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26) 시의 태어남 - ② 여러 가지 시적 발상법 2-1/ 문학평론가 김관식
시의 태어남
네이버블로그/ 시 한 줄에서 통찰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② 여러 가지 시적 발상법 2-1
㉮ 현장 취재 진술형
시인이 직접 시의 화자로 등장하고, 과거의 경험을 변용하여 진술하는 발상법이 있다.
습작 단계에서는 단순하게 과거에 체험한 것을 그대로 감각적으로 모상(模象)해 내는 기억을 재생적 상상이라고 하고
이때의 이미지를 재생적 이미지라 한다.
이 단계에서 재생적 상상력에 의해 채택한 이미지는 단순히 시의 소재를 나열해 놓은 상태에 불과하다.
좀 더 나아가 두 가지 이상의 관련 이미지를 유사성으로 병치하거나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연합적 상상력으로 재창조해내야 비로소 시적인 발상이 구체화 된다.
이것이 재생적 상상력보다 더 발전된 형태가 연합적 상상력인데,
두 가지 이상의 이미지가 유사성을 바탕으로 합치되면서 새로운 이미지가 창출된 것이다.
경험 그 자체를 그대로 그려 내는 재현적 이미지의 발상법보다는
여러 관련 이미지를 연결한 연합적 이미지나 창조적인 이미지로 시를 발상할 때 시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좋은 시는 좋은 발상에서 나오게 되며,
이때 시인에 따라 그 시인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느낌을 환기시킨다.
이는 시인만의 독특한 시상을 구상하는 형상화의 차이 때문이다.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인 김성규의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는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 보도된 화재 사건으로 반지하에 살던 일가족이 죽은
사건 현장에 관해 유적지를 탐사하는 기자의 시선으로 발상한 시이다.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 놓은 사진 속에서
들소와 나무와 강이 새겨진 동굴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쫓아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 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김성규,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전문
시적 대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시상의 전개가 달라진다.
가난한 달동네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빈민 가족의 화재로 인한 죽음을
사실적으로 유적지 발굴단의 눈으로 그려 냈다는 점이 이 시인만이 가진 독특한 발상법이다.
이러한 현장 취재 경험의 진술형 발상법은 화자가 마치 기자이거나 유적지 발굴에 참여한 고
고학 관련자처럼 생생하게 현장 보고 진술하는 형식의 발상과 형상화로 긴장감을 조성한다.
㉯ 경험의 고백적 진술형
경험의 고백적 진술형은 화자인 ‘나’가 직접 등장하여 자신의 경험을 진술하는 방법이 있고,
또 다른 형태는 화자를 자기의 분신이나 타자를 등장시켜 화자의 입장을 대신하여 진술하는 형태가 있다.
화자인 ‘나’가 직접 등장하여 자신의 경험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형식으로
주로 시인들이 어린 시절에 경험한 일들을 떠올리듯 진술하는 발상법이다.
습작기에 있는 시인뿐만 아니라 많은 시인이 경험의 고백적 진술형 발상법을 적용하고 있다.
많은 시인이 흔히 적용하는 방법으로 주로 재생적인 상상력에 의해 경험을 진술하기 때문에 주관에 치우칠 우려가 있다.
화자는 이야기꾼의 역할을 담당하여 진술한다.
이때 화자의 정서적인 개입을 최소화하는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객관화하고
비인격화된 하나의 동질적인 기억에 의존하여 경험을 객관적으로 진술해야 한다.
자칫하면 산문과 시의 경계가 모호해질 우려가 있으며,
체험을 시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사향(思鄕) 의식을 관념 상태로 진술할 우려가 있다.
이때 관념 상태의 표현은 관념 속의 형상화와 시적인 형상화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서술 방법을 익히지 않으면
시적인 형상화가 실패한 경험의 나열에 그치고 만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두어야 한다.
화자인 ‘나’가 직접 등장하여 자신의 경험을 진술하는 방법으로 발상한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 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 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 있다.
―신경림의 「아버지의 그늘」 전문
이 시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소재로 화자 자신의 삶을 투사하여 깨달음을 제시하는 서술적인 자세를 보인다.
“투기성이 있고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가정 문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다.
시적 화자는 아버지의 이야기와 자신의 감정을 혼합한 고백적 진술과 묘사로 한 시적 발상으로
단순하고 알기 쉬운 기억에 의존한 발상법이다.
1연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고,
2연에서 유년 시절 아버지 나이가 된 현재까지 살아온 아버지와 관련된 경험 이야기,
3연에서 아버지보다 더 못한 현재 자신의 모습에 대한 깨달음을 고백하고 있다.
다음은 화자를 자기의 분신이나 타자를 등장시켜 화자의 입장을 대신하여 진술하는 형태의
김선향의 시 「안녕, 엄마」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엄마, 그거 알아? 난 노점상에서 떨이로 사 온 귤 대신 고디바초콜릿이고 싶었어. 단화를 신고 온종일 마트에서 일하는 엄마 같은 여자, 생리휴가도 없이 서서 피 흘리는 가장은 사절이야. 내가 엄마를 고를 수 있다면 킬힐를 신고 거릴 활보하는 여자를 골랐을 거야. 노동이라곤 모르는, 죄의식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그런 여자 말야. 애초에 엄마 자궁은 비정규직처럼 허술했어. 하수도처럼 어둡고 비좁았지. 어쩌지? 의사 선생님이 계류유산이라고 말하자 안도하는 엄마 얼굴 다 봤어. 내가 이해할게. 난 반 근짜리 고깃덩어리. 신경 쓰지 마. 내가 위로해줄게. 수시로 도려내는 엄마 발바닥의 굳은살이 글쎄 차오르듯 엄만 늘 슬프니까. 눈빛사막달저수지생인손디즈랜드카니발꽃그늘몽고반점편도…다만 이런 것들이 조금, 아조 조금 궁금했을 뿐야. 엄마, 안녕. 쿨하게 안녕.
―김선향의 「안녕, 엄마」 전문
화자는 ‘나’의 뱃속에 들어 있는 계류유산의 태아이다.
계류유산이란 임신 초기에 발생하는 유산의 한 종류를 말한다.
보통 태아가 사망하면 아기집 밖으로 태반이 동시에 배출되지만,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사망 후에도 자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아기집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의 엄마 뱃속에 있는 죽은 태아가 엄마의 입장을 대변하여 고백하는 진술의 형태로 구성한 유산 경험의 시이다.
이처럼 일터에서 고통을 겪는 여성의 아픔을 죽은 태아를 화자로 등장시켜 진술함으로써
임산부가 열악한 상황에서 일해야 하는 사회 현실과 여성의 입장을 사실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 ‘시 창작 길라잡이, 현대시 창작 방법과 실제(김관식, 도서출판 이바구, 2021.)’에서 옮겨 적음. (2024. 3.11.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26) 시의 태어남 - ② 여러 가지 시적 발상법 2-1/ 문학평론가 김관식|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