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33)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 - ① 화장실에서의 메모/ 시인, 우석대 문창과 교수 안도현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
네이버블로그/ 화장실과 욕실에서도 메모하는 참 좋은 습관 어떠세요?
① 화장실에서의 메모
6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었다.
간밤의 숙취로부터 채 헤어나지 못해 머리는 지끈거렸고, 뱃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그날은 모처럼 별다른 약속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놀 수는 없었다.
「한계레」에 연재를 막 시작할 무렵이었으니까.
시어머니처럼 엄한 원고 마감 시간을 맞추어야 했다.
나는 매주 적잖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휴일에 쉬는 일은 접어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샤워를 하고 나서 맑은 공기로 머릿속을 좀 헹군 뒤에 학교로 향할 참이었다.
술을 좋아하지만 나는 숙취에서 완전하게 풀려나지 않으면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한다.
문득 학교로 가는 것보다 작업실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북쪽으로 가야 학교가 있고, 작업실이라 부르는 전주 근교의 누옥은 남쪽으로 가야 한다.
그 작업실에서 글 쓰는 작업을 하기는커녕 몇 주째 둘러보지도 못했다.
마당에 돋아나 있을 풀들과 툇마루에 쌓여 있을 먼지들을 어떻게 하나?
풀을 뽑고 청소라도 하고 방이 숨을 쉬도록 환기라도 해줘야 할 텐데,
거길 가면 새소리로 내 어지러운 머릿속을 씻어낼 수도 있을 텐데.
돌담 밑에 고추를 몇 주 심고 그 옆에 얼갈이배추씨를 뿌려놓은 게 생각났다.
그것은 농사도 경작도 아니었다. 해마다 버릇처럼 하는 일이었다.
어설프게 흙을 덮어 놓은 얼갈이배추씨앗이 싹을 틔운 것을 본 게 3주 전쯤이었다.
배추는 이제 잎사귀를 한 뼘 정도는 더 내밀었을 것이었다.
아마 애벌레들이 꼬물거리며 연한 배춧잎에다 마음껏 길을 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동네 노인들이 이를 보면 또 혀를 차시겠다.
“쯧쯧, 약을 좀 해야지.”
손바닥만 한 땅에 약이고 자시고 할 것 없었다.
두어 번 풋것을 뜯어먹을 수 있으면 좋았고, 나
중에 꽃대가 올라와서 꽃밭 삼아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여겼다.
자주 들르게 되면 나무젓가락으로 애벌레들을 잡아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 별안간 시 몇 줄이 머릿속으로 날아오셨다(다시 이야기하지만, 나는 책상 앞이 아니라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있었다).
큰소리로 아내를 불러 종이와 펜을 갖다 달라고 했다.
한 편의 시가 어떻게 와서 어떤 과정을 거쳐 시가 되는지 「한겨레」 독자들께 낱낱이 보고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떠오른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메모는 어떤 형태로 남았는지 내 스스로 시작 과정을 한번 기록하고 싶었다.
그날 아침에 쪽지 위에 적은 메모는 이런 것들이다.
투기, 재테크
한 평 남짓 배추씨를 뿌렸다
한 평 남짓… 나비를 키웠다
배추밭 둘레 허공을 다 차지했다
(나비의 생태-얼마나 날까?)
앉아라, 물러서라
배추잎을 갉아먹고 사는 애벌레를 잡지 않는다면 그 애벌레들은 틀림없이 나비가 될 것이었다.
나는 한 평 넓이만큼만 몸을 움직이며 먹이를 구하지만,
나중에 나비가 되면 애벌레는 배추밭 둘레 허공을 다 차지하고 날아다닐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배추를 한 평 키우는 게 아니라 나비를 한 평 키우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갈 수 있는 허공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나중에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키운 나비가 날아갈 그 허공은 모두 나의 것이기도 했다.
이런 욕심이나 호기는 얼마든지 부려도 좋지 않겠는가.
나비를 키움으로써 나는 경계도 말뚝도 박아 놓지 않은 그 허공을 차지할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내 소유의 허공! 변기에 앉아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제목을 ‘투기’로 할 것인지, ‘재테크’로 할 것인지는 차차 결정하기로 했다.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4. 4. 1.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33)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 - ① 화장실에서의 메모/ 시인, 우석대 문창과 교수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