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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신 예수를 먹다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장)
생명과 양식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원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먹음을 통해서만 그 생명을 유지합니다. 동물과 아울러 식물도 그러하고, 육신의 생명만이 아니라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형태의 생명이든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살기 위해 요구되는 먹이를 양식이라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소식(小食)이나 금식(禁食)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먹어야 산다는 사실의 선명함은 어떤 경우에도 퇴색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은, 먹으면 죽기도 합니다. 독버섯처럼,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게 보이지만 독을 품고 있는 것들이 있어서, 탈을 일으키거나 죽음에 이르게 되기도 합니다. 먹는 자의 생명력을 감소시켜 양식이 될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낯선 종류의 식물을 사람들이 먹지 않는 버릇이나, 믿을 수 없는 이들이 내어주는 음식을 경계하는 습성은 타당합니다. 아무것이나 생명의 양식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35절)
가장 믿을 만한 양식은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먹거리입니다. 알려진 바대로,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는 모유는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필수적인 양식이기도 합니다. 같은 재료를 사용한 같은 음식이더라도, 어미가 자식에게 만들어 주는 음식은 더 큰 생명력을 지닙니다.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는 먹이를 양식이라고 할 때, 그 생명을 부여한 이인 부모가 양식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것은 생명 부여자의 당연한 의무이자 본능으로서, 생명을 주는 것과 양식을 주는 것은 나누어질 수 없는 한 가지 일입니다.
“우리에게 이 양식을 항상 주소서”(6:34)라고 청하는 무리에게,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나는 … 이다(ego eimi)”는 독특한 언명들이 등장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나는 양의 문이다”(10:7, 9), “나는 선한 목자다”(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5)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언명 중 첫 번째가 “나는 생명의 떡이다”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서슴없이 말씀하시는 근거는, 생명의 아버지인 하나님께서 생명들을 위해 예수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3:16).
주리지 않는다, 목마르지 않는다 (35절)
성서는, 모든 생명을 존재하게 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을 ‘하늘의 아버지’로 칭합니다. ‘하늘’은 ‘땅과 그 생명’을 내신 근원이라는 의미이고, ‘아버지’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부양 역할과 책임을 지는 존재를 뜻합니다. 아버지에게는 자식에게 대한 권리만큼이나 ‘부양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는 법적 강제 조항이기 전에, 사랑에 의한 자발적 본성입니다.
성서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생명들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에덴은 그야말로 양식의 보고(寶庫)입니다. 이집트의 히브리인들을 불모지 광야로 이끌어내신 하나님은 광야 생활이 끝날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내려 그들을 먹이셨고, 기근의 때에 사르밧 과부 가족을 먹이셨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이적 역시도 하나님께서 무리를 먹이신 사건입니다. 이러한 기적적인 방식의 양식만이 아니라, 공중의 새와 들의 꽃도 먹이시고, 의인은 물론 악인들에게조차도 일용할 양식을 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양식을 주신다는 진리는, 하나님이 예수를 양식으로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에서 궁극적으로 천명됩니다.
양식으로 보내어진 예수께 오는 사람은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께 오는 것이며, 그는 주리지 않습니다. 그가 주리지 않는 것은, 양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생수(4:10)이신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생수를 보내신 하늘 아버지를 믿는 것이며, 그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목마르지 않은 이유는, 많은 우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생수를 주는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더라도 다시 배고파집니다. 아무리 많은 물을 마셔도 또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은 다시는 먹지 않아도 되는 마술의 떡이 아니고, 생수는 마법의 물이 아닙니다. 그 양식과 생수를 주시는 하나님이 다함이 없는 분이기에, 그분에게서 먹고 마시는 자들은 영원히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수군거리다 (41-42절)
“나는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수군거립니다. 그들은 전날 오병이어의 양식을 배불리 먹었던 이들이기도 합니다. “수군거리다”는 동사 goggyzo는 “불평하다”는 말로도 번역됩니다. 이 동사는 광야에서 수시로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묘사할 때 사용된 그 용어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불평한 이유는 양식을 못 먹어서가 아닙니다. 매일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으면서 그들은 끊임없이 불평했었지요. 전날 오병이어의 양식을 먹었고, 오늘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마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떡)이라는 말을 수긍하지 못하고 수군거리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가 “요셉의 아들”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은 감춰진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전날 오병이어 급식의 이적에 마음이 쏠린 군중은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의미입니다.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내(예수)게로 온다 (44-45절)
음식을 먹는 일은 허기짐을 면하고 식욕을 만족시키는 차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음식을 먹는 일은 함께 먹는 사람들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또한 양식을 제공하는 존재와 양식을 먹는 존재 간의 관계를 인식하게 만듭니다. 단순히 생존을 위한 필요와 본능 충족을 넘어, 양식으로 자신을 내어준 생명 존재와 그것을 먹고 살아가는 생명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양식은 그 자체로 생명과 삶에 대한 근원적 가르침을 내포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양식이면서 동시에 가르침이며 교훈이었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먹던 양식과는 판이했습니다.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은 양식을 얻기 위해 노동해야 했습니다. 요구되는 일을 해야 하고 그 수고에 의존해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광야의 만나는 노동의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일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양식이 아니라, 누구라고 필요한 대로 풍족히 먹을 수 있는 양식이었습니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는다는 만나의 법칙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양식의 새로운 의미를 드러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급식을 통하여,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풍성한 식탁을 펼쳐내십니다. 빵 다섯과 물고기 둘만으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식탁을 제공하심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자비는 결코 부족함이 없다는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이 교훈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공중의 새와 들의 꽃도 먹이신다는 말씀으로 확장되고,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햇볕과 비를 주신다는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오병이어의 식탁에 이어, 예수께서는 무리와 긴 말씀을 나눔으로써, 양식은 곧 말씀이라는 취지를 분명히 하십니다.
평생 양식을 먹으면서, 그 양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양식이 어디로부터 왔는지(6:5), 그 양식을 주는 분이 누구인지, 먹는 존재와 먹히는 존재가 서로 생명을 주고받는 신비의 관계로 연합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되는 식탁이라면, 그 식탁은 온전한 생명의 자리가 됩니다. 그 점에서, 양식이야말로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은혜와 구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가르침입니다. 그 점에서 양식은 말씀입니다. “예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는 선언은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이라는 선언과 본질적으로 상통합니다.
생명의 떡을 먹다, 생명의 말씀을 먹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48, 50, 51절)라는 말씀은 “나를 먹으라”는 얘기입니다. 양식은 먹히기 위해 존재합니다. 최상의 음식도 먹지 않으면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떡임을 믿는 이들은 예수를 먹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생명의 양식임을 믿고 예수를 먹는 이들입니다. 어떻게 예수를 먹는가에 대하여는 성서가 친히 알려주고 있으며, 교회는 오랜 전통 속에서 이 식탁을 예배로 의식화해 왔습니다. 교회의 예배란 생명의 떡인 예수를 먹는 성례전이며, 말씀의 성례과 성찬의 성례로 구성됩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이 예수를 먹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서두에서,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로고스)으로서 세상에 오셨다(성육신)고 선언합니다(요1:1-2, 14).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며(요1:1) 생명(1:4)이기에, 예수께서 말씀으로 오셨다는 것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양식으로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임이 곧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요, 양식이신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45절에 있는 “가르침” “듣다” “배우다” 등의 용어들은 생명의 양식을 말씀으로 대하는 방식을 표현합니다.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48-51절)
예수를 먹느냐 마느냐는 믿음의 문제요, 예수를 먹은 사람은 예수와 하나가 됩니다. 누구든 자신이 먹는 것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먹은 것은 곧 내가 됩니다. 예수를 양식으로 먹은 사람은 예수의 생명을 가집니다. 예수는 그(녀) 안에 살고, 그(녀)는 예수 안에 삽니다. 생명의 양식인 예수를 먹는 사람은, 그 양식을 주신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영원하듯이, 하나님 자녀의 삶은 영원한 생명(영생, 47절)으로 일컬어집니다. 예수를 먹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유입니다(51절).
영원하다는 의미는 시간의 무한성을 가리키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 연합을 뜻합니다. 예수가 내 안에 살고, 내가 예수 안에 산다는 것은,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영생은 육신의 죽음 이후에 오는 생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며, 사나 죽으나 달라지지 않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를 먹는 사람은 예수의 생명을 지니고 있고, 그 생명의 연합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