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소묘素描
김부원
사늘해진 햇볕 아래 바람까지 드맑은데
아직도 곱디고운 샘보洑 아래 여울 소리
가만히
냇둑에 올라
해를 안고 누워 본다
가직한* 둔치 위에 갓털 같은 갈대들
지난 여름 분주했던 개개비의 빈 둥지
비릿한
물이끼 냄새
벗어버린 기억들
가로눕는 갈대위로 내려앉는 햇살처럼
담배 냄새 은은하게 다가오는 환영幻影들
아버지
아, 내 아버지
쏟아지는 그리움아
* 가직한 : 거리가 조금 가까운
다른 소원 또 없니?
- 보탑사 와불
김부원
보련산寶蓮山 연봉에서 내려온 재넘이*가
법당 안 수박들을 맛들이는* 가운데
노오란 소원지所願紙 하나 한 소녀가 걸어 놨다
그것을 읽고 지난 바람에게 물으니
남자친구 살 빠지게 해달라는 것이라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만만찮은 소원이다
열 가지 소원 중에 하나만 안 되어도
속 좁은 사람들은 발걸음도 안 하는데
딱 하나 적어 놓은 걸 모른 척 할 순 없고
이런 저런 고민에 잠까지 설치시다
반쯤 잠긴 눈으로 가로젓고 누우시며
아가야, 나도 그게 좀… 다른 소원 또 없니?
* 재넘이 : 밤에 산꼭대기에서 평지로 부는 바람
*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에 있는 보탑사에는 대웅전에 하짓날에 바친 수박을 계속 진설해 놓으면 동지
때 까지도 수박이 보전되고, 그 수박을 먹으면 무병장수한다 하여 동짓날이면 수박 한 쪽 얻어 먹으려고 긴 줄이 선다.
- 김부원 시조집 『품개자리』 2022. 뒷목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