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40) 차이의 비유, 차유(差喩) - ⑤ 차유의 윤리 2-2/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
차이의 비유, 차유(差喩)
Daum카페/ 시창작강의 - (539) 차이의 비유, 차유(差喩) - ⑤ 차유의 윤리 2-1
⑤ 차유의 윤리 2-2
특정의 ‘벅찬 감격’을 표현한다고 하자.
그 표현은 ‘감격=즐거움=웃음’의 격식에 따라 누구에게나 동일화하는 것을 목표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감격은 웃는 행위뿐 아니라 엉엉 울게 할 수도 있고,
말문이 막혀 침묵하게 할 수도 있다.
진정성 있는 표현에서는 신음할 수도 있고,
분노할 수도 있고, 증오감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특정의 ‘벅찬 감격’, 동일한 상황에서도 천차만별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 시적 언어이다.
각자 다른 상황의 감격 앞이라면 더욱 그럴 게 뻔한 이치.
이 차이 나는 정황을 차이 그 자체에 함몰당하지 않고 언어적으로 구현하는 데에는
차유라는 중추적 표현이 따른다.
텍스트 안팎의 사건과 정황을 통해 특정 감격의 순간을 그에 부합하는 진정성 있는 맥락으로
구축해내는 것이 차유의 윤리라 할 것이다.
하나의 랑그에 무수한 파롤이 존재하는 건 언어학의 추상적인 논리들 때문이 아니라
텍스트 안팎의 실재적 상황의 차이 때문이다.
차이 나는 맥락과 현재적 상황, 메시지의 남다름은 그래서 인간적인 폭과 너비를 주고
사회·역사와 연동하는 역동적인 감동을 준다 할 것이다.
차유의 세 축은 모더니즘 성향의 시뿐 아니라 서정시에서도 효과적인 성과를 거둔다.
성공한 서정시라면 당연히 차유의 언어가 깊이 개입한다 할 수 있다.
안마당을 두드리고 소나기 지나가자 놀란 지렁이 몇 마리 서둘러 기어간다 방금 알을 낳은 암탉이 성큼성큼 뛰어와 지렁이를 삼키고선 연필 다듬듯 부리를 문지른다
천둥 번개에 비틀거리던 하늘이 그 부리 끝을 중심으로 수평을 잡는다 개구리 한 마리 안마당에 패대기친 수탉이 활개 치며 울어제끼자 울 밑 봉숭아며 물앵두 이파리가 빗방울을 내려놓는다 병아리들이 엄마 아빠 섞어 부르며 키질 위 메주콩처럼 몰려다닌다
모낸 무논의 물살이 파르라니 떨린다 온몸에 초록 침을 맞은 하늘이 파랗게 질려 있다 침 놓은 자리로 엄살엄살 구름 몇이 다가간다. 개구리 똥꼬가 알을 낳느라고 참 잔지러웠겠다 암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논 쪽을 내다본다
―이정록, 「비 그친 뒤」 전문
21세기 도시적 시각에서 보면 무척이나 이질적이라 할 서정이고 언어들이다.
그런데도 시를 읽으면 ‘암탉이 지렁이를 삼키고는 연필 다듬듯 부리를 문지른다’,
‘개구리 한 마리 잡아 마당에서 패대기치는 수탉’, ‘키질 위 매주콩처럼 몰려다니는 병아리떼’,
‘온몸에 모의 초록 침을 맞아 파랗게 질린 하늘’, ‘알 낳느라 똥꼬가 간지러웠을 개구리’ 등등
정황을 떠올리며 처음인 듯하면서도 낮익은 정취에 신기로움과 편안함을 함께 느끼게 된다.
현재적 도시문명을 거부하고 동식물은 물론,
개념어까지 물활론적으로 함께 어울리는 생명의 마당을 열고 있는 것이다.
이 차이 나는 마당을 차이성과 동일성의 비유가 통합적으로 빚어내고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인식하고 판단하지는 못한다.
시적 대상이나 감각도 주관적 인식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므로
인식과 판단은 실제 대상이나 세계와 다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이 세계를 내면화, 주관화 하는 시의 긴장과 풍요로움을 담보하는 차유의 기점이다.
시인의 예지력은 개인적 자질일 뿐 아니라 형이상의 선험적 인식과 사회·역사적 상상 등
제반 요소들의 종합적 작용이다.
그래서 총체적이고 변별적이며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이다.
재빠른 복사나 모방은 당연히 창작이 아니다.
이따위들은 오히려 표절(剽竊)의 의심을 불러내게 될 뿐이다.
복사 문학이 집단화하여 전략적으로 문학권력을 키우기나 한다면,
시 양식 고유의 내면 정화의 기능, 유기적 사회를 향한 꿈, 단독자인 동시에 공동체인 생명성,
이 모두를 배반하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성과 감성이라는 인간의 두 능력 사이에도 궁극적으로 단절이 없다.
통합적 생명이야말로 정신적인 삶을 발전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조화로운 실재의 세계로 이끌게 된다.
시란 다다를 수 없는 무(無)을 향한 길이라지만 무에 그치지 않는다.
무 또한 허무의 인식은 현재에 대해 차이 나는 세계를 향한 과정일 뿐 그 자체가 복제되고
답습되는 목표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언어와 시인과 독자, 사회·역사의 상호작용에 의한 무는 ‘무(無)의 실재’로 실존한다.
‘무의 실재’는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시공을 지향하되
개인적 사회적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 성립한다.
모든 실재는 최소한 이미지, 리듬 등 어디에서라도 차이 나는 진정성, 창의성을 보이는 데서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무의 무’, ‘무의 유희’ 등 기능주의적 언어파들이 추상적인 모방유희를 복사하여,
생명권과 인권을 억누른다든지 패권주의 내지 상업주의적 기득권에 편승하는 태도는 지양(止揚)해야 한다.
무는 무를 넘어 자유로운 타자들과의 주체적 공동체를 이루는 열망일 때 그 실재의 의의를 갖는다 할 수 있다.
차유론이 담고 있는 사유의 원천이다.
차유란 그러므로, 무의미성, 해체성, 유희성 따위에 전적으로 동조하지는 않는다.
인간인 이상, 누구도 개인의 삶과 세계의 삶을 다 이해하고 실천할 수는 없다.
가상과 본질의 대립구도는 영원한 과제이고 이 과제는 시인의 진정성과 창의력을 차이 나는
시공으로 이끄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계적 복사와 금수(禽獸)의 욕망, 둘 다 일정 의미 생산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들 독선의 주체는 애초 생명적 연대를 무너뜨리는 인간 이탈의 행위이다.
세계를 주체의 그릇에 담고, 시시때때 ‘지금 여기’를 비판하고 넘어서는 의지에서 생성될 때
차유는 창의력을 발휘하고 감동을 일으킨다.
이는 모든 예술행위가 가치평가를 위한 한 기본 안이 될 수도 있다.
창작을 인간미 공유의 차원으로, 자연의 전망을 끌어올리고,
문학을 분석의 대상에서 감상의 대상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를 마르쿠제(Marcuse)가 말하는 일차원적 인간(현대 산업사회가 낳은 다양성 없는 단조로운 인간)에서 열린 인간, 입체적 인간으로 이끄는 지렛대가 여기에 있다 할 수도 있다.
시란 형형색색의 직물들과 현재에서 미지를 오가는 그때그때의 정신들을 재료로 짜여진 천과도 같다.
그 속에는 언어로, 논리로 닿을 수 없는 색과 향이 있게 된다.
조나단 컬러는 그의 『문학이론』에서,
은유·환유·제유·아이러니 등 네 가지 수사법들을 우리가 이용하는
경험하는 기본적인 수사학의 구조로 정리된다고 하고,
이들에 의해 엄청나게 다양한 텍스트의 의미가 생산되고 의미의 토대가 되는 언어 구조를 이룬다고 한 바,
차유는 이들 중 근대 시학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거나
별개의 문예상의 표현법으로나 취급되어온 아이러니 외 여러 언술 양식,
해체와 부정의 언어표현까지 포용하면서
은유·환유, 제유 등 모든 비유를 성립시키는 기반의 한 축이 된다는 관점에 있는 것이다.
차유는 인간의 삶의 한 양식이자 창의력의 가늠자이다.
창의적인 인간의 삶―그 속에는 필요조건으로서의 폭력성도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 폭력성이 수성(獸性)에 치우친 유희라면,
그것은 인간의 탈을 빈 살상(시의 경우라면 언어적 살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개인성 외에도 개인과 동일화할 수만은 없는 타자에 대한
애틋함, 질투심, 존중감 등등 자기만의 유희를 넘어서는 타자지향성,
이타적 감정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의식의 확장, 창의적 상상의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차유는 새로운 경험의 다양한 탐색이기도 하고 새로운 삶의 포옹이기도 하다.
작은 내(川)가 모여 강을 이루고 강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시인과 독자라는 냇강은 함께 시라는 바다에서 새롭게 만나게 된다.
그 바다에서는 온갖 모습과 차원과 의의가 어우러질 것이다.
< ‘차이 나는 시 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에서 옮겨 적음. (2024. 4.27.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40) 차이의 비유, 차유(差喩) - ⑤ 차유의 윤리 2-2/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