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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1일 먼 거리를 그것도 처음으로 간 여행이었는데 내가 서두르는 바람에 더 즐거운 여행이 되지 못했다. 여유있게 동해안도 가고 오는 길에 아름다운 영월 어라연계곡에서 물놀이도 하다가 오늘 새벽에 움직였으면 좋았을 것을 빨리 돌아와 아쉬움이 있다. 운전을 많이 한 탓일까 아침에 몸이 무겁고 또 여행의 후유증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2일 고향 어머님께 여행 잘 다녀왔고 같이 못해서 미안했다고 전화를 하는데 오늘은 힘이 없으시다. 편한 마음으로 식사하고 잘 계시라 하니 그냥 그럭저럭 살겠다면서 희망이 없는 말씀을 하신다.
3일 거실에서 잤는데 시원하고 산바람이 자장가처럼 와 닿는다. 확 트인 전망에 피서지가 부럽지 않은 우리집인데 무악재 교통정체가 심하고 아들과 딸이 다닐 학군도 좋지 않아 미래 가치는 크지가 않다. 10년 전 서울역 대일학원 강의할 때 거리가 가까워 인왕산 재개발지역 아파트를 신청했는데 당첨이 되어 홍제동에 처음 오게 되었다. 거기서 한 3년쯤 살다가 아들이 안산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초등학교와 지하철이 가까워 당시에 분양중인 지금의 한화아파트를 매매하여 입주한 것이다. 기존 인왕산아파트에 비하여 교통이나 환경이 좋지만 홍제동이라는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서울 전지역을 기준으로 하면 평균치 아래를 밑도는 서민의 동네다. 오후에 중국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이름도 비슷한 아들 친구 정목이가 우리집에 놀러 왔다.
4일 어제 찜질방에 간 아내와 아들이 아침에 오고 나는 오후에 서점에 가서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건강서적을 구입했다. 작가인 화타선생이 직접 체험한 기록이라서 실질적으로 공감되는 내용이 많다. 휴가철이라 교보문고나 광화문 거리를 비롯하여 서울 전지역 도로가 휑하다. 무더운 저녁에 가족을 태우고 연희동 가서 칼국수를 사 먹었는데 오늘은 유달리 맛이 좋다.
5일 새벽부터 14번째 맨발 등산을 하는 내 모습이 노숙자나 정신나간 사람처럼 보이는지 마주치는 사람들이 놀라는 표정으로 길을 비킨다. 오전에 아들은 봉사활동 나가고 아내와 딸은 천호동 몽촌토성 견학간다기에 5호선 서대문역에 태워다 주었다.
6일 새벽에 거실에 나가보니 어제 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본 그대로 아들이 자고 있다. 오후에는 이틀 후 유럽여행 가는 아들이 이것저것 필요품을 준비하고 딸은 학원에서 오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고 먹거리를 찾으며 서성거린다. 뚱뚱한 사람은 보기도 좋지 않고 건강도 안 좋은 것이라며 내가 음식의 절제를 당부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에도 닭다리를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4학년인 딸이 지금 45킬로가 넘었는데 걱정이 안 될 수 없고 비만을 염려하여 가급적 오늘 저녁밥은 먹지 말라고 하니 기분이 상했는지 방문 앞에 출입금지 표지를 5장이나 붙여두고 들어가서 꼼짝을 않는다.
7일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여동생이 고향 어머니한테 가는 날이라 노량진 수업마치고 용산역으로 가서 조카들에게 용돈을 주고 배웅했다. 아버지와 큰 오빠를 이승에서 일찍 이별했으니 여동생도 불행하고 안타까운 삶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살아가는 동안 내가 더 많은 관심을 보내야 할텐데 말이 없는 동생에게 미안함이 많다. 딸의 방문 앞에는 오늘도 출입금지를 알리는 스티커 5장이 계속 붙어 있다. 음식을 먹겠다는 딸과 비만을 염려하는 나와의 갈등의 전선이다.
8일 아들이 12일 여정으로 유럽 캠프를 가는 날이다. 비용이 약 400만원으로 적지 않은 금액이니 알차고 보람이 있는 교육체험이 되었으면 좋겠다. 부모들이야 조건이나 능력만 되면 누구나 자식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외국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을 때 가는 것이 효과적인 학습이 될 수 있고 지금처럼 중학교 때 여행을 다니는 것은 자칫 호기심이나 흥미 위주의 놀이로 변질될 가능성이 없지가 않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 살아있는 교육이라고 전국의 역사현장을 다녔어도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기억에서 사라지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아들에게 유럽은 누구나 쉽게 갈 수 없는 여행이니 가는 곳마다 인상 깊은 부분을 적어 보라고 수첩 1개를 주고 아침 8시에 이륙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집에서 새벽4시 출발하여 5시경 공항에 도착하니 시간적 여유가 많다.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고 당부하고 낮 시간의 일정으로 나부터 먼저 서울로 나왔다. 초등학교 6학년 작년 2006년 8월4일 필리핀 어학연수 이후 1년 만에 다시 공항을 나서는 아들이다.
9일 새벽 아들이 출발한 지 20시간이 지났으니 지금은 첫 방문지 영국에 도착해 있을 것이고 평소에 활동성이 강하고 사교성과 순발력이 있는 아들은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노량진 수업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도중에 하늘의 구름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밀려오더니 비가 무섭게 내린다. 하루만 늦게 출발했으면 아들이 타는 비행기도 이륙할 수 없을 만큼이다. 딸은 앞집에서 영어수업 마치고 자장면까지 먹고 왔다면서도 오늘도 냉장고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10일 금요일 아들 일정을 보니 영국을 떠나 프랑스에 가 있을 시간이다. 10여일만에 유럽 여러 나라를 견학한다니 시간적 한계가 있어 아마 이름 난 유물이나 지역을 피상적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유럽에
있는 어느 나라도 여행을 못했지만 학교에서 배운 이런 저런 지식으로 영국 런던이나 프랑스 파리를 짐작한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스페인에서 한 동안 머물렀던 큰 형님이 한국에 나오면 딴 세상처럼 유럽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아무튼 세상은 넓고 볼 것도 많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아침식사에 밥이 제대로 익지 않아 불만을 토로하니 어제 저녁에 딸이 지은 밥이라고 한다. 평소 상상조차 못할 일인데 요즘 식탐이 많더니 드디어 밥까지 직접 짓는 일에 나섰는가 싶어 놀라기도 했지만 대견함이 다시 입맛을 돋게 만든다.
11일 아들이 없는 거실에서 아내와 딸이 오붓하게 영화를 보면서 마치 자신들이 주인공이 된 것처럼 다양한 표정으로 몰입하여 있다. 누구라도 이렇게 가급적 한 곳에서 영화도 보고 대화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고 즐거움일 것이다. 여기 분위기와 정반대로 살아가시는 어머님께 얼른 수화기를 들어 전화를 올렸다.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이 일하는 노동의 고통보다 대화할 사람이 없는 적적함이 더 크다는 말씀을 평소에 자주 하시곤 했었다. 초저녁에 딸과 앉아 8월에 맛이 있다는 포도 한 송이를 먹으면서 어머니와 나 그리고 나와 딸을 잇는 3대를 연결해 보았다. 나를 중심으로 어머니와 딸은 얼굴이 닮아 있고 까칠한 성격도 비슷하다.
12일 아들이 없으니 유럽 방향 서쪽으로 시선이 자꾸 간다. 새벽에 눈을 뜨니 푸른 안산 뒤로 하늘의 구름이 장관이다. 유럽은 현재 새벽 1시가 넘어 아들이 잠든 시간 나는 여행코스 도표만 한참 바라보았다.
13일 어제 밤에 등이 가려워 딸에게 조금 긁어 달라고 하니 건성으로 듣고 인상까지 쓰며 싫다고 한다. 딸에게 나중에 엄마도 없고 혹시 아빠 혼자 남아서 몸도 아프고 거동도 불편하면 어찌 할거냐고 물으니 단번에 오빠인 경목이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아빠는 경목이한테만 용돈도 주고 잘 해야 하겠다고 입장을 밝히니 눈만 꿈벅거리더니 말도 안하고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간다.
14일, 앞으로 5일 후면 아들이 돌아오기는 하지만 통화가 어려운 건지 비용이 들어서 그런지 소식이 없어 궁금하기만 하다. 비가 오는 오후에 우산을 받고 맨발로 안산을 걸었다. 19번째 맨발 산행으로 나를 이겨보려는 집념과 열정이 고행의 시간을 만들었다. 신록이 우거진 한여름 안산 중턱에 빗속을 뚫고 어디서 왔는지 잠자리 몇 마리가 날아다닌다. 부지런한 가을의 전령사가 아닐 수 없다.
15일 거리에 태극기가 물결을 이루고 여기 저기 광복의 함성이 들려오는 하루다. 저녁에 아내와 딸이 독립문에서 공연하는 8.15 음악회를 가더니 노래가 흥이 없다며 1시간도 되지 않아 돌아왔다. 아마 민족정신의 부재와 투철한 애국심이 없기 때문에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16일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니 딸이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있다. 이틀 후 외할아버지 칠순에 연주할 두 곡을 준비 중이라기에 내 앞에서 1차 발표를 해보라고 하니 자신이 없는 모양으로 한사코 거절한다. 아들처럼 때로는 뻔뻔한 넉살이 있어야 하는데 딸은 너무 소극적이고 당당함이 없어 문제다. 늦은 오후에 건강한 삶을 외치면서 맨발 산행 20번째 하는데 날이 어두워지고 서둘러 집으로 내려오니 스위스에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아들하고 통화를 못해 아쉬웠지만 즐겁게 잘 있다니 안심이 된다.
17일 요즈음은 사람들이 열대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8월의 중순이 지나는데 밤 기온이 25도 이상을 오르내려 어젯밤도 몇 번을 잠에서 깨면서 보냈다. 낮에는 덥고 지치고 마치 형체가 없는 무더위라는 적과의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것같다. 오늘은 아들 유럽여행 열흘이 되는 날이지만 마지막 날은 돌아오는 일정으로 되어 있으니 지금은 귀국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아들이 훗날 성장하면 유럽은 물론 전 세계를 누비는 기회가 생길 수 있고 그 때는 더 큰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18일 장인어른 칠순으로 청주시 율량동에 위치한 리오관광호텔에 도착했다. 깨끗하기도 하지만 공간이 넓어서 여유로워 보이는 홀에 들어서니 가족과 친지 50여명이 자리를 하고 있다. 내가 들어서니 둥근 원탁에 앉은 사람들이 일어나 악수를 청하고 마치 내가 오늘의 주인공인 것 같았다. 칠순을 맞이한 장인어른께서는 10여년 전 청주 우암초등학교 재직할 때 갑자기 의식을 잃어 결국 거동이 불편하게 되었지만 나름대로 절제와 노력으로 지금은 대화도 잘하고 수면이나 식사에도 큰 문제가 없으시다. 오늘 행사 사회를 보는 내가 맏사위라고 우쭐대며 인사를 했고 식순에 의해 잔치를 진행했다. 가족 소개와 함께 직계 가족들은 케잌까지 자르면서 아버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고 만수무강의 시간을 만들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런데 너무 의기양양한 내가 자녀들이 큰절을 하고 술을 따라 올려야 하는 오늘 행사 중 가장 중요한 헌주(獻酒)를 빠트린 것이다. 매사에 신중을 기하고 준비를 잘 한다는 내가 이렇게 귀중한 자리에서 실수를 하다니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꼴이 되어 처가 식구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행사를 마치고 밤 9시부터 11시까지 집 근처 노래방으로 이동하여 모두 즐거운 뒷풀이 분위기를 이어 갔다. 장모님과 처외삼촌의 노래 실력이 수준급이고 그리고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부른 나를 제외하면 용구아빠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은 들락날락 하기만 할 뿐 노래와 춤에는 별 관심이 없고 모두의 자랑인 아들이 없어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오늘 칠순잔치 행사비용으로 나는 축의금 1백만 원을 전했다.
19일 아침에 산행을 하려고 일찍 상당산성으로 가서 4킬로 성곽을 1시간 걸었다. 1981년 대학 축제 때 과대표로 마라톤에 출전하여 우암산 도로를 달려 이 곳 상당산성에서 반환점을 돌았다. 당시에 혈기만 가지고 연습도 없이 처음으로 마라톤에 도전한 참 힘든 코스와 시간이었다. 2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젊음에서 중년으로 와 있는 나와는 달리 산성 주변 자연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오후에 아들이 유럽에서 돌아오는 날이라 서둘러 점심을 먹고 상경하면서 곧장 인천공항으로 차가 간다. 한 쪽 팔이 없는 아버지가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간이역을 향하여 허위허위 걸어가는 소설 수난이대 속의 주인공이 이런 심정이었을 터이고 내가 고향에 가는 날에 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어머님도 지금의 이 마음이었을 것이다. 6시20분경 아들이 탄 비행기가 도착했고 1시간 이상이 흐른 뒤에 검게 탄 얼굴에 좀 말라 보이는 아들이 보여 달려가 머리를 쓰다듬고 반갑게 맞이했다.
20일 아들이 내 선물로 안경과 맥주컵을 사 왔다. 당부한대로 여행지 기록도 해서 성인이 되고 언제라도 다시 유럽에 갈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중학시절의 기억과 비교가 될 것이다. 오전에 노량진 가서 수업하고 오후에 오니 아들은 자고 있고 텔레비전에서는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누르고 여당대표로 본선에 진출하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다.
21일 아들은 외할머니께서 만든 김치가 맛이 없다며 안 먹겠다고 한다. 물론 할머니의 정성이나 사랑을 무엇에 비길까마는 대체적으로 음식은 전라도 음식이 맛있고 충청북도와 경상도 그리고 강원도 음식은 서울에서 인정을 많이 안 하는 편이다. 아들은 나와 외모도 닮았지만 입맛도 비슷하여 더 권하지 않았다.
22일 오늘 23번째 맨발 산행으로 계획한 천 번을 언제 완성할지 까마득하다. 바야흐로 가을과 겨울이 오고 날이 차가워지면 그나마 중단하고 내년 봄이나 여름으로 연장해야 한다. 모래와 바위에 닿은 나의 발은 현재 가죽처럼 두꺼워져 별 감각이 없을 정도다.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강한 사람은 무엇이든 자기 일을 수십 년씩 그대로 하는 사람인데 공부든 운동이든 꾸준하게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말이다.
23일 오전에 노량진 수업을 하고 와서 북한산을 3시간 걸었다. 정말 죽을 병에 걸린 사람도 땀 흘리며 걸으면 병이 치유 될 것이다. 집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해서 낼 개학 준비 잘 하라고 했다. 밤에 아내는 딸이 생리를 시작했다고 4학년 논술반 학생들과 피자헛에서 위로 파티를 하고 있다. 별스런 파티를 한다고 여기면서도 딸이 벌써 이렇게 자랐다니 새삼 세월이 빠르다
24일 아들 개학날 등교시간이 9시인데 친구들과 1교시 수업 전에 축구를 한다고 7시30분부터 서두른다. 평소에 이렇게 부지런하게 준비하고 나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인창중에 태우고 가면서 기온도 높은데 아침부터 너무 뛰면 땀나고 수업 중에 졸릴 것이니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노량진학원에서 강의하고 돌아오니 아들이 또 축구하러 서대문 구장에 간다기에 산을 오르는 나와 대화도 할 겸 안산으로 올라가 서대문 구청 근처로 내려가게 했다. 안산 정상 언저리 부근에서 집에서 가져 온 과일(복숭아)을 아들에게 권하니 썩은 부분이 있다고 외면한다. 할 수 없이 내가 입으로 정리하여 다시 주었는데 이제는 더럽다고 불만으로 소리를 높인다. 나는 정성과 사랑의 과일 아들에게는 더러운 과일의 시각차이다. 저녁에 아들이 독일에서 선물로 가져온 컵으로 맥주를 마셨는데 전통의 나라답게 튼튼하고 디자인이 좋다.
25일 아침에 에어컨 고장으로 본사에 전화하고 설명한다고 요리하던 갈치를 태워 연기가 가득하다. 일에는 순서가 있어야 하는데 렌지 위의 생선이 완전 숯덩이로 타는 줄도 모르고 가족들이 에어컨에만 정신이 쏠려 있는 아침이다. 저녁에 거실에서 아들과 딸이 신나게 마블게임을 하여 잠을 일찍 자는 경향이 있는 나로서는 시끄러워서 조금만 하고 일찍 자라고 하니 평소에 요청하면 오빠가 축구한다고 미루어 오늘은 그 동안 약속한 것을 몰아서 새벽까지 하겠다고 딸이 외치듯이 말한다.
26일 일요일 열대야로 잠을 설쳤다. 아들은 덕수궁 문화재 관람을 간다기에 소고기죽(스프)을 만들어 먹여 보내고 나머지 가족은 모래네 설렁탕으로 가서 식사 했다. 점심쯤 돌아온 아들은 오후에 다시 서대문 도서관으로 공부하러 가고 나는 홍제천으로 나가서 40분 달리고 돌아왔다. 출세를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기를 쓰고 살아 가는 우리들의 현재의 삶은 아름다운 미래로 연결되어 나갈 것이다.
27일 비가 오는 월요일 아침 등교한 아들에게 중간고사나 기말시험은 가르친 부분에서 나오니 평상시 수업을 집중하여 잘 들으라고 전화하니 벌써 교실에 도착해 있다. 28일 아침마다 아들은 학교에 가는 시간에 쫓기고 허둥댄다. 조금만 여유있게 일어나면 밥도 맛있고 좋을 것인데 이런 상황이 1학기부터 계속되고 있다.
29일 날마다 잠이 많은 母子가 오늘은 기어이 늦잠까지 자는 바람에 아침 식사는커녕 아들은 교복만 들고 현관을 뛰어 나간다. 아침 9시에 동사무소에서 등본을 받아 가지고 보니 류재은, 김경목, 김민경이 내 이름 아래 기재 되어있다. 이 사람들이 가족이구나 싶어 이름을 새기며 골몰하며 서 있는데 우리와 친하게 지내는 민정이 부모가 서류를 심각하게 보는 나를 의아해하며 인사를 한다. 큰 딸이 한국에 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배웅하고 오는 길이라며 눈물을 글썽이며 얼굴에 서운한 표정이 역력하다. 위로라도 해 주어야 마땅한 상황인데 나는 표정도 없이 그대로 등본 속의 이름만 새기며 서 있었고 지나간 뒤에 미안했다.
30일 어머니를 뵈러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갔다. 지평선 들녘에 누런 벼 이삭이 나와 있고 오가는 사람이 없는 고향 마을은 전설속의 공간이다. 마을 인구도 얼마 되지 않지만 날이 더워 외출하는 주민들도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 주변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시끌벅적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지난날이 그립다. 집에서 요즈음 부쩍 왜소해지고 허리까지 굽어진 어머님을 대신하여 내가 김치찌개를 만들고 마지막에는 어머님께서 양념으로 맛을 돋운다. 고향에 올 때마다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직접 사 들고 들어와 어머니와 마주 앉아 식사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오늘은 평생 고향만 고집하시고 서울행이라면 한사코 손을 저으시던 어머님께서 갑자기 서울에서 함께 살고 싶다고 하신다. 평상시 웬만한 어려움에는 내색도 안하시더니 어딘가 많은 불편함이 있으신가 보다.
31일 8월의 마지막 날 금요일이다. 말일이라 어제 종강을 하고 북한산에 갔다가 내려오는데 인부들이 산 아래 정릉에서 영취사까지 무게가 40킬로 되는 시멘트를 어깨에 메고 나른다. 빈몸으로 걷기도 힘든 오르막 산길 약1.5킬로 거리를 1개당 25000원 하루 5개 이동하여 10만원 이상의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나하고 비슷한 50줄의 나이쯤 될 것같은데 이 산속에서까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나 모양이 다양하기도 하다. 영취사의 청아한 독경소리와 함께 8월의 햇살이 산의 중턱을 넘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