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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가 넘치나이다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마가복음 7장)
“개”에 대한 이해
오늘날에는 개들이 반려동물로 인식되어 가족처럼 집안에서 함께 지내면서 사람이 먹는 음식만큼이나 좋은 사료를 먹습니다만, 이는 수십 년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었던 풍경입니다. 개는 원래 늑대 과에 속하는 짐승으로서, 언젠가부터 사람에게 길들어져 가축이 되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들개로서 늑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예수 시대인 일 세기에는 개를 애완동물로 취급하는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개들을 조심하라”(빌3:2)는 바울의 권고가 “개”를 바라보는 성서의 시각을 대변합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시22:16); “(나를) 개에게서 구하소서”(시22:20); “그들은 저녁만 되면 되돌아와서 개처럼 짖어댑니다”(시59:6)는 시편의 구절들에서 개는 악인 혹은 원수입니다. 신명기 23:18에서는 “남자 매춘부”를 개로 취급하고, 계시록 22:15은 개를 “점술가”, “음행하는 자”, “우상숭배자”와 같은 반열에 놓습니다. 여기서 공통점은 사람이 개에게 비유된다는 점이고, 그 사람은 “더러운 존재”, 즉 상종치 말아야 할 죄인입니다. 결정적으로 예수의 어록 가운데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마7:6)는 말씀이 있습니다.
“개”로 불린 수로보니게 여자
예수께서는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고대 페니키아를 대표하는 두 도시(두로와 시돈) 중 하나인데, 페니키아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그리스(헬라) 권역에 복속되었고, 후에 로마의 속주인 수리아로 편입됩니다. 말하자면, 두로는 지중해에 접한 이방인의 도시로서, 유대인이 특별한 목적 없이 갈 곳은 아닙니다. 본문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방문을 숨기셨다고 알려집니다.
하지만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께 와서 간청하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일차적 요소들이 언급됩니다. 헬라인이라는 언급은 이 여인이 이방인임을 적시하는 것이요, ‘수리아’와 ‘페니키아’를 조합한 명칭인 수로보니게(26절)라는 지명은 이 여인이 부정한 땅에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곧, 이 여인은 완전한 이방인이며 부정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수식들입니다.
이 여인을 판단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그녀의 행동에 있습니다. 이 여인은 엄격한 금기를 깨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 여자는 공개적으로 남자와 말을 섞을 수 없다는 금기를 이 여인이 무시합니다. 그런 금기를 깨는 여자는 창녀로 취급되거나, 위자료 없이 버려지도록 용인되었습니다. 이러한 여자의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린 상황은 부정한 어미의 죄로 인한 당연한 결과라고 손가락질받을 만했습니다. 이런 요건들은 수로보니게 여자가 ‘개’로 불리게 되는 요인으로 두루 작용하고, 유대인이라면 이 이방 여인을 그렇게 부르며 멀리해야 마땅합니다.
자녀를 배불릴 떡 (27절)
예수께 딸을 고쳐달라는 요청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여러 용어가 있지만, 복음서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단어는 “빵(artos, 양식, 떡)”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여인의 딸을 고치는 것을 “떡을 주는 일”로 보십니다. 마가복음 6-8장에는 떡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과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고(6:30-44),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제자들로 인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7:1-23). 그리고 오늘의 본문을 지나 8장에서는, 사천 명에게 떡을 먹이시는 이적이 전개되고(1-10절), 떡을 소재로 한 교훈이 주어집니다(14-21절).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백성에게 국한된다고 한정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떡은 “먼저 자녀들을 배부르게 할 자녀의 떡”(27절)이라고 제한됩니다. 그래서 부정한 이들과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유대인의 원칙입니다. 이는 “부정한 손으로는 떡을 먹을 수 없다”(7:3, 5)는 정결 논쟁의 쟁점이기도 합니다. “먼저 자녀를 배불리 먹게 해야 한다”(27절)는 예수의 말씀은 ‘이스라엘(유대인)을 먼저 충분히 제공하고 나서 남는다면 이방인에게 줄 수도 있다’는 입장으로 이해될 여지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마15:24)는 말씀으로 치환됩니다.
자녀의 떡을 개에게 줄 수 없다 (27절)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이 자녀라면,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부정한 이방인은 개로 취급됩니다. 이는 유대인에게는 마땅한 상식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우리는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당황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이방 여인을 ‘개’라고 칭하는 예수의 말씀은, 예수의 진심이었기보다는, 당시 유대 사회의 인식과 통례를 대변하는 언사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앞서 언급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마7:6)는 예수의 말씀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유대인들로 형성된 최초의 교회(예루살렘 교회)는 이러한 유대교의 입장을 공유했습니다. 초기 교회 역사인 사도행전은, 복음(은혜)을 이방인들에게 나누는 일에 얼마나 격렬한 반대가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자녀의 떡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주장은, 사실 예수의 의도가 아니라, 교회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시대에 기록된 복음서들은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오늘의 본문이 그 한 예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비롯한 최초의 교회들이 이방인에 대한 차별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만이 아니지요. 역사적으로, 교회는 거룩함을 명분으로 혐오와 배타적 태도를 지속 강화해 왔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 힘을 가지게 된 때, 기독교는 교회 밖에 있는 특정한 이들을 차별하는 언행을 정당화해 왔습니다. 부정한 이방인 여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불가한 동시에 부당하다는 견해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팽배합니다.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8절)
예수의 발언은 명백히 모욕적입니다. 그런데 이 발언을 들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옵니다. 이 답변으로 여인은 자신이 빵을 얻을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냅니다. 그 자격은 ‘나는 개가 아니다’는 식의 항변으로 획득되지 않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개라는 사실을 시인하면서, ‘개의 권리’에 대해 말합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을 권리가 개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의인이든 죄인이든)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모두 다 배불리 먹이셨지요(막6:41-42). 그러고도 열두 바구니의 부스러기가 남았습니다. 부스러기란 남는 찌꺼기가 아니라, 모두의 필요를 다 채우고도 남는 하나님 은혜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개조차 다 먹인다 해도 줄어들거나 모자라지 않는 하나님 은혜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실상 여인이 주장하는 것은 ‘개의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입니다. 그 풍성함으로 인해, 자녀들에게만이 아니라, 개들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놀라운 통찰입니다. 개들이라 할지라도 외면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여인은 자신을 향한 개라는 모욕을 용납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가리지 않고 자비를 베푸신다는 뜻밖의 진실이 개로 취급되는 여인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 네 딸이 나았다 (29절)
이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해 온 유대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이방 여인의 충격적인 믿음입니다. 소위 부정한 이방인에게 주어질 하나님이 은혜는 없다는 전통적 판단은 틀렸음이 밝혀집니다. 예수 자신이 여인의 말을 인정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15:28)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여인의 대답을 극찬하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나았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표적인,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는 이적’(31-37절)과 ‘사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8:1-10)은 모두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에게 주어지는 은혜 사건입니다. 개라는 모멸을 받는 이들에게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이러한 이적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증명하는 사례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에서 출발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지 못하는 자가 듣게 되고 말 못하는 자가 노래하리라(사35:5)
이어,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고치는 일화가 연결됩니다(7:31-37). 여전히 예수께서는 이방인 지역에 계십니다. 두로에서 시돈과 데가볼리를 거쳐 갈릴리 호수에 이르는 동선(動線)은 이동 경로로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여정대로라면 예수께서 이방인 지역 구석구석을 골고루 다니셨다는 인상을 줍니다. 특별히 ‘듣지 못하는 자가 듣게 되고 말 못 하는 자가 노래하리라’(사 35:5-6)는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치유가 여기에서 완성되는데, 원래 이스라엘을 향해 주어졌던 이 약속이 이방인들에게서 실현된다는 사실이 주목받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에바다(열려라)”(35절)는 말이 이 치유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이 말을 내뱉으셨고, 그 결과 막힌 귀가 열리고 굳은 혀가 풀리게 되었습니다(35절). 이는 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탄식과 치유를 넘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배타와 적대의 상태에 대한 탄식이자 치유라는 상황으로 읽힙니다. 이후로 사천 명에 이르는 이방인들을 먹이시는 급식 이적이 이어짐은 우연한 흐름이 아닙니다(8:1-9)
명목상으로는 이방인을 고치신 일이지만, 실제로 치유되어 제대로 듣고 말해야 할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닐까요? 예수의 하신 일에 대한 이방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예수께서 하시는 일들에 트집을 잡고 비판하고 논쟁을 일삼는 유대인들(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는 달리, 이방인들은 “그(예수)가 모든 일을 잘하였다”(37절)고 입을 모읍니다.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이 분명해진 사건은 한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들 모두에게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결말입니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뜻밖의 사람들에게, 불길처럼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혜 사건입니다. 초대교회의 경험이기도 했던 이 역사는, 또한 오늘날 신앙공동체의 경험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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