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이 드신 분들이 살아오신
그분들의 인생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토요일인 어제 내 친구 Jean 의 어머니 Ann 여사 (95세) 와
인터뷰를 통해 10 남매 (딸 넷, 아들 여섯)를 키우신
그녀의 95년 인생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앤 여사는 결혼했을때 월세와 신혼 살림 장만할
돈이 없었던지
혼자 사시는 친정엄마 집에서 얼마간을 사셨다고.
그녀는 방한칸 없이 결혼해서
남편 급여로
10남매를 작은집에서 키우면서도
아이들 모두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무료인 공립학교 대신
사립인 카톨릭 학교를 보냈다.
그리고 비록 자녀들의 학비를 지원해 주진 않았지만
10 남매가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이제 몇몇은 현직에서 은퇴를 했지만,
다들 전문분야에서 일을 했거나 하며 잘 살고있다고.
정말 축복받은 인생을 사셨다.
* 자녀들은 부모가 학비를 지불해 주진 않았지만
부모님 집에서 다니게 해 주었기에 도움이 되었다고.
10남매가 모두 대학을 졸업한것이
그녀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럽다고.
Ann 여사는 언니 둘과 오빠를 둔 막내로
그녀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처럼 철물점을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그녀가 10살때 천국으로 가셨다.
앤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원에 계셨기에
앤의 엄마는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면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절대 먹지 않겠다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고.
앤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자
그녀의 엄마는 약속대로 초코렛을 끊었다고.
1930년대에 누구나 초콜릿을 즐겼다니...
엄마가 혼자서 어떻게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며 가정을 꾸렸나 여쭈었더니
연세가 많으셔서 기억을 못하셨다.
앤 아버지의 생명보험과 철물점 판 돈과
철물점을 하셨던
앤의 할아버지가 도와주셨는 듯.
* 미국은 1700s에 벌써 생명보험을 시작했다.
앤의 어머니는 혼자 아이들을 키웠지만,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렵지 않았는지,
고등학생이 일할 곳이 많지 않았든지,
앤여사는 고등학교 때 여름방학 동안
고정적인 파트타임 일을 하지 않았고,
아이들 베이비 시트를 가끔씩 하고,
집안일을 조금 했다고.
그런데 앤 여사에게 엄마 음식 중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여쭈었더니
주로 수프를 먹었으며,
일요일 저녁때 한 번씩
소고기로 만든 음식을 드셨다고.
앤은 초중학교는 집과 가까왔으나
고등학교는 쥴리엣에 있어 걸어 다닐 수 없는 거리였는데,
길 건너 이웃이 쥴리엣에 직장이 있어
그녀를 태워주었다고.
미국도 한국도 예전엔 이웃들과 서로 돕고 살았는데.
앤 여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 4년제 대학인
시카고 다운타운에 있는 DePaul에서
1년간 비서 일을 배우고,
결혼할 때까지 몇 년간 비서로 일을 하셨다.
그 당시엔 (1940년대 후반) 미국도
여자가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고.
한국의 1980년대와 같았네.
앤 여사는 어릴 때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자전거 타고, 가끔씩 롤러스케이트를 탔다고해 놀랬다.
그 시절에 롤라 스케이트가 일반화 되었나
의아해서 구글에서 찾아보니
미국에선 1930년대부터 1950년대에
롤러스케이트가 인기가 아주 많았다고.
시카고에 기차 타고 다닐 때
친구가 뜨개질을 가르쳐줘
뜨게질을 하며 다녔다고.
남편과 어떻게 만났고,
결혼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했는데,
앤 여사가 기억력이 흐려져
우리는 만나서 결혼하게 되어 있었다고.ㅎㅎ
진이 엄마가 아버지를 친구들 모임에 가서
친구의 소개로 만난 것 같다고.
앤의 남편은 대기업에서 은퇴할때까지 회계일을 하셨다.
작은집에서 아이들 10명을 키웠는데,
어느 이웃집 아이가 자기 집이 작다고
엄마에게 불평을 했는지
이웃에 사는 아이 엄마가 아들과 함께
자기집 앞으로 와서는
이 작은집에서 아이들이 10명이나
산다고 말하더라고.
작은집이었지만, 좁다고 생각하지 않고,
뛰어놀며 잘 지냈는데,
충격을 받았던지 50년도 더 지난
지금껏 기억하고 있는듯.
아이들이 많으니
매일 자기 집 뒤뜰에서
자기 아이들끼리 미식축구와 야구를 하곤 했다고.
말썽 피운 아인 없었는지 궁금했는데,
아이들은 늘 배가 고팠지만,
다 잘 자랐고, 좋은 시절이었다고.
다 잊어 버려신건지?ㅎㅎ
어떻게 그 많은 아이들을 다 키우셨냐고 했더니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돌보고,
집도 치우고 했다고.
미국에서 운전이 필수인데,
그녀는 평생 운전을 하지 않으셨다고...
집 근처에 버스가 다녀서 버스를 탔고,
남편과 자녀들이 운전을 해 주었다.
그녀는 아이 10명을
모유가 아닌 아기 분유로 다 키웠다고 해 깜짝 놀랐다.
아기 분유가 얼마나 비싼데...
알고 보니 그 당시 분유회사가 의사들에게 로비를 했는지
분유가 아기에게 좋다고 분유를 권했고,
당시엔 비싸지 않았는 듯.
그녀의 친구들 중 딱 1명 (부모가 이탈리안)만
모유로 아일 키웠다고.
모유로 아일 키웠으면 수유기간 동안
자동으로 피임이 되어
아이들 터울도 좀 더 길었을 텐데,
아기분유로 키워서
어떤 아인 터울이 짧았다.
모유 수유했더라면 아일 10명까지
낳지 않았을 수도.
난 아들 둘 키우면서도 너무 힘들었는데,
그녀는 10명이나 되는 아일 키웠지만,
부부가 낙천적이었는지
아이들이 모두 잘 자라
모두 대학을 마쳐 다들 잘 살고 있어,
후회도 없고 (잊어버려셨다고.ㅎㅎ)
베스트 라이프를 사셨다며 자랑스러워 하셨다.
자녀들을 잘 키우신 건지?
자녀들이 잘 자랐는 건지?
둘 다겠지.
첫째가 변호사인데,
큰딸답게 아이들이 자랄 때
맏이 역할을 잘했다고.
부부간에만 잘 맞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자녀 간에도 서로 맞아야 하는데,
앤 여사는 남편과 또 자녀들과 잘 맞았는 듯.
당신 자녀들에게 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Be Kind People"
"사람들에게 친철하라"고 하셨다.
앤 여사는 비록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만,
언니들과 오빠가 그녀를 잘 보살펴 주었고,
남편과도 27년 전에 사별했지만,
남편이 좋은 직장에서 은퇴를 하셨기에
적지 않은 남편 연금을 받고 계시고,
또한 자녀들이 잘 자라
남편 사후 그녀를 잘 보살펴 주고 있으니
평생을 순탄하게 사셨는듯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나도 마음이 편안했다.
10년 전에 인터뷰를 했더라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기억이 많이 흐려지신 것 같아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연세가 드시면 예전에 살면서 힘들었고, 후회된 순간이나
속상했던 기억들, 화가 났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두루뭉실 좋은것들만 기억하게 되는건지?
10년 뒤 진의 인터뷰가 궁금해진다.
둘째인 진의 집으로 4년 전에 오셨다.
남편인 Don과 함께
손주들과 함께 한 Ann 여사
어린 시절의 Ann
그 시절에도 (1930년?) 저렇게 스냅사진을 찍었다니...
고등학교 졸업반 때
초중고를 함께 다녔던 평생 친구들 - 친구 별장에서
부자인 친구가 해마다 자신의 별장으로 친구를 초대했다고.
또 한 친구도 남편이 엄청 큰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다.
일곱 명의 친구가 단체로 해마다 몇 차례 씩 만났고,
70대 후반부턴 13년을 매주 금요일마다
레스토랑에서 만나 커피타임을 가졌는데,
이젠 친구가 두 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Ann의 부모님
앤의 아버지이자 진의 외할아버지는
현재 진이 살고 있는 고장에서
의용소방서로 활동했다
사진 중앙 맨 위의 핸섬 맨 (진의 아버지)
1907년 미누카의 의용소방서 기념사진
진이 엄마를 위해 엄마가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을 모아서
사진책을 만들어 주었다.
신부 들러리로 참석한 친구 결혼식
그녀는 남편과 간단하게 결혼을 했다고.
결혼사진이 없었다.
Family Reunion (2022년)
* 17명은 사정이 있어 참석지 못했다고.
보통은 Family Reunion 할 때 사촌들과 그들 자녀들 가족들도 참석하는데,
진 가족들 경우는 진의 형제자매들과 그들 직계 가족들만 참석했다.
* 진의 부모님 양쪽이 Irish 라 Irish (아일랜드) 상징인 초록색 티로 통일
* Irish 들은 한국사람들과 공통점이 많은 것 같다.
남자들은 술 좋아하고, 약간 가부장적 친구들에게 진심이다.
엄마와 가족이 먼저라고. .
Ann 여사와 그녀의 10 남매들과 함께
내 목소리가 좋지 않아 질문지를 진에게 주고 인터뷰를 부탁했다.
(진의 형제자매들이 다 모였을 때 볼 수 있도록 촬영했던 비디오를 진에게도 줄 생각이었기에)
난 비디오와 사진 촬영
진은 기자일을 하고 있어 인터뷰를 잘했고, 목소리도 좋았다.
진이 자기 가족들 이야기가 내 블로그에 올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주어서 고맙다고.
내가 감사한데.
앤 여사가 와 주어서 고맙다며 다음에 또 오라고 하셨다.
그녀는 뜨개질 같은 것보단 사람들 만나 이야기 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셨다고.
나랑 같은 과 시니
그녀가 10년만 더 젊 어셨더라면 나랑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여지껏처럼 사시는 동안 평온하게 잘 지내셨으면.
이 지면을 빌어 인터뷰에 응해주신 앤 여사와 친구 Jean 에게 감사드린다.
추신 : 개인 정보 노출을 방지하고자
자세한 년도 같은것은 일부러 정확하게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첫댓글 와~ 앤여사가 참 훌륭한 분이시네요
어떻게 10남매를 저렇게 잘 키우셨을까요
공립학교를 안 보내고
카톨릭 학교을 보내신것도 남다르시고요
아이들 키울때 첫째가 올바른 생각을 하도록
잘 키워주면 동생들은 줄줄히 따라 잘 자라는것 같아요
내가 지금 나이들어 뒤돌아 보니
아이들을 더 낳지 않은것...
내 경력이니 돈을 더 많이 버는것 보다
아이들을 위해 올인 하는게
인생의 가장 보람된 일인것 같습니다
너무 너무 부러운 분입니다
남편 월급으로 10명의 아이들 먹고, 입히는것만 해도 힘들텐데,
10명의 자녀들을 모두 초등부터 고등학교까지 사립인 카톨릭 학교에 보낸것이
정말 대단하더군요. 첫째, 둘째, 셋째가 딸이고, 잘 자란게 앤 여사에겐 축복인것 같더군요.
저도 첫째 아일 잘 키우는게 중요하다는것을 알았기에 잘 키우고 싶었는데, 방법이 문제였네요.
청이님께서 그 경력에 일보단 자녀분들에게 올인하셨어 두 아드님이 훌륭하게 잘 자랐으니 성공하셨어요.
앤여사 이야기는 세상에 없는
훌륭한 이야기 입니다.
이런 귀하고 좋은 이야기를
담소실에 내 주신것
감사합니다
지금이야 한국과 미국 생활수준이 비슷하지만,
예전엔 한국과는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었기에
미국 노인들의 어린시절과 성장기, 그리고 결혼 생활,
자녀교육들이 궁금하기도 했고, 친구에게 부모님 영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혹시 저같은 분들이 있나 싶어 공유했습니다.
와,10명이나 낳아 키우신것도 대단하지만, 그 10 명이 모두 대학을 자기힘으로 다녔다는것도 너무 자랑스러운데,집에서 다니게 해줘서 도움이 되었다는 그 착한 성품까지,뭐하나 빠지는게 없이 10남매를 반듯하게 키워놓으셨네요.
공립이 아닌 사립학교를 보냈으면,학비도 많이 들었을텐데,먹이고 입히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자녀가 많으니 가족사진도 어느 단체모임 사진같이 굉장하지만,형제자매가 많으니,자라면서 다른집보다 부족한게 많았을지언정,우애는 참 좋았을거 같고
30년대에 저런 사진을 찍을수 있다니 역시 미국은 미국이네요
미국은 고등학교 졸업하면 부모로 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어선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부모님 집에서 함께 살게 해 주면 지금도 많이 고마와하는 편입니다.
부모에게 집에 있게 해주면 집청소와 집안 일, 또는 음식을 하겠다는 제의를 하는 아이들도 있더군요.
형제자매들이 많아서 자랄때 매일같이 시끄러웠고, 부족한게 많았지만, 다 바르게 잘 성장했고,
부모와 자녀간에 또 형제자매들끼리 사이좋게 잘 지내니 앤 여사는 축복받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게요, 30년대에 저런 사진을 다 찍을수 있었으니, 그 시절 정말 엄청난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처음결혼해서는
방한칸도 없이 세들어 사는 젊은부부들이 있었지요.
더군다나 예전에는 그렇게 가난해도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은 한국에서는
자녀들을 전부 대학을 보내는 부모님들이 계시지요.
1903년생 토끼띠셨던 제 친할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아들4,딸셋을 그옛날에 다 대학에 보내셨어요.
앤여사님께서 1927년생이사라면
제친정아버지와 동갑이시네요.토끼띠십니다.
위글을 읽으면서 참 훌륭하신 분이 미국에도 계시다는것을 알았어요.
그래도 사립학교에 보내려면 돈이 있어야 할텐데요?
미국상황은 그옛날 한국과는 비교가 안되는 부자나라의
이유때문에 사립학교에 보낼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미국인들은 굳이 자녀들을 다 대학보내려고
애쓰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앤여사님께서는 교육열이 많은신 분이셨군요.
제 친정아버님과 동갑이신데
참 자녀들을 10명이나 많이 낳으셨네요.
저희 아버님은 딸2 아들2 을 낳으셨어요.
미국에서라도 저렇게 많은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신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수고와 희생이 있었겠어요.
자녀가 많아도 저렇게 화목하게 지낼수 있다니
다 앤여사님 덕분이겠지요.
훌륭하신 앤여사님가족에 대해 잘보았어요.
푸른하늘님 할아버지께선 일제시대때
아들 넷과 딸 셋을 모두 대학에 보내셨다니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네요.
푸른 하늘님 할아버지보다 10년도 더 뒤에 태어나셨던
저희 할아버지께선 첫째와 둘째딸(쌍둥이 현 88세)은
초등학교도 보내지 않으셨거든요.
저희 고모님은 연세 드셔서 한글 읽기와 쓰기를 배우셔서
제게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앤 여사님 10남매가 대학공부를 할때
집에서 다니게 해 준것 외엔 모두 각자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다녔다고 하더군요.
카톨릭 신자들은 피임과 유산은 금했기에 카톨릭 신자들이
대부분 자녀들이 많더군요.
@앤드류엄마 일제시대에 대학을 나오신 분은 큰고모와 큰아버지셨고 ,
제 친정아버지(1927년생)는 해방후에 서울대를 나오셨어요.
제 아버지는형제들 순서로 세째셨지요.
그러니까 작은아버지 둘,고모 둘은 제가 어릴때 대학을 다니셨어요.
2분 빼고는 일제시대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