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47) 몰입성은 어떻게 생기나요? - ② 하나의 시적 대상만 가지고 써라/ 시인 하린
몰입성은 어떻게 생기나요?
네이버블로그/ [하린의 시클] 좋은 시의 조건 2 - 하나의 시적 대상만 가지고 써라
② 하나의 시적 대상만 가지고 써라
나는 물을 좋아하고 너는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갈증으로 대립한다
물은 너의 감정이다 너의 기분에 따라 그날의 컵이 바뀌고 물의 온도가 달라진다
태도는 항상 미온적이다 너는 웅크리고 있거나 드러누워 있다 나갔다 돌아오면 방은 침수되어 있다 너는 금붕어 두어 마리를 기르고 있다 그것들은 서로 먹고, 교배하고, 낳고, 먹기를 반복한다
… (중략) …
벽지는 젖어 있다 너처럼 물고기들은 벽의 감정을 배운 대로 바라보거나 바라보지 않거나 물고기는 식탁의 유리를 좋아하고 창의 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는 아무것도 기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먹고, 교배하고, 낳고, 먹는다 우리는 생활로 대립한다
나는 출근하고 너는 출근하지 않는다 나는 말하고 너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하고 너는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젖고 나는 젖지 않는다
이대로는 익사할 거라고 말한다
너는 통 듣지 않는다 창은 굳게 닫혀 있다 빛은 닫힌 창으로 들어온다 나는 물을 마시고 물을 준다 나는 물을 마시지 않고 물과 빛이 섞이는 양상을 바라본다
붉은 컵에 담은 물은 붉은 물이 되고 푸른 컵에 담은 물은 푸른 물이 된다 물고기들은 빛나는 물의 양상을 배운다
―송승언, 「물의 감정」 부분, 『철과 오크』, 문학과 지성사, 2015.
포인트 없이 자세히 그려 넣기만 해서도 안 된다.
특색과 개성을 살려 자세히 그려 넣어야 한다.
고흐의 많은 ‘자화상’ 중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오른쪽 귀를 붕대로 감싼 자화상을 유독 기억한다.
붕대로 감은 귀가 포인트가 되어 지배적 인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처럼 시에서도 시적 포인트가 필요하다.
한 가지의 인상과 한 가지의 정서를 가지고 한 가지 대상이나 한 가지 현상을 집요하게
그려 넣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것을 다시 말해 하나의 지배적 인상(현상이나 속성) 또는 하나의 지배적 정서라고 해도 좋다.
송승언 시인의 「물의 감정」은
물과 관련된 ‘너’의 속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방식의 시다.
‘너’는 ‘나’와 다르게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시인은 이것을 철저히 물과 관련된 요소만 가지고 ‘나’와 ‘너’를 대비시킨다.
“물은 너의 감정이다”.
그래서 방안의 모든 사물이 “너의 기분에 따라” 모양이 바뀌고 “온도가 달라진다”.
‘너’는 방 안에서 “금붕어 두어 마리를 기르”며, 그것들이 “서로 먹고, 교배하고, 낳고,
먹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지만, ‘방’이라는 커다란 어항에 갇힌 ‘물고기’가 분명하다.
‘너’는 항상 무언가에 젖어 있는 데 반해 ‘나’는 너와 반대로 건조하다.
그래서 ‘너’와 ‘나’는 서로 ‘갈증’으로, “생활로 대립한다”, “
나는 출근하고 너는 출근하지 않는다 나는 말하고 너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하고 너는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젖고 나는 젖지 않는다”,
‘나’의 자유와 ‘너’의 부자유가 대비되어 나타난 부분이다.
이런 대비를 통해 시인은 ‘너’가 스스로 소외되어 정체된 존재임을 강조한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기소외의 의지를 필수적으로 갖는다.
그것이 강하거나 약하거나하는 정도의 차이를 드러낼 뿐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자기소외가 심한 타자(너)를 송승언은 물의 속성을 활용해 집요하게 탐구했다.
집요하게 하나를 그려낼 때 인식해야 할 것이 바로 현상을 화자 중심적으로 인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타자나 대상 입장에서 읽어내야 한다.
시인 중심이거나 화자우월적인 태도로 대상과 현상에 접근하면 특별하게 다가오는
하나의 지배적 정서와 지배적 인상을 잡아낼 수 없다.
잡아낼 수 있다고 쳐도 거기에서 다가오는 ‘특별함’의 가치는 크지 않게 된다.
「물의 감정」에 나온 화자가 타자(너) 중심적인 태도를 갖지 않았다면
‘너’가 철저하게 물의 속성에 젖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타자의 상황에 푹 젖어서 타자의 입장에서 자기소외를 구성하는 외적 조건과
내적 상태를 꼼꼼하게 읽어냈기에 집요함과 섬세함이 묻어나는 시를 창작할 수 있었다.
알고 보면, 꽃은 계절이 불러 모은 허공이다.
지상을 향한 땅의 집중이다.
흩어지는 것이 거부의 형식이라면 피워내는 것은 모서리를 견뎌낸 침묵의 힘이다.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나무는 땅 속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에 집중한다.
상처가 있던 자리마다 꽃이 피어난다.
꽃은 어둠 속에서 별이 떨어뜨린 혁명이다.
꽃으로 피어 있는 시간,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이 하늘로 날아오를 때 날개에 집중한다.
나무는 얼마나 많은 새들의 울음을 간직하고 있을까,
온 몸이 귀가 되어 집중할 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때로는 어긋난 대답처럼 꽃 진 자리마다 잎새 뒤에 숨어서 가을은 열매에 집중한다.
알고 보면, 열매는 화려한 기억들을 끌어 모아 가을을 짧게 요약한다.
세상에 집중없이 피어난 꽃은 없다고
너는 우주의 집중으로 피워낸 꽃이다
―정용화, 「집중의 힘」 전문, 『나선형의 저녁』, 에지, 2013.
시인에게 최초로 인지된 사물이나 사건이 모두 시의 재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물이나 사건 중에서 시인이 집중한 하나의 대상과 하나의 현상만이 시의 재료가 된다.
시인은 그렇게 의지가 집중된 재료에 상상적 체험을 더해 새로운 사물과 현상으로 재구성한다.
따라서 집중의 깊이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얼마만큼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대상과 철저히 한 몸이 되어야 집중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집중의 중요성이 잘 나타난 시가 정용화 시인의 「집중의 힘」이다.
이 시에서 집중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나무의 모서리인 나뭇가지이다.
시인은 깊고 섬세한 통찰력으로 모서리에서 집중의 다양한 현상을 발견했다.
나뭇가지에 핀 꽃은 “지상을 향해 땅의 집중”으로 지상과 소통하려는 땅의 의지를 나타낸다.
그래서 꽃은 단순히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대상(땅)과 대상(우주)을 연결해주는 주체의 몸부림이다.
시 속에서 꽃은 “모서리를 견뎌낸 침묵의 힘”으로 피어나 “땅의 집중”을 우주로까지 전달한다.
모서리는 바람과 비와 싸우는 자리이기에 얼마나 외롭고 힘든 지점인가?
그런 지점에서 “침묵의 힘”으로 피어난 꽃이기에 꽃은 “상처”를 이겨낸 인고의 시간을 대변한다.
모서리는 이제 열매를 맺기 위해 “많은 새들의 울음을 간직”한 채 “온 몸이 귀가 되어” 소리에 집중한다.
그래서 얻어진 것이 “어긋난 대답처럼 꽃 진 자리마다 잎새 뒤에 숨어서” 영근 ‘열매’들이다.
이 열매는 뿌리, 꽃, 허공, 새, 울음을 모두 집중시킨,
“화려한 기억들을 끌어 모아 가을을 짧게 요약”하는 집합체가 된다.
흔한 꽃나무에서 이렇게 깊이 있는 시적 사유를 집중적으로 이끌어 내다니 놀랍다.
이것은 모두 하나에만 집중한 힘 때문에 발생한 섬세함과 내밀함이다.
모서리에서 핀 꽃이 “우주의 집중으로 피워낸 꽃”이 되고
“별이 떨어뜨린 혁명”이 되게 하는 시적 재능,
그것이 탐이 난다면 반드시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하라.
< ‘슬럼프에 빠진 당신에게 찾아온 21가지의 질문, 시클(하린, 고요아침, 2016.)’에서 옮겨 적음. (2024. 5.1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47) 몰입성은 어떻게 생기나요? - ② 하나의 시적 대상만 가지고 써라/ 시인 하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