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39) 차이의 비유, 차유(差喩) - ⑤ 차유의 윤리 2-1/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
차이의 비유, 차유(差喩)
Techholic/ CPU와 GPU 차이를 비유하자면? - 테크홀릭
⑤ 차유의 윤리 2-1
‘부정의 차유’의 시는 가장 심층적이고 주관적인 양식인 만큼 역으로,
당대의 외국 문화나 문화 권력을 다투어 모방하거나,
해체의식을 관습화하는 폐단을 초래할 위험 또한 다분히 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크 데리다의 탈중심화(decentering),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의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 등의 개념이 소수의 시인과 평론가들에 의해 복사되고
반강제적으로 전파되면서 동일화의 권위주의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노력은 오히려 좌절되고,
일방으로 시단을 패권화 하는 폐단마저 없지 않았다.
20세기를 연
니체, 프로이트, 실존주의자들,
이들 사상가들의 기획도 차이 나는 사고와 언어를 향한 중요한 노력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논리를 흉내 내어 끝없는 지양(止揚)을 복사하는 데 열중한다든지,
복사된 격식이 권력화하여 대단한 창의로 고집되고 강요되는 사태마저 벌어진 것이다.
시란 기존의 논리에 미사여구의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로
개성적인 표현이라 해서 주장만 드센 독선의 모사(模寫)일 수도 없는 것이다.
시란 모사나 재현이 아니라 창의적 이성과 감성의 표현이다.
여기에서 시의 윤리, 차유의 윤리가 출발한다.
현실을 부정하되 부정하는 인식의 힘,
의미의 유예를 통해 잃어버린 새 질서를 발견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데에 차유의 윤리가 있다.
니체의 말대로 혼돈과 모순의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허무가
세계의 진면목이며 시인은 아폴론적 가상(假想)을 좇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시인의 시 쓰기는 화해하고자 하고 새로운 화해에 따르는 새로운 진실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 어둠 속의 거의 유일한 빛의 흔적을 좇는 것이다.
그 작은 빛마저 사라진다면 지상에는 빛이 꺼지고 말 것이라는 간절함으로.
뿐 아니다. 논리가 시를 따름이 마땅한데도 시가 기성의 논리를 재현하면서 주객을 전도하는 현상,
그들이 내세우는 부정과 전복과 허무의 언어란 것도 진본과 복사본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어떤 논리나 신조도 맹목적인 추종을 하는 한,
시를 오염시키는 병인(病因)이 될 밖에 없다.
지글지글 내가 날 굽는 냄새가 피어오르자 해골들과 부위 모를 뼈다귀들이 앞 다투어 모여든다 석쇠 위에 고여 있던 핏물이 선지로 돌돌 말아 빚은 완자처럼 지져져 더욱 쫀득해진 내가 날 역가위로 한 입 두 입 잘라 굽는다 따각따각 아귀 터지게 턱 벌리는 해골들에게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바싹 태워 먹여준다 오일 바른 상아같이 매끈매끈한 뼈다귀들의 몸에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파스처럼 붙여준다 불가에 모여 앉은 해골들과 뼈다귀들이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을 먹고 입고 점점 나로 살쪄간다 일곱의, 열넷의, 스물의, 스물일곱의 제각각의 내가 날 쳐다보며 나야 나야 손을 흔든다 내가 날 잘라 구운 살점들을 다 트림하고 나로 자란 그대들이 방방마다 걸린 액자 속으로 걸어들어가 찰칵찰칵 기념촬영을 한다 내가 날 잘라 구워 먹고 난 달궈진 석쇠 위에는 열세 개의 꽃삽만이 꽃게처럼 익어가고 있다.
―김민정, 「내가 날 잘라 굽고 있는 밤 풍경」 일부
참을 수 없는 허무 탓일까?
환상성, 혼종성, 그로테스크, 기묘함, 하층문화, 자기파괴, 동성애 등 기괴하고 불경(不敬)한 작품이
주를 이루는 21세기 한국의 미래파, 그 중 ‘스스로의 해체’를 보이는 시로 주목된 시의 하나이다.
일반과 정상이 해체된, 환상적인 상태에서의 사건들이 조리 있게 전개된다.
전복적 발상, 이야기의 극성(劇性)과 언어감각 또한 범상치 않다.
현재에 대한 부정, 기성에 대한 무화는 스스로에게 자신을 먹이는 행위로 연출된다.
분열된 자아에게 울고 있는 나를 먹이기 위해 요리를 한다.
잔혹하다.
무의식의 세계란 분열된 또 하나의 자아들이 가득한 공간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일까?
억압된 자아들이 저마다 소리를 내고 싶어 한다.
라캉의 ‘이상 자아’, 결코 실현할 수 없는 소망에 대한 하염없는 접근의 비극성을 읽을 수 있다.
‘내가 날 잘라 구워 먹고 난 달궈진 석쇠 위에는 열세 개의 꽃삽만이 꽃게처럼 익어가고 있다’니,
허무의 발로일까?
아니면 극한 자극이란 특정 문학 권력의 격식에 굴복한 것일까?
아무래도 1980년대 말부터 우리 전위시에 일각에서부터 유행해 온,
관능과 폭력과 비속화 등 엽기행각의 유사품 같기도 해서 창의성을 의심하게 된다.
시가 쓰여진 연대를 고려할 때 1990년대 전반의 한 사건을 떠올리게도 된다.
가진 자들의 횡포가 극심한 현실에 저항한다면서,
정작은 평범한 서민들을 대상으로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벌였던 세칭 지존파(至尊派),
살인 집단, 시가 그들의 자기모순성 만큼이나 조현증적인 행위를 미화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마지막 〈내가 날 잘라 구워 먹고 난 달궈진 석쇠 위에는 열세 개의 꽃삽만이 꽃게처럼 익어가고 있다〉의
‘열세 개’는 〈13인의 아해가 거리를 질주하오〉,
하다가 〈13인의 아해가 거리를 질주하지 않아도 좋소〉 하던
이상의 「오감도 제1호」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인간 사회의 위험은 물리적으로 남을 헤치는 폭력과 억압에만 있지 않다.
정신적인 사악과 불의는 높은 지능과 창의력까지 갖추고 왜곡된 미의식을 생산하고 대중을 길들인다.
이는 물리적 폭력과 억압의 논리가 되고 왜곡의 구조를 공고히 하는 악랄한 함정이 될 수 있다.
차유의 축, 차이의 비유는 도전적이고 탐구적인 언어로 창의적인 인식을 의미화, 사회화하고자 한다.
인간의 창의력을 타자들과 함께 공유하는 희망의 지혜를 내재한다.
자기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연대성을 신장하는 미적 감수성을 지킨다.
차이성을 지향하는 동시에 동일성이란 짝을 가지는,
현실에 결여된 현재의 본질과 미래적 전망을 발견하고 실천하고자 한다.
차이 나는 세계를 향한 갈망, 결핍과 허무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진정성, 삶의 체취가 배게 된다.
재빠른 복사에 급급한 경거망동이 아니라,
시라는 미디어로서의 윤리, 진정어린 창의성이란 기본윤리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체성과 책임의식이 따르는 언어는 적격과 정형에서도 자유롭지만 비주체적 방만에도 길들지 않는다.
주체적인 선택과 책임감 있는 자유는 현실적 편의성을 넘어서는 인간의 본질이리라.
차유란 삶으로부터 재현되는, 실재적 감각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경험들이다.
인간의 감정적, 창의적 능력이란 원천적으로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이 그 본질이요,
미적 감수성과 함께 실존적 감수성을 포용한다는 사회생물학적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현실적으로 무조건적인 차이도 용인되는 이유는 차유란 원칙적으로 모든 차이성에는
그 의의가 없지 않다고 일단 믿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진면목은 차별성 자체에 맹목이 되지 않고,
‘차이’와 ‘모순’과 ‘부정’이란 축이 서로 어울리고 통합적으로 작용할 때 신뢰감을 잃지 않는다.
거기에는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실재의 삶이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부드러운 말을 원했다 팔이 있어 나를 애무해 주는 말
딱딱한 내 생각의 껍질을 벗겨주는 말
상큼한 말, 먹으면 속이 시원해지는 말
식물도감에도 나와 있지 않는 말이 온 몸을 친친
감기도 하고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는다
그런가 하면 말은 이미 절반이 죽어 있다
묵은 사전을 펼쳐들고 오래 전에 죽어버린 말들을 뒤적거리며
그대는 내게 또 전화를 걸겠지
한 입 가득히 물고 있는 ‘그리움’ 때문에
‘사랑해’ 입 속에 소복한 그 씨앗들 때문에
내 안에 뿌리를 내린 숙근성 다년초
‘말’이라는 잡풀을 뽑아내고 있다
아직도 가시가 남아 있는 말
독이 들어 있는 말
화려한 말 매끄러운 말 꺼칠꺼칠한 말
내 안에 가득한 이 잡풀들
다시는 그리움이 둥지 틀 수 없도록
‘말’
‘말’
‘말’이라는 잡풀을 뽑아내고 있다
―황영선, 「‘말’이라는 잡풀」 전문
1연은
언어에 대한 본래적 소망―위로의 성장과 정화의 언어에 대한 인식,
2연은
언어를 통한 소통의 불가피성, 그 이하는 생명력을 잃은 언어의 작위성, 언어에 대한 불신감,
타락한 언어를 잡초 뽑듯 솎아 내 버리는 단호한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언어에 대한 부정 의식에 차이와 모순의 표현이 주지(主旨)의 진정성을 돋보이게 한다.
언어에 대한 불신을 주제로 하는 시가 더러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의 언어도 구체적인 삶을 바탕으로 할 때,
인간적인 이성과 감성의 울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는 시라 할 것이다.
푸코(Michel Foucault)의 계보학이나 데리다의 이른바 해체(deconstruction)도 황당한 엽기나
허무자랑을 떠받드는 게 아니다.
기존지식의 인과율에 대한 우연적이고 규칙 파괴적인 관심, 새로운 창의의 반란이었다.
아니, 반대를 위한 파괴라는 단순성에 기인하는 계보들
(이를테면 무의미라거나 미래주의, 전위주의 등등의 이데올로기화)에 대한 반란이었다 할 것이다.
시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전망이며 사물들에 대한 본질적이고 감성적인 성찰 능력이다.
이 감성은 미적인 동시에 도덕적이다.
그러므로 시의 정신적인 지경은 물질적인 사물들이 육체적 감각기관에 파악되는 것과 같은 실제적인 것이요
정신적인 것이라 해서 맹목과 독단으로 정신을 어지럽히는 사이비 종교가 아닌 것이다.
‘시의 윤리’를 들먹인다 해서 강제적 금기사항을 두고자 하는 말은 물론 아니다.
현실의 모잡한 논리와 전략적 실천들을 목도할 때 최소한의 자율적 윤리는 권함직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 ‘차이 나는 시 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에서 옮겨 적음. (2024. 4. 24.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39) 차이의 비유, 차유(差喩) - ⑤ 차유의 윤리 2-1/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