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46) 몰입성은 어떻게 생기나요? - ① 독자는 냉정하다/ 시인 하린
몰입성은 어떻게 생기나요?
네이버블로그/ [하린의 시클] 좋은 시의 조건 2 - 독자는 냉정하다
① 독자는 냉정하다
이 책에서 많이 반복되는 말 중의 하나는 바로 ‘하나의 법칙’이다.
그만큼 ‘하나의 법칙’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주 등장한다.
단적으로 말해 몰입성을 기르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하나의 법칙’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의 화자, 하나의 대상, 하나의 시공간, 하나의 장면, 하나의 정서,
하나의 객관적 상관물(상황)을 지키는 것이 ‘하나의 법칙’에 해당한다.
그 ‘하나의 법칙’을 이번 장에서는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시는 주관적 감각이 갖는 정서를 언어로 형상화하여 무관심한 독자의 머릿속 박물관에 걸어놓는 것이다.
여기서 ‘무관심한 독자의 머릿속 박물관’에 집중하자.
독자는 주관적 정서로 가득 찬 시인이나 시인지망생에 대해 전혀 모른다.
독자가 시를 읽는 것은 전혀 다른 낯선 경험·낯선 상상·낯선 관념·낯선 추상이 서로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시에 그려놓은 그림이 산만하게 분산되어 있거나,
모든 부분을 자세하게 그려놓는다면 결정적인 포인트(지배적인 이미지)가 없어
독자는 집요하게 다가오는 하나의 정조나 매력적인 정서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어떤 경우든 독자에게 자신의 시를 이해해달라고 사정할 순 없다.
무관심하고 바쁜 현대 독자는 그럴만한 여유도 없고 배려심도 없다.
시선을 끌지 않으면 독자는 곧바로 시 읽기를 멈춘다.
자신만 알게 쓴 경우는 숨김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타난 자신의 의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숨김과 드러남의 적절한 지점을 창출하는데,
자신만 아는 모티프와 이미지로 시를 전개하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것은 이해의 차원이 아니다.
시는 주관적인 성격의 장르이기 때문에 내용으로 소통하는 건 무리다.
정서나 느낌으로 소통하는 것이 시다.
그렇다하더라도 정서를 공유하게 만드는 바탕이 심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미지의 흐름이 하나의 정서를 향해 움직임을 가질 때 우리는
그 시로부터 매력적인 징후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정서를 드러내는 형상 자체를 숨기지 말고 구체적인 이미지로 암시해야 한다.
문학이란 나무가 있을 때 나무줄기에 해당하는 것이 서사에 기반을 둔 소설이고,
나무를 잘라냈을 때 둥근 단면에 해당하는 것이 이미지에 기반을 둔 시다.
나무의 내력은 줄거리가 있는 소설로 보여주고,
나무 안에 깃든 정서나 속성은 나이테가 갖는 압축된 이미지로 암시해야 한다.
나이테를 통해 나무가 가지고 있는 생의 방향, 생의 속성을 독자가 짐작할 수 있도록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처럼 시는 극단적인 장면과 장면 안에 깃든 극단적인 이미지에 기반을 둔 ‘순간성’을 갖는 장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무의 생은 뒤에 숨어있지만 나이테라는 선명한 이미지는
주체적으로 앞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나이테를 통해 나무의 생과 정서를 암시하는 것이 시다.
그런데도 숨김에 집착하여 아예 나이테를 숨기거나 나무의 내력을 총체적으로 언술하고 싶어
나이테 이외의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이테’가 극적으로 보여주는 매력적인 징후를 만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시는 선명한 심상을 통해 암시와 여운을 남기는 장르이다.
순간을 통해 비의(秘意)처럼 서린 개별 화자나 개별 대상의 정서를 그려내는 것이다.
절대 사연을 쓴다거나 자신이 생각한 제재의 모든 것을 다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독자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 집요하면서도 구체적인,
구체적이면서도 암시적인 이미지가 필요하다.
< ‘슬럼프에 빠진 당신에게 찾아온 21가지의 질문, 시클(하린, 고요아침, 2016.)’에서 옮겨 적음. (2024. 5.15.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46) 몰입성은 어떻게 생기나요? - ① 독자는 냉정하다/ 시인 하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