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34)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 - ② 쩨쩨하고 치사한 시쓰기/ 시인, 우석대 문창과 교수 안도현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
네이버블로그/ 누구나 시인이 되는 시쓰기 공식
② 쩨쩨하고 치사한 시쓰기
나는 시시때때로 메모한 것을 반드시 컴퓨터 속에 있는 ‘신작시’라는 파일에다 옮겨 둔다.
그 파일을 열어보면 메모의 길이는 대체로 서너 줄.
단어 한두 개로 된 것도 있다.
어제 아침에 옮겨 둔 것도 있고, 조금 전에 떠오른 것을 적어둔 것도 있다.
7~8년 전에 메모했으나 아직 시로 날개를 달지 못한 것들도 수두룩하다.
수백 개의 그 메모가 옆에 없다면 나는 시인이 아니다.
그 몇 줄의 메모 때문에 여전히 시인이라고 어디 낯을 내며 나다닐 수도 있다.
그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알 같은 것이다.
시를 쓰게 되는 날(혹은 어쩔 수 없이 마감에 쫓겨 시를 써야 하는 날),
나는 우선 파일을 열어 메모를 일별한다.
아직 잠에서 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메모가 있는가 하면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메모도 있다.
컴퓨터 속 메모와 나와의 관계는 ‘줄탁동시’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시의 꼴을 갖추기 시작한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게 되는데, 이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바깥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줄탁’은 어느 한쪽의 힘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야만 병아리가
온전히 하나의 생명체로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만약에 껍질 안의 병아리가 힘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껍질 바깥 어미 닭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병아리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껍질을 경계로 두 존재의 힘이 하나로 모아졌을 때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이 비유를
불가에서는 참다운 사제지간의 관계를 말할 때 곧잘 인용하곤 한다.)
4월 어느 일요일 변기 위에서 한 메모는 두어 달 컴퓨터가 품고 있었다.
박제천은 시를 써내자마자 그 자리에서 달려들어 퇴고를 하는 일은 어리석다고 조언한다.
작품을 써내고 난 뒤에는 일단 눈앞에서 치우고 일주일이나 열흘쯤 묵힌 채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 다시 꺼내보라는 것이다.
즉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길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의 이 메모는 비교적 일찍 알을 깨고 나온 편에 속한다. 아래는 완성된 시이다.
한 평 남짓 얼갈이배추씨를 뿌렸다
스무 날이 지나니 한 뼘 크기의 이파리가 몇 장 펄럭였다
바람이 이파리를 흔든 게 아니었다, 애벌레들이
제 맘대로 길을 내고 똥을 싸고 길가에 깃발을 꽂는 통에 설핏 펄럭이는 거처럼 보였던 것
동네 노인들이 혀를 차며 약을 좀 하라 했으나
그래야지요, 하고는 그만두었다
한 평 남짓 애벌레를 키우기로 작심했던 것
또 스무날이 지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나는 한 평 얼갈이배추밭의 주인이자 나비의 주인이 되는 것
그리하여 나비는 머지않아 배추밭 둘레의 허공을 다 차지할 것이고
나비가 날아가는 곳까지가, 나비가 울타리를 치고 돌아오는 그 안쪽까지가
모두 내 소유가 되는 것
한 편의 시를 고치는 동안 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쩨쩨하고 치사한 사내가 된다.
창피할 정도로 별의별 짓을 다 한다.
나비도감을 들추고, 포털사이트에서 얼갈이배추에 대해 알아본다.
행을 한 번 바꾸는 데 열 번 정도는 이리저리 붙였다가 뗐다가 해본다.
중간 부분 이후에 ‘―것’이라는 어조는 스무 번 정도 썼다가 지웠다가 가까스로 택한 것이다.
왠지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
제목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투기」보다는 「재테크」가 시의적절해 보였다.
재테크에 목숨을 거는 이들에게 나의 재테크 방법을 자랑하고 싶은 심사도 작용했을 것이다.
수십 차례 고친 뒤에 옆방에 계신 정양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은 중간 행 하나를 지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있으나마나 한 행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읽어보니 정말 그랬다.
어디 숨고 싶었다. 두말 없이 지웠다.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4. 4. 4.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34)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 - ② 쩨쩨하고 치사한 시쓰기/ 시인, 우석대 문창과 교수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