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50) 개념적인 언어를 해체하라 - ① 상상력을 풀무질하는 시인/ 시인, 우석대 문창과 교수 안도현
개념적인 언어를 해체하라
Daum카페/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22,23,24
① 상상력을 풀무질하는 시인
모든 사랑은 상상으로 시작되어 상상으로 막을 내린다.
특히 이성을 만나기 전이나 서로 떨어져 있을 때 상상력의 펌프질은 두뇌 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된다.
두 사람의 상상력이 접합 지점을 찾았을 때 우리는 사랑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이 진행되는 동안 둘 사이에는 상상력이 엇갈려 삐걱거릴 때도 있다.
바야흐로 의심이 싹트면서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에 금이 가는 시점이 도래하는 것이다.
상상력의 신은 끈질기게 훼방을 놓고 연인들은 심각하게 결별을 고려한다.
처음에 상상력은 채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재 속에 숨어 있는 불씨와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을뿐더러
그 생각의 크기와 밝기도 미약하기 그지없다.
“상상력은 대상과 밀착되고 있는 상태를 말해준다.
분석적 관찰의 결과가 아닌 종합적 직관의 결과”라는 이형기의 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시적 상상력은 직관 중에서도 감각적 직관의 도움을 받는다.
이문재는 감각을 일컬어 “몸과 마음의 경계”이면서 “자아와 타자 사이에 있는 가교”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시에서 감각이 중요한 이유는 시가 “단순한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보기(觀)”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애초부터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인 것은 아니다.
시인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상상력을 풀무질하는 자이다.
시인이 불씨를 살려 강철을 구부리고 녹여 만들어낸 연장을 우리는 시라고 부른다.
만약에 그렇게 해서 시인이 하나의 낫을 만들었다고 하자.
우리는 풀과 곡식을 베는 농기구로서 낫의 실용적 가치를 살피기 위해 그 연장을 요모조모 뜯어볼 것이다.
쇠의 강도와 둥그런 날의 각도는 적당한지,
날은 잘 벼려졌는지, 낫자루를 끼우기에 적합한지를 따져볼 것이다.
시인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낫은 실제로 삶을 구체화하고 객관화하는 데 기여한다.
시적 상상력이 허무맹랑한 공상과 구별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의 낫이 농기구가 아니라 인명을 해치는 무기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할지 모른다.
시인의 상상력이 또 다른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시인이 만들어 낸 낫의 외형을 보면서 그것의 미학적 가치를 따지기도 할 것이다.
질베르 뒤랑은 상상력이란 “세상의 사물을 맺어주는 비밀스러운 끈”이라고 했다.
상상된 공간은 매순간 자유롭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존재의 지평과 희망을 영원 속에서 재건립한다.
상상계는 우리의 의식이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존재이며, 영혼이 살아 있는 심장이다. ……
상상력의 기능은 죽어 있는 객관성에 유용성이라는 동화(同化)적 흥미를 부가하고
유용성에 기분 좋은 것에 대한 만족감을 부가한다.
(질베르 뒤랑,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진형준 옮김, 문학동네, 667~668쪽.)
문인수의 「쉬」는 ‘뜨신 끈’에 대한 이야기다.
시인은 어느 날 정진규 시인한테서 아버지를 안고 오줌 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시의 불씨였다.
불씨를 붙잡고 상상력의 풀무질을 계속한 끝에 부자 간의 인연을 오줌발의 ‘뜨신 끈’이라는
경이로운 상상력으로 재구성해냈다.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문인수, 「쉬,」『쉬』, 문학동네, 2006. 14쪽.
시에서 상상력은 비유를 동반할 때가 많다.
바슐라르가 『촛불의 미학』(문예출판사, 1975)에서 “불꽃은 우리에게 상상할 것을 강요한다”고 말할 때
당신도 무작정 상상을 강요당하고 싶은 적이 있는가?
그가 “불꽃은 젖어 있는 불이다”라거나 “불꽃은 위쪽을 향해서 흐르는 모래시계다”라고 했을 때
당신은 그 매혹적인 은유 앞에서 금세 시인이 된 듯 착각에 빠진 적이 있는가?
그리고 또 그가 “불꽃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아편을 먹는다.
그리고 불꽃은 아무 말 없이 죽는다.
그것은 잠들면서 죽는다”라고 강렬하게 외칠 때,
시의 불꽃에 타서 죽고 싶은 적이 있는가?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4. 5.2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50) 개념적인 언어를 해체하라 - ① 상상력을 풀무질하는 시인/ 시인, 우석대 문창과 교수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