
새의 언어를 배우네
겨드랑이가 가렵네
비가오네비가오네비가오네
이어산 시인
2002년 《시사사》 등단. 시집 『동네북』 등
시사사 전임회장 역임
계간 《시와편견》 발행인.
첫댓글 '해갈' 비가오네비가오네비가오네-->느낌표! 네비가오네,네비가오네("너의비가오네"로 읽어봅니다).
이어산 발행인님!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