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예수를 찾는 사람들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 ‘알라딘의 요술램프’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지니”라는 요정이 요술램프 안에 들어 있는데, 램프의 주인이 부르면 나와서 주인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내용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은 이런 요정을 부리고 싶다는 꿈을 꾸어봅니다. 한데, 이런 꿈은 철모르는 어린 시절 때만의 희망일까요? 나이가 들어서도 이런 꿈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교묘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내면화됩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무리는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 합니다(6:15).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군중들의 심리는 만능 요정 지니를 부리고 싶은 욕구와 다르지 않습니다. 왕이 되어달라는 무리의 요청은 예수를 왕으로 받들겠다는 말로 들리지만, 언제나 풍족하게 먹고 싶다는 것이 감춰진 속셈입니다. 주님을 왕으로 섬기겠다고 자처하는 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이들에게서 떠나십니다(6:15).
왜 예수를 찾는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은 이적에 참여했거나 전해 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가만히 둘 리 없습니다. 무리는 배를 나누어 타고 갈릴리 건너 가버나움까지 와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들은 예수를 “랍비(선생님)”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 랍비는 흔히 상대를 추켜세워주는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특별한 존경과 신뢰를 담고 있는 칭호입니다. 전날에는 “그 선지자(모세)”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부여했지요(6:14).
예수를 찾아낸 무리는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를 간절히 찾았다는 사실을 은근히 드러내는 언사입니다. 예수와 함께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사이면서, 예수께서 자신들을 두고 떠나가셨음에 대한 간접적 원망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언제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자 합니다. 언제 어디로 가시든지 함께 가자는 얘기입니다. 무리가 예수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원하는 동기가 문제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 (27절)
예수께서는 무리가 예수를 찾아온 이유를 정확히 짚으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이유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예수께서는 전날 오천 명을 먹인 이적 사건을 “표적”이라고 규정하십니다. 표적(semeion)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혹은 ‘목적지를 알려주는 이정표(sign)’입니다. 표적(表迹)은 목적(目的)을 보여주는 수단이므로, 오천 명 급식을 표적으로 경험한 사람은, 표적이 드러내려는 궁극적인 진실에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표적을 본 무리가 표적과 목적을 혼동하고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표적 자체는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무리는 오병이어의 표적 사건이 가리키는 진리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배부르게 했던 놀라운 빵의 이적에 열광했던 무리는 예수께 와서 그 표적을 다시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무리는 표적이 가리키는 목적을 보지 못하고, 그 표적에 머무른 채, 그 상태를 지속, 반복하고 싶어합니다.
썩을 양식 :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27절)
먹은 양식이든 보관한 양식이든, 모든 양식은 썩습니다. 썩는다는 것은 없어지거나 소용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배불리 먹고 나도 다시 허기지게 마련이고, 먹지 않고 쌓아둔 양식은 먹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양식일까요? “육신의 양식”과는 다른 차원의 “영적 양식”을 가리키는 표현일까요? 하지만 예수께서는 양식에 관하여 이런 이원론적 구분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양식을 얻으려 하고, 일과 노동을 통해서 양식을 소유합니다. 만나가 내렸던 광야 시절에도 많은 수고를 들인 사람은 많이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많이 소유한 양식은 소용없게 됩니다. 저장한 양식은 벌레가 먹었고, 들판에 남긴 양식은 스러졌습니다(출16:20-21). 많은 양식을 저장하고 만족하던 어리석은 부자는 목숨을 잃습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양식이 많음을 기뻐한 것이었습니다(눅12:16-20). 많이 먹었다고 배고픔에서 해방되지도 않고, 많이 소유했다고 오래 살 것도 아닙니다. 결국 양식을 소유한 사람도, 그가 소유한 양식도 없어지게 되니, 결국은 그 양식은 썩을 양식입니다.
반면, 성서는 사람이 소유한 양식이 아니라, 주어지는(인자가 주는) 양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양식은 수고의 대가가 아니라 사랑으로 주어집니다. 일꾼에게 주는 양식이 아니라, 자녀에게 주는 양식이 이런 종류이겠습니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양식은 주는 이와 받는 이 사이를 생명의 관계로 이어주기에, 생명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양식의 원천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에, 이 양식은 중단 없이 언제까지나 공급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양식으로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28-29절)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는 군중의 물음은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는 질문과 같습니다(마19:16; 막10:17; 눅10:25; 눅18:18). 여기서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무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겠다는 각오를 보입니다. 이런 열의(熱意)는,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도 나의 원하는 것(양식)을 보상으로 주신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 대가로 내가 원하는 양식을 소유하겠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려 하시는 일”입니다.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 아버지의 일인 것처럼, 세상에 양식을 공급함은 생명의 아버지인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고유한 일입니다. 아버지가 양식의 조건이나 대가를 자녀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생명에게 양식을 주시는 일을 성실하고 온전하게 행하십니다. 이를 증명하는 표적이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며, 광야의 만나 이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일로 보자면, 군중이 배고파하거나 음식을 달라는 요구에 응답하여 행하신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먹을 자격을 가리지 않고 광야에 있던 무리 모두가 먹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거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그분으로부터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착오입니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때를 따라 양식을 주시는 것은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하늘 아버지를 믿고, 그분이 보내신 생명의 양식인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만나의 표적을 보여주시오 (30-31절)
무리는 믿기 위해서는 표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무리가 요구하는 표적은 만나의 표적입니다. 오병이어의 급식 이적을 본 이들은 예수가 “그 선지자(모세)”라고 여겼고, 그런 표적을 행하면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들이 똑같은 조건을 붙입니다. 우리가 왕으로 삼을 테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 달라는 논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믿겠다는 조건을 내세워 예수를 통제하려는 내심을 숨기고 있는 물음입니다.
상식적으로, 식물이든 동물이든, 양식은 땅에서부터 왔다고 인식됩니다. 그런 면에서, 광야의 만나는 보통 양식과 다릅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주어진 떡”(31절)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떡은 하나님이 주신 떡이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유대인들은 만나와 같은 양식이 매우 특별한 시간에 드물게 제한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희귀한 떡을 먹었던 과거 광야 시대를 두고두고 회상하면서, 좀체 일어날 수 없는, 각별한 표적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만나와 같은 표적을 재현한다면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30절).
참 떡을 주시는 하나님(32-33절)
예수께서도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양식을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라고 동의하시고, 이를 “참 떡”이라고 칭하십니다(32절). “참 떡”은 하나님이 주시는 떡으로서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떡”입니다(33절). 그런데 이 “참 떡”은 만나에 국한되지 않으며, 만나와 같은 방식으로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일을 똑같이 반복하시는 분이 아니라, 새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각양의 방식으로 세상에 참된 양식을 주십니다.
양식의 목적은 생명을 부양함에 있습니다. 생명을 공급하는 모든 먹거리가 양식입니다. 그리고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양식이 생겨납니다. 야생, 재배, 수렵과 목축 등의 일상적 질서가 양식이 주어지는 통로입니다. 만나, 오병이어, 까마귀가 가져온 음식 보따리만이 아니라, 흔하고 익숙한 일용의 식탁이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시는 현장입니다. 어떤 과정으로 어떻게 얻어진 양식이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제공하셨음을 깨닫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35절)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라고 말하는 무리는 여전히 만나의 편견에 갇혀 있습니다. 새로운 만나가 변함없이 주어지고 있건만, 어제의 만나를 달라고 요구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자비하심으로 항상 주어지는 선물인 생명의 떡인 것을,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지 못하는 무리는 ‘항상 이 떡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달라고 요구하는 까닭은, 그 양식이 생명의 은혜이고 선물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은 완전히 새로운 양식을 세상에 내십니다. 그렇게 세상에 보내진 새로운 양식이 “예수”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반복하여 선언하고, 예수께서는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라고 자신을 밝힙니다. 예수가 양식인 이유는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분은 참된 양식이 되기 위하여 죽으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있는 아이는 굶주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고 믿는 이들은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 생명의 힘이요,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양식으로 보내신 분입니다. 하늘의 식탁인 만나의 이적은 차려진 먼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항상 베풀어지는 은총의 일상입니다. 우리는 더 많은 양식을 구하려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고아가 아니라, 양식을 주시는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는 자녀입니다. 그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https://www.youtube.com/live/w5i_RSTKKlc?si=JadNDl4NMQu9zRr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