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소부가 되고 싶다.
K 교수는 내 뒤에 앉아 문학 강의를 듣는다. 이미 등단했지만 바쁜 일정을 쪼개어 계속 정진하고 있다. 내가 물었다. 퇴직 후에 글이나 쓸 것이냐고. 그는 뜻밖에 청소부가 되어 대학 구내나 청소하며 자신이 태어나서 누린 혜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생은 그것을 기워 갚으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의외의 동지를 만났다. 아, 그런 사람도 여럿인가 보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좋은 직업은 과연 무엇일까. 만여 가지가 넘는 다는 그 어떤 직업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아니, 존재하는 세상의 만사 만물 모든 것도 그러하다. 그 중에서 나는 청소부가 좋다. 거기엔 쓰레기를 치우거나 쓸어내는 청소부가 있는가 하면 신부나 목사처럼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때를 씻어주는 청소부도 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길바닥의 유리나 날카로운 것을 줍고 다녔다. 한때는 집게와 20 리터 들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아파트 밖을 돌았다. 인구 밀집지역이라 담배꽁초가 어찌 그리 많은지 오히려 내가 부끄러웠다. 행여 내 아들이 버렸을지도 모르니 내가 그 꽁초를 주워야 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남자들은 대게 출근 때 집에서 물고나온 담배를 역 근처 은행 앞에 던지고 계단으로 뛰어 오른다. 그곳에서 그들은 버리고, 나는 줍는다.
쓰레기를 줍다보면 그 시절의 유행 상품을 알 수 있다. 당시는 ‘디스’라는 담배 갑이 많이 널부러저 날려 다녔으며 모 회사 식혜통도 여기저기 굴러 다녔다. 시청 청소원이 신새벽부터 쓸어 담지만, 가을이면 낙엽까지 쓸어야 하니 역 부족이다. 무심히 쓰레기를 버리는 철부지에게 한마디 하면 그들은 자기가 쓰레기를 버려야 청소부도 먹고 살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한다. 제 집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공용(共用) 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
쓰레기를 놓고 싸우는 수도 있다. 어느 상가 건물에 고용된 청소원이 옆 건물 주인과 서로 당신네 것이라고 우기며 큰 소리를 내는 것도 본다. 옆집 대문 앞도 쓸어주며 정답게 지내던 어린 시절의 골목길 풍경이 눈에 아른거린다.
몇 달 지나자 그 구역 청소부와 인사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난 그게 자랑스러웠다. 그나마 남편이 퇴직하고 제주로 이사 오면서 끝나고 말았지만 ‘쓰레기’란 내 인생의 화두가 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내 안,밖의 쓰레기에 치여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입지도 않는 옷가지를 비롯한 생활 집기의 포로가 되거나 노예가 되어 산다. 그들로 나는 바벨탑을 쌓았다. 나는 보았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애지중지 안고 있던 모든 것이 쓰레기 였음을. 유품 하나쯤은 추모의 뜻으로 간직해야 마땅하련만 어느 자식도 외면하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나만 유일하게 어머니가 아끼시던 마리아상과 묵주를 챙겼다. 그 외 사진 몇 장 빼고 모두 연기(煙氣)로 나라갔다. 물질의 완전한 무화(無化)였다. 무엇이 남았을까. 어머니의 사랑뿐이었다.
내 마음에는 더 부질없는 것들이 넘쳐 난다. 탐진치라는 탐욕, 어리석음, 분노 같은 부정적인 것과, 몰라도 되는, 차라리 알지 못하는 편이 나을 선지식 같은 것들 이 넘친다. 내면의 완성과는 거리가 먼 공허한 것들이다. 그 또한 자신의 용량을 초과하는 집념이고 집착이다. 그나마 생활은 간소하게 꾸려나갈 수 있지만 마음을 청소한다는 것은 먹고 살기보다 어렵다.
젊었을 때는, 나이 60만 넘으면 군자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성선설, 성악설을 종잡지 못하고, 인격이란 나이에 비례하지 않음을, 자신을 보고 안다. 서양 속담에 여자는 5,6세에 천사였다가 16세 무렵에는 성녀가 되고 나이 40이면 마녀로 변하고 80세가 되면 마귀할멈이 된다고 했다. 남자는 어떨까. 남자도 세 네 살 땐 분명 천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50 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 나 자신이 한심하여 고심 끝에 하늘에 간절히 매달린 적이 있다. 그 후 꿈을 꾸었다. ‘어마 어마한 물탱크에 물은 가득 차 있었지만 푸른색 이끼가 일어 먹을 수가 없었다. 청소를 해야 하는데 너무 기가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고 있었다. 그때 그 누가 나타나 물을 빼고 청소를 해 주었다. 그러나 가장자리엔 얼룩이 남아 있었다.’ 그 후 그나마 마음이 개운하여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고 신앙 체험 수기를 쓴 적이 있다. 나야 여기까지가 한계이다.
가끔 보도를 통해 수행 선승이 좌탈입망(坐脫立亡)이라 하여 앉아서 입적(入寂)하거나 고승(高僧)이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고 입적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수행과 선(禪 )의 진수를 본다. 만일 어느 누가 3 일간 선(禪 )을 수행했다면 그 공은 천 년 유효하지만, 백 년간 재물을 탐했다면 그것은 순식간에 쓰레기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물에도 자정능력이 있어 그 오염도에 따라 산소를 필요로 하는 량이 다르다. 보통 시냇가에서 빨래를 했다면 2km정도 흘러가면 원상태로 깨끗해진다. 지구의 자정엔 수많은 미생물이 동원되어 분해되고 크고 작은 사슬을 이루며 청소가 이루어진다. 비와 바람과 햇빛도 청소를 해준다. 그러나 현대에는 인간의 파괴를 자연이 미처 따라잡지 못하니 문제가 생긴다. 인간이 처리장에 묻거나 쌓아둔 쓰레기를 지구가 안고 있는 셈이다. 지구는 중병으로 열과 오한을 내며 앓고 있다. 엘리뇨, 라니뇨 같은 현상이 더 심화 된다면 자연은 본래의 모습을 잃을 것이다.
인간에게도 자정능력은 있다. 바로 양심이다. 이것이야말로 산소 같은 것이다. 눈물(참회) 또한 인간의 마음을 씻어버리는 비와 같은 세정액이다. 인간의 선과 악은 누구를 막론하고 거기서 거기라고 한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젊던 시절 누구도 못 말리는 방탕하고 타락한 생활을 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기도로 그는 어느 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 모든 죄악을 씻고 정진하여 신학자와 주교가 되었으며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주교시절 그가 쓴 참회록은 그의 지난날 죄의 고백서이다. 주교로서 어찌 과거의 방탕을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주교의 권위를 벗어나 죄인의 입장에 서서 발가벗고 겸손 되이 자신의 더러움을 청소한 것이다. 그의 참회는 그를 성자가 되게 했고 그의 어머니 모니카도 성녀가 되게 하였다. 결국 사랑은 참회를 낳았다.
K교수가 청소부가 되고 싶다한 속뜻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자기 고백서와 다름없는 수필쓰기를 통해 자신의 때를 벗고 본래의 청정한 모습으로 승화시키길 바랐을 것이다. 또한 ‘감사한 마음’을 통해, 자신을 낮춤으로써, 영혼의 세척과 아울러 자기구원도 소망했으리라.
2007
첫댓글 읽으신 후 좀 어색한 부분 좀 지적해 주세요. 어디다 보아 달라 할 데가 마땅치 않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어제 교수님 특강중에 '탐진치'라는 낱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열정적인 안선생님 뵈면서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어제 반가웠습니다.^^
어머나, 글이 너무 좋습니다. 이 글을 쓰신분은 뉘신지요.
안정혜 선생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