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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인 예수를 먹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한복음 6장)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양식) (51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나는 양의 문이다”(10:7, 9), “나는 선한 목자다”(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 5). 요한복음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예수 스스로 말하는 선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 없지만, “나는 생명이다”는 언명이 중복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서문(1:1-8)에서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1:4)는 말로 세상에 오신 예수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오심은 ‘“영생”을 주기 위함이다’고 천명됩니다(3:16). ‘영생’은 영원한 생명, 곧 생명을 가리킵니다. 생명을 주러 오셨다는 얘깁니다.
오병이어의 급식 이적(6:1-15) 후에 이어지는 담론(6:22-59)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고 말씀하심으로써,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의 정체를 밝힙니다. 이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다”(6:51)는 선언으로 확장됩니다. 떡(양식, 빵)이신 예수를 수식하는 두 가지 어구가 있습니다. ① ‘하늘에서 내려왔다’와 ② 살아 있다(생명을 준다)는 이다’는 어구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지칭합니다. 이는 유대교 전통 속에서 오랫동안 굳어진 언어 관습으로서,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가 같은 말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은 ‘하나님에서 온 양식’이라는 의미로서, 이는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양식”이라는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명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요3:16). 그 하나님은 곧 아버지입니다(57절).
생명의 떡(48절), 살아 있는 떡(52절)
두 번째 수식어인 “살아 있는”과 연결된 양식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이와 대구를 이루는 표현으로, 요한복음엔 “살아 있는 물(생수)”이라는 은유(4:10, 7:38)가 대두됩니다. 양식과 물은 생명 보존의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입니다. 양식과 물을 먹고 마시지 않고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 있다”는 말은 생명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생수(生水)”의 일차적인 의미는 “흐르는 물”입니다. 저수지와 같이 흐르지 않고, 고이거나 저장된 물은 먹을 수 없습니다. 부단히 퍼내지 않은 우물도 썩어 버립니다. 반면에, 생수의 대표적 근원지로 알려진 샘은 물을 끊임없이 흘려보냄으로써 가장 생명력 있는 물을 제공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4:14), “그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7:38)이라는 말씀으로, 생수의 특성을 표현하십니다.
마찬가지 기준을 적용한다면, “살아 있는 떡”은 ‘흐르는 떡’ 혹은 ‘움직여 가는 떡’입니다. 어느 창고에 쟁여져서 저장되지 않고, 흘러가는 물처럼 필요한 곳으로 이동하는 떡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은 이런 개념을 충족합니다. 하늘에 잔뜩 쌓여 있는 떡이 아니라 땅으로 내려오는 떡이기에, 흐르는 생수처럼 생명을 주는 떡입니다. 생명은 산더미처럼 많이 쌓인 풍성함이 아니라, 움직여져 나누어지는 풍성함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가 이와 같습니다. 남기고 저장한 만나는 썩어 먹을 수 없게 되었지요.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마시라 (53, 56절)
앞서, 생명의 양식인 예수는 말씀으로 알려졌고,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생명의 양식을 먹게 된다는 차원이 언급되었습니다(6:45). 여기서는 “인자의 살(sarx, 육신)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 자체로, 혐오감을 일으킵니다. 구약성서나 당시 주변 문화에서, 인간의 살을 먹는 것은 악마적인 행위로 금지됩니다. 율법에는 피를 마시지 말라는 계명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창 9:4; 레 3:17; 신 12:23). 그런 까닭에,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예수의 말씀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살 대신 몸(soma)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공관복음서도 이 명령을 보존하고 있습니다(마26:26-30; 막14:22-26; 눅22:14-23).
보통, “먹다”는 동사로 “esthio”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54, 56, 57, 58절에는 “trogo”라는 동사가 채택됩니다. “trogo”는 “씹다”, “소리를 내서 먹다”라는 뜻으로, 혐오감을 한층 더합니다. 이는, 양식이신 예수를 먹음이, 개념이나 이해의 차원을 넘어, 매우 실제적이고 생생하게 경험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지난주에 언급한 것처럼, 예수를 먹은 첫 번째 방식은 예수의 말씀을 들음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먹음은 구체적인 먹음의 행위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성찬례가 생겨난 근거입니다.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다 (52절)
이 말씀으로 인해 군중(유대인들)은 자기들끼리 다툽니다. 앞서, 그들은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수군거리던(불평하던) 사람들입니다(41,43절). 이제는 ‘살과 피를 먹으라’는 예수의 말씀을 불편하게 여겨 급기야 다툼으로까지 번지게 된 것입니다(52절). 이런 혼란과 다툼은 더욱 심해져,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제자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예수를 떠나가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66절).
이는 실제 교회 역사를 반영하는 언급이기도 합니다. 초기 교회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된 죄목 중에는 “식인(食人)죄”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이 고발된 것이지요. 결코 그럴 리가 없었지만,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여지는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성찬례”가 원시교회 때부터 예배의 필수로 행해졌고, 그것이 오해를 일으키는 빌미가 된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인해 고민하게 되고 분쟁이 일어나는 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에 칼을 주러 왔다’(마 10:34)고 말씀하셨지요. 복음은 회개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되는데, 회개는 곧 나와 나의 갈등, 우리 사이의 분란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갈등을 겪지 않는다면, 어찌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까요? 그 말씀으로 인해 분란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를 먹다 : 성찬 전례
모든 양식은 한때 살아 있던 생명이었고, 그 생명이 죽어 양식이 됩니다. 먹는 일은, 죽어 양식이 된 존재의 생명이 먹는 자에게로 옮겨가는 사건입니다. 성서는,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양식이 되셨고, 그 양식을 먹은 자들은 예수의 생명을 얻어 살아간다고, 일러줍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양식이 되신 사건이며, 그럼으로써 생명을 주는 구원 사건입니다. 예수를 양식으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현장입니다.
온갖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필수적으로 지켜 행할 일이 되었습니다. 기도하고, 찬송(노래)하고, 말씀(경)을 읽고, 설교(설법)를 하고, 사랑(자비)을 실천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만 행하는 두 성례가 있는데, 세례와 성찬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언하는 의식이 세례라면, 성찬례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하늘 아버지의 양식을 먹는 의식입니다. 성찬례를 행함으로써, 신앙공동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먹음으로써 그분의 생명을 힘입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때를 따라 반복하여 식사하듯,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양식으로 취하는 식탁의 자리를 정기적으로 제정하였는데, 예배가 그 식탁입니다. 이는, 예배가 단순한 제사가 아니라, 생명의 양식인 예수를 먹는 은혜와 구원의 식탁이라는 사실을 표방합니다. 이 식탁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양식을 먹는 말씀의 예전과, 먹고 마심을 통해 생명의 양식을 먹는 성찬례로 구성됩니다.
예수를 먹다 : 식구 관계를 맺다
신앙이란 신을 이해하고 그 신과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합니다. 요한복음 6장은 각각 ‘하나님’을 일곱 번, ‘아버지’를 열다섯 번에 걸쳐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은 아버지이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라고 알려지는데,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동시에 생명을 먹이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둡니다. 아버지인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며, 특별히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예수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가 주는 양식을 먹는 이들이 자녀이듯,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인 예수를 먹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 하나의 관계는, 하나님이 보내신 양식인 예수를 먹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맺는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식탁에서 함께 먹는 이들은 가족, 즉 형제와 자매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예수를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먹는 이들은 모두 형제와 자매입니다. 성찬례의 신학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만찬에서 형제와 자매로 연결되고, 심지어 하늘에 있는 성도들도 이 식탁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한다고 알려집니다.
나는 그 안에, 그는 내 안에 (56-57절)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들이 여기에 적시됩니다. 그들은 자신 속에 생명을 갖습니다(53절).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54절). 예수께서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리실 것입니다(54절). 그들은 예수 안에, 예수께서는 그들 안에 거합니다(56절). 그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57절). 그들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58절).
먹힌 양식은, 자기를 먹은 존재를 살리고 생명을 줍니다. 먹힌 양식은 그것을 먹은 존재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됩니다. 이는 자연의 법칙이요 양식의 신비입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신비는 내가 예수를 양식으로 먹는다는 사실로 설명됩니다. 지금 예수를 양식으로 먹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예수와 함께 거함은 바로 현재의 일입니다(35a). 마지막 날에도 변함없이 예수로 말미암아 그들은 살게 될 것입니다(35b).
예수를 먹음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죽음과 부활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양식이 되고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양식으로 먹은 이들의 생명과 하나가 되셔서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를 먹은 이들이 예수의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 이는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부활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수의 생명력으로 사는 우리가 여기 살아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를 양식으로 삼아 생명을 얻는 이들의 공동체를 “교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함께 하는 그 생명의 일을 “예배”라 부릅니다.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말씀으로 예수를 먹고 성찬례를 통해 예수를 먹습니다. 예수를 먹은 이들 속에 예수께서는 부활하시고, 예수의 생명을 가진 이들은 세상 속에서 그 생명을 나눕니다. 예수의 생명을 자기 안에 쌓아 두거나 저장하지 않고, 세상으로 흘려보내고 나눔으로써 살아 있는 양식이 되게 하는 이들.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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