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41)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써라 ― ① 새로운 언어, 새로운 인식, 새로운 감동/ 시인 안도현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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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새로운 언어, 새로운 인식, 새로운 감동
좋은 시란 어떤 시를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모든 시는 그 낡은 기준에 갇혀버리는 나쁜 운명을 맞게 된다.
시가 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양식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감히 정리해 본다면 어렴풋하게나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새로운 언어로 표현된 시.
둘째, 새로운 인식을 도출하는 시.
셋째, 새로운 감동을 주는 시.
여기에다 시인의 시작 태도가 공자의 말씀대로 ‘사무사(思無邪)’ 바로 그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감동은 일차적으로 시인과 독자와의 교감, 즉 소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모든 시가 다 울림을 갖는 것은 아니다.
허망한 소통보다는 고독한 단절이 오히려 행복하게 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시를 보는 미학적 관점과 언어에 대한 경험이 자연스럽게 일치할 때 시적 감동은 증폭될 것이다.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리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 무늬로 뒤덮인다
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박형준, 「춤」, 『춤』(창비, 2005, 10~11쪽)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 연습을 한다”는
문장이 제목 밑에 붙어 있는 시다.
이 문장은 시의 본문으로 독자를 안내하는 구실을 한다.
그런데 본문에 쓰인 언어를 보면 ‘고독’ ‘전율’ ‘괘감’과 같은 관념어들이 여과되지 않고 돌출해 있다.
그럼에도 관념어들은 그 빛을 잃지 않고 신기하게도 요소요소에 알맞게 자리잡고 있다.
어린 송골매의 고독과 전율과 쾌감이 독자에게 전이되는 까닭이다.
그 전이는 벼랑과 허공이라는 절대적 공간의 설정,
상황의 긴장감, 언어의 절제미가 서로 어울리면서 이루어진다.
언어란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인 가교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훼방꾼이기도 하다.
저 유서 깊은 ‘낯설게 하기’는 그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자 할 때 여전히 유효한 시적 방법이다.
독자를 편하게도 하고 불편하게도 하는 시,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인 시, 바른가 싶으면 이미 비뚤어져 있는 시…….
좋은 시를 쓰고 싶다면 당신은 표현의 리얼리티 속에서
감동의 요소를 찾으려고 끙끙대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일차적으로 당신은 가장 물기 많은 말, 가장 적합한 어휘를 행간에 배치하기 위해 헤매야 한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언어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만날 때까지 찾고,
지우고, 넣고, 비틀고, 쥐어짜고, 흔들기를 마다하지 마라.
적어도 당신 하나쯤은 감동시킬 때까지 언어하고 치고받고 싸워라.
완벽한 세계관도 정돈된 문학적 관점이 훌륭한 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와 사투를 벌리는 동안 하나씩 껍데기를 벗고 성장하는 존재이다.
황지우는 “나는 시를 쓸 때, 시를 추구하지 않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바꿔 말해서 비시(非詩)에 낮은 포복으로 접근한다.
‘시적인 것’은 ‘어느 때나, 어디에도’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때그때 시를 쓰고 읽는 사람들이 ‘시적인 것’의 자격을 부여하는 행위를 통해
‘시적인 것’의 틀이 생기며 이 틀에 준해서 사람들은 시를 쓰고,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가한다”라고 했다.
(황지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한마당, 1986, 13~17쪽)
이 말은 이미 ‘시’로 규정된 모든 규격화된 정의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과 시를 갱신해 나가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시라는 규범의 틀에 갇히는 순간, 시는 이미 시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시적인 것’은 딱히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 모험과 도전을 요구하는 지침으로 이해해야 한다.
‘시적인 것’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손에 잡는 순간 또 달아나버리는 도마뱀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일찍이 간파한 고은 시인은 ‘시는 심장의 뉴스’라는 멋들어진 화두를 토하기도 했다.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4. 4.30.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41)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써라 ― ① 새로운 언어, 새로운 인식, 새로운 감동/ 시인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