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요한복음 6장)
가정(假定) 하나
이런 가정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시대에 살면서 그분이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보고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다면, 믿음이 생겨나기에 훨씬 수월하고 신앙적인 수혜를 풍성히 입을 수 있겠으리라는 추측입니다. 예수의 이적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 예수의 육성(肉聲)으로 말씀을 듣는다면, 의심을 넘어 이해가 깊어지고, 불신을 극복하여 확신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기대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의 이적을 대표하는 오병이어의 급식(1-15절)과 바다 위를 걸으시는 표적(16-21절)이 펼쳐지고, 이어 대중을 상대로 한 가장 길고도 공들인 예수의 담론(22-59절)이 뒤따릅니다. 수천 명 이상의 많은 무리가 예수의 놀라운 기사(奇事)를 경험하고, 최고의 설교를 들은 셈입니다. 그리고 그 이적과 설교가 가져온 성과가 무엇인지, 오늘 본문(6:60-67)이 보여줍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를 찾아온 많은 무리(22, 24절)와 유대인들(41, 52절)은 물론, 예수와 함께 다니던 제자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를 떠나버렸다(66절)는 것이 결과입니다. 예수를 직접 경험하면 신앙적으로 더할 나위 없는 긍정적 유익이 있으리라는 예상이 빗나가는 순간입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절)
예수의 긴 설교를 들은 이들은 ‘무리’와 ‘유대인’과 ‘제자들’입니다. 무리는 예수께 “빵”을 구하는 이들입니다(26, 34절).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 수군거리고(불평하고, 41절) 다툽니다(52절).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은 “말씀이 어렵다(sklelos, hard)”고 수군거립니다. 제자들은 믿지 않고(64절), 배신하고(64절), 더이상 예수와 함께하지 않기로 마음먹습니다(66절). 최대 규모의 최고 이적이 실행되고, 가장 공들인 중요한 담론을 설파한 결과가, 어이없게도, 상당수 제자를 포함하여 모든 군중이 예수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떠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 실망해서입니다. 실망하는 것은 기대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이 없다면 실망하지도 않지요. 예수를 찾아온 군중은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인정하고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 할 정도로 열망이 있었던 이들입니다(6:14-15). 그러나 자신들의 요구와 기대가 채워지지 않자 낙담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예수는 아무도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이 대목이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 실망했다고 복음서들은 명백히 말합니다. 보수주의자와 기득권자(사두개인, 제사장, 장로)뿐만 아니라, 진보주의자들(서기관, 바리새인, 열심당)도 예수께 실망했습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경건하고 독실한 어떤 부자가 예수께 찾아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지’ 묻습니다(마19:16 이하). 질문과 대답이 여러 차례 오간 뒤, 마침내 예수께서는 그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러자 예수의 말씀을 들은 부자는 근심된 낯빛을 띠고 돌아갑니다. 그는 왜 실망하고 돌아간 것일까요? 예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한 탓일까요? 아니면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탓일까요?
“(예수의) 말씀이 어렵다”는 반응은, 난해해서(difficult)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에 걸려(61절) 받아들이기 어렵다(hard)’는 얘기입니다. 예수의 말씀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skandalizo)”는 것이지요. 즉, 예수의 말씀이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아 동의할 수 없다는, 반대 의사 표명인 셈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속뜻을 예수께서는 간파하십니다. 그래서 “내 말이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었구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51절)’이라는 말씀이나,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살 것이다(56절)’는 말씀만이 걸림돌인 것은 아닙니다. 걸려 넘어질 만큼 듣기 힘든 예수의 말씀들은 허다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치는 이에게 왼뺨을 돌려대라;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나는 칼을 주러 왔다 등등이 그렇습니다. 이 말씀들이 어려운 이유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말씀이 나를 고민스럽게 만들고 끝내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탓입니다.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62절)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이 사태를 수습하고 떠나가는 이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예수께서는 무슨 일을 하셔야 할까요? 수천수만을 먹이는 급식 이적을 다시 보여주어야 할까요? 하신 말씀 중 사람들이 못마땅히 여기는 부분을 수정해야 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한들 소용없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하늘)으로 올라가는 영광을 (너희가) 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어떻게 하겠느냐)?”는 되물음 속에 이런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앞에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으니, “인자(예수)가 이전에 있던 곳”은 “하늘”을 가리킵니다.
변화산으로 알려진 높은 산에 올라가 눈부신 예수의 변모를 본 세 제자가 있었다고 복음서들은 전합니다(마17:1-8 등). 그들이 본 것은 둘도 없는 천상의 영광이었지만 그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후로도 그들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다투며 예수를 배신하여 도망합니다. 놀라운 기적이나 영광은 구름이나 천둥과 같습니다. 눈과 귀가 거기에 머물면 예수의 참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바로 보게 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이끄는 것은 예수의 말씀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63절)
바울과는 달리, 요한복음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지 않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영과 육을 구분하는 일차적 기준은 ‘눈에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였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표적이나 병자를 고치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은, 보이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무리가 원하는 “떡”(34절)과 같이 육적(肉的)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표적을 보여주신들, 그 표적은 다 육적입니다.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은 ‘육이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본질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영적이란 보이는 것 뒤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무엇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육신 속에 존재하는 생기가 영적(靈的)입니다. 생명 존재에게 육신이 필요하지만, 영(생기)이 없는 육신은 흙덩이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육은 본질이 아닙니다(무익합니다). “예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진리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예수의 이적에 대한 본질입니다. 이 영적 진리를 외면하고 보이는 표적의 떡(육)을 추구하는 것은 생명의 사건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는) 육신이 되신 말씀”(1:14)는 선언은, 양식이신 예수의 본질은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내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3절)
요한복음 서문에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하나님 자신이며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밝힙니다(1:1-4).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그가 예수시라고 알려집니다(1:14). 그 말씀은 보이지 않기에 영적이며, 그 보이지 않는 말씀은 생명을 주는 말씀인데, 그가 예수라는 선언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은 이 선언의 반복입니다. 이를 거꾸로 되짚어가면, 우리는 육신인 예수를 받아들임(먹음)으로써 영원한 말씀을 먹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된다’(8:31)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심을 통하여 그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의 살을 먹음은 고기를 먹는 현상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우리가 먹는 그것은 단순히 동물이나 식물의 육질(肉質)이 아니라, 양식이 된 생명체가 가진 생명입니다. 예수를 먹는다는 것 역시도, 예수의 육신을 먹음을 넘어, 그 육신의 본질인 생명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생명을 먹은 사람은 예수의 생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려느냐? (67절)
이 시점에서, 예수와 함께 다니던 제자 중 많은 이들이 예수를 떠나갑니다. 그들은 한때 예수와 같이 다닌 이들이고, 오병이어 표적 이후에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를 특별히 목도했던 이들입니다((16-21절). 무리와는 따로 예수와 특별히 동행하던 이들입니다(22절). 그 제자 중 많은 이들이 예수와 결별하는 와중에 열두 명의 제자가 언급됩니다. 이 열둘은, 수많은 사람이 예수에게 낙담하여 떠나는 상황에서, 예수를 떠나지 않고 남은 소수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열두 제자는 단 두 군데서만 언급됩니다(20:24 포함). 공관복음서는 공통으로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세우셨다고 기록하면서 열두 제자의 이름을 적시합니다(마10:1-4; 막3:13-19; 눅6:12-16). 공관복음서에 열두 제자가 언급되는 배경은, 유대 마을들에 복음을 전하고자 파송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많은 제자가 떠나는 상황에서 예수를 떠나지 않은 이들이 열두 제자라고 알려집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68절)
열두 제자가 예수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베드로의 입으로 밝혀됩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고 알았습니다”는 베드로의 고백은, 공관복음서의 베드로의 고백을 대신합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말씀이시라는 믿음이 그들이 예수와 함께 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떠나는 제자들은 모두 “이 말씀이 어렵다”고 불평하며 떠나가지만, 남는 제자들은 그 말씀이 영생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믿음과 연결됩니다(69절).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된다”(8:31)고 말씀하십니다. 제자가 됨의 여부는 헌신의 결단과 충성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했던 무리는 많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왕인 예수에게 헌신하고 충성할 의지도 충분했습니다만, 제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와 그가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제자란 결국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와 함께 거하는 이들입니다. 그 제자들을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들”로 여기십니다(65절; 17:2, 6).
예수를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그 말씀이 걸림돌(61절)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은 사람들을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족하지 않도록 붙잡아주기 위함입니다(16:1). 생명의 약속이 어떤 이들에게는 사망의 선고처럼 두렵게 느껴지고, 빛을 등지고 선 이들에게는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만 짙게 보일 뿐입니다. 예수로부터 버림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예수를 버릴 따름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두를, 유다까지도(6:71), 받아들이시고 생명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를 거절하고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기대로 가득한 이들이 예수께 실망하고 떠나갑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가 생명의 말씀이심을 믿고 떠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