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31) 시의 제목 붙이기 - ② 제목 붙이기/ 시인 문학박사 하상규
시의 제목 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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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제목 붙이기
명심보감에 보면 하늘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았다.(天不生無名之草)라는 말이 있다.
세상 만물에는 이름이 있다.
그 이름들을 보면 그 이름을 가진 사물의 속성이나 의미나 특성을 짐작하게 한다.
천지 만물은 그 이름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드러낸다.
성명학에서는 이름이 정해지면 사람이 그 이름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기도 하고 사주팔자를 결정한다고도 한다.
이처럼 시에도 제목이 있다.
우리가 이름으로 그 사물을 이해하듯, 시를 볼 때 가장 먼저 그 시의 제목을 보게 된다.
제목은 곧 그 시의 얼굴인 것이다.
돌쇠나 마당쇠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고관대작이 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듯,
시에서도 제목은 중요하다.
그 시의 제목이 그 시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제목은 그 시의 일부이고, 어쩌면 그 시의 몸통이고 기둥이다.
그러면 제목을 정하면서 고려해 봄직한 몇 가지를 검토해보자.
첫째, 제목은 그 시의 내용과 일치하는가이다.
시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러 부분이 통합되어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제목은 그 시가 가지고 있는 의미,
정서, 분위기 등에 알맞아야 하고 암시적이어야 한다.
둘째, 그 시의 제목만 보아도 그 시를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참신하고 인상적이어야 한다.
셋째, 범위가 넓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이 독자의 감각을 자극하고 매혹을 느끼게 한다.
넷째, 보편적이고 상투적인 것은 가급적 피한다.
그러면 제목을 어떻게 붙이는지 여러 경우들을 보자.
㉮ 주제의 제목화
시의 주제를 제목으로 삼는 경우가 일반적으로 많다.
대부분의 시는 그 시의 제목이 그 시가 가진 의미, 정서 분위기 등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는 제목만 보아도 그 시의 의미, 정서 분위기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정직한 제목이고, 모범 답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럴 때, 그 시의 제목은 그 시와 일체를 이루는 것이 되고,
시 전체에 큰 영향을 주고, 근간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주제와 제목은 물론 관련성이 있으나 표현에 있어서는 그 관련성이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전혀 알 수 없이 상징적으로, 또는 은유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주제나 제목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이거나 또는 상징적이거나 은유적이거나간에 그 작품의 내용과 무관할 수 없고,
또 무관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것은 주제나 제목이 그 내용과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다.
(황송문, 현대시 창작법, 국학 자료원, p.114)
시의 내용(주제)과 제목은 관련성이 깊다는 주장이다.
필자도 주제를 제목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엇(T. S. Eliot)의 ‘황무지(荒蕪地)’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신앙 부재와 정신적 황폐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편시의 제목이다.
이 시의 주제는 황무지인데 주제를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소월의 ‘초혼(招魂)’도 정지용의 ‘향수’도 주제를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흔히 보이는 제목들로 사랑, 행복 등은 관념어를 제목으로 한 것이고,
고향, 낙동강, 할머니, 다도해 등은 구체어를 제목으로 한 것들이다.
이들이 시에서 상징적으로 쓰였더라도 시의 내용과 관련이 있을 법한 제목들이다.
그런데, 이런 평범하고 진부한 것들은 가급적이면 제목으로는 사용하는 것을 피할 일이다.
하기는 봄, 가을, 엄마 같은 제목들이라 할지라도 시의 내용이 개성적이거나 참신하다면,
이런 제목들도 이전(以前) 시인들의 전유물로만 주어버릴 일은 아니기도 하다.
㉯ 제재의 제목화
제재(題材)는 주제의 재료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곧 시에 선택된 소재, 시의 중심이 되는 소재를 말한다.
소월의 ‘금잔디’라는 시의, ‘금잔디’는 제재를 제목으로 한 것이다.
잔디,
잔디,
금잔디,
深深山川에 붙는 불은
가신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 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深深山川에도 금잔디에.
―김소월, 金잔디―
윤곤강의 ‘해바라기’, 이육사의 ‘광야’, 박목월의 ‘나그네’, 김춘수의 ‘꽃’, 박두진의 ‘해’,
조지훈의 ‘승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박남수의 ‘종소리’, ‘새’, 한하운의 ‘파랑새’와 같은 시들의 제목은
그 시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시의 중심이 되는 제재를 제목으로 한 시들이다.
㉰ 단어, 어구, 문장의 제목화
제목을 붙이면서 그 시의 주제와 제재가 아닌, 그 시에 쓰인 시어 중에서 단어 하나를 제목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소월의 진달래꽃은 시어들 중에서 하나의 단어를 제목화한 예라고 하겠다.
이 시의 주제를 ‘이별의 정한과 사랑의 승화’라고 본다면 제재는 ‘이별’이다.
‘진달래꽃’은 이 시에 쓰인 여러 소재들 중의 하나이다.
그중 하나인 한 단어를 제목화한 시이다.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머언 미개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과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하되,
삼가 애련(愛戀)에 빠지지 않음은
- 그는 치욕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즘생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쏘냐.
―유치환, 일월(日月)―
유치환의 ‘일월(日月)’이란 제목의 시이다.
일월이라는 제목도 이 시에 쓰인 시어 하나를 제목으로 한 것이다.
물론 읽기에 따라서는 ‘일월(日月)’이 다른 시어들보다 비중이 높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일월(日月)’은 이 시에서 주제도 제재도 내용도 대표하지 않는다.
이런 제목을 택하는 시들 중에는,
시의 제목을 보면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을 오히려 꺼리고,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단순성에서 벗어나고 모호성을 얻고 싶은 의도를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다음으로는 시에 있는 어구(語句)를 제목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
김윤성의 ‘어둠 속에 핀 꽃’,
한용운의 ‘임의 침묵’,
국효문의 ‘연꽃을 기다리며’,
황금찬의 ‘찔레꽃 옆에서’,
김동수의 ‘아침 숲에서’,
신석정의 ‘임께서 부르시면’,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조병화의 ‘해마다 봄이 오면’
등등 많은 시들에서 명사구, 부사구, 관형구 등 어구(語句)로 제목을 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점차로 그 비중이 높아가고 있다.
이 또한 단순성과 친절을 벗어나서,
신선함을 주고 충격을 주고 상상력을 자극하여 시에 무엇인가 있어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다고 하겠다.
다음은 문장(文章)을 제목으로 한 경우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신석정의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김영랑의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신동엽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강희안의 ‘이승과 저승이 따로 없을 것도 같다.’
윤석산의 ‘나는 왜 비속에 날뛰는 저 바다를 언제나 바다라고만 부르는 걸까’
등등에서 완전한 문장을 제목으로 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대게 주제를 잘 설명하면서 정서를 잘 표현하는 효과가 있다.
이런 풍조가 점차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다고 할까? 불가사의하다고나 할까?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들을 보면 대게가 제목을 긴 문장으로나 수식어가 많은 어구로 된 것이 대부분이다.
참고할 일이다.
< ‘실용(實用) 시(詩) 창작법(創作法), 16일 학습하면 당신도 시인이다(하상규, 새문화출판사, 2022.)’에서 옮겨 적음. (2024. 3.23.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31) 시의 제목 붙이기 - ② 제목 붙이기/ 시인 문학박사 하상규|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