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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명, 사람의 계명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장)
경계를 짓다, 정체성을 세우다
“우리”라는 말을 하려면, “우리”와 “우리가 아닌 이들”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한국인”이라고 범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한국인과 한국인이 아닌 이들을 구분하는 경계가 있어야 합니다. 구분이란 경계를 긋는 일이고, 혈통, 지연, 국적, 인종, 성별, 계층, 학벌, 이데올로기, 종교 등 다양한 조건들이 경계의 기준이 됩니다. 경계가 없는 개인, 집단,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나 교회도 역시 자신만의 특정한 울타리를 가지고 자신과 남을 구분합니다.
경계는 자의식(自意識) 곧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껍질을 깨뜨리면 달걀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함부로 경계를 허문다면 내가 사라지고, 구분을 무시하면 정체성이 무너집니다. 경계는 껍질과 같아서, 내부(나, 우리)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까닭에, 경계를 지어 안과 밖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내부에 있는 것이 소중하다면, 그것을 잘 지켜내기 위한 분별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자기 이해 – 거룩한 백성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언이 유대인들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범주 안에 들기 위한 조건에는 유대인(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이 중요하지만, 본질상 “거룩함”이라는 기준이 결정적 조건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 혈통이라 해도 거룩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백성에 들 수 없고,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거룩한 자(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일차적인 정의는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첫 번째 속성인데, 모든 피조된 존재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함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서 일차적으로 드러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인 제물은 반드시 거룩해야 하는데, 제물의 거룩함은 “흠 없음”을 속성으로 합니다. 이 개념을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확대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백성)로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어야 하며, 그 거룩함은 제물처럼 “흠 없음”을 조건으로 요구합니다. “흠 없음”이란 ‘정결’과 같은 말이면서 “죄 없음”과 동일한 의미로서, “의인(義人)”을 일컫습니다. 거룩한 이스라엘은 곧 “의인 공동체”이며, “죄인”은 절대로 이 공동체(모임)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시편 1:5).
거룩함의 길 – 율법을 지키다
“흠 없는”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부정함을 피해야 합니다. 시편 1편이 특정하는 대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를 멀리함이 의인의 길입니다. 그 외에도 온갖 더러운 존재와 사물과도 접촉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이런 삶을 가르치고, 의인은 그 율법을 묵상하고 지키는 삶을 삶을 목표로 삼습니다. 예수 시대에 이런 식의 완전한 율법 준수에 앞장선 이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유대 사회에서 부정한 존재들을 제거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음식이 저절로 상하는 것처럼, 아무리 애써도, 알지 못하는 실수나 오염을 피할 수는 없지요. 더러운 모든 것을 멀리하고 죄에서 벗어나 율법을 성실히 따르는 의인에게도 어쩔 수 없이 흠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런 흠결을 해결하기 위해 정결의식(淨潔儀式)이 필요합니다. 정결 의식이란 말 그대로 “씻음”의 예식입니다. 실제로 율법의 상당 부분이 “정결례”에 관한 가르침에 할당됩니다. 제사와 예배가 결국 “씻음”, 즉 흠 없는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속죄(贖罪) 의례(儀禮)를 표방하게 되는 것은 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가? (1-5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중 몇이 예수께 던지는 비판은 정결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행위가 문제가 되는 상황은 위생상의 이유가 아닙니다. 씻지 않은 손은 “부정한 손”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는 정결례를 준수하지 않은 율법적 죄를 명시하는 표현입니다. 가나의 결혼 잔치에 등장하는 여섯 개 물항아리는 정결 예식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음에서 보듯이(2:6), 음식을 먹기 전에 손 씻음은 거룩한 이들의 의무적 의식이었습니다.
‘손을 씻는 전통’(3절)은 원래 제사장들에게 요구되었던 사항이었습니다.
“18 너는 물두멍과 그 받침을 놋쇠로 만들어서, 씻는 데 쓰게 하여라. 너는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놓고, 거기에 물을 담아라. 19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물로 그들의 손과 발을 씻을 것이다.”(출30장)
유대 사회의 장로(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포함)들은 이 제사장의 규정을 이스라엘 전체에 적용하여, 거룩한 백성 모두가 지켜야 할 전통으로 삼았으며, 이스라엘은 ‘제사장 민족’이라는 취지에서 비롯된 조치였습니다. 이 전통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과 동등한 무게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잃은 자로 취급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는 것(2절)은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사건이 됩니다. 그것은 거룩함을 훼손하는 불결(不潔)이요, 하나님의 백성(유대인)임을 부정(否定)하는 작태입니다. 손 씻기만이 아니라, 잔과 그릇 씻기(설거지가 아니라 정결의식)까지도 엄수할 정도로 전통에 충실한(3,4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서는 이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5절).
너희 외식하는 자 (6절)
예수께서는 거룩한 전통 준수를 주창하는 이 비판자들을 “외식하는 자(u`pokrith,j)”에 비견하십니다(6절). 외식(外飾)은 겉을 꾸민다는 말인데, 우리는 종종 ‘말과 행동이 다름’이라고 잘못 이해합니다. 예수 당시, 유대 사회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들을 찾는다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율법을 연구하고 옳은 말을 하며 말한 바를 지키는 자들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들이 손 씻기에 철저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할 줄 알고, 경배할 줄도 알며, 계명과 교훈을 가르칠 정도로 모범적입니다(6-7절). 그들은 의인처럼 거룩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이들로 검증된 자들입니다. 예수께서도 그들의 말과 행동과 교훈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6절). 마음은 거룩한 하나님에게서 먼 데, 말과 행동이 거룩하니 “외식하는 자”입니다. ‘외식하는 자(pretender)’는, 고대 헬라 사회에서, 무대에 선 배우를 지칭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아닌 타인의 역할을 감쪽같이 연기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의인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의 마음(본성)은 하나님에게서 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8절)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거룩해야 한다”는 말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너희는 거룩해야 한다”는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출발점과 지향을 지닙니다. 전자는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전제하는 반면, 후자는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사람 스스로 획득한다는 가정 위에 성립합니다. 전자가 하나님의 계명이라면 후자는 사람의 계명입니다(8절). 방향이 다른 까닭에, 성실하게 거룩함의 길을 가면 갈수록 멀어집니다. 거룩함을 위한 온갖 전통을 충실히 지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이유입니다.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는 떡을 먹을 수 없다”는 규정은, ‘부정한(불의한) 자는 떡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앞 장(6장)의 “오병이어 이적”(6:30-44)이 보여주는 “떡(artos)”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대표합니다. 그 떡은 자격을 따지지 않고, 의인과 죄인을 가리지 않고, 손 씻은 사람과 씻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오천 명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 즉 사랑입니다. 복음서들은 “가장 큰 계명”에 관하여 대화하는 율법학자와 예수의 그림을 보여줍니다(마22:33-40, 막12:28-34; 눅10::25-28). 이 토론은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결론으로 완전히 합의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계명은 “손을 씻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변질됩니다.
무엇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가 (16-23절)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은 그 거룩함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함으로써 마음이 거룩해진 이들이 거룩한 일을 하게 됩니다. 거룩한 행동이나 의식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착한 사람이 착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지, 착한 일을 한다고 착해지는 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거룩함이란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형상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차지할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거룩한(혹은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이미 마음이 거룩함에서 멀어진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은 거룩한 일(의식)을 행함으로써 거룩해지고, 부정한 것들을 멀리함으로써 거룩해진다고 이해합니다. 이런 노력을 통하여 거룩해진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15절). 그들이 보기에는 손을 씻지 않은 자들은 거룩하지 않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인 떡을 먹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계명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마저도 통제하려 합니다. 그러한 이들이 철두철미 경건한 행동을 한들, 경건한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거룩함이나 부정함의 원인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있지 않고(15절),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21-23절)는 뜻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마음(속)이 더러움의 원인인 것입니다(16절).
예수께서는 손을 씻는 유대인의 전통을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씻음은 예수께서도 받아들이신 전통이고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성례인 세례로 계승되었습니다. “씻다”는 동사인 “밥티조(baptizo)”는 “세례(뱁티즘, baptism)”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세례(洗禮)나 회개는 여전히 중요한 전통입니다. 다만, 그 전통의 뿌리가 되는 진정한 하나님의 계명인 사랑이 간과되는 상황이 문제가 됩니다(7절). 말하자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정죄하고 차별하는 상황이 그렇습니다. 사랑이 최고의 율법이요 완성이고 할 때, 사랑의 계명을 외면하면서 지켜내고자 하는 그 어떤 전통이나 의식이나 헌신도 소용이 없습니다(고전 13장). 오늘날의 교회가 거룩함을 상실했다는 의미는 거룩한 전통들을 따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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