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가 좀 길었습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아내와 식탁에 앉아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혼자서 가까운 교회의 새벽기도회에 다녀왔더니 차라리 집에서 자기와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머뭇거리는 저에게 가장이 가족을 잘 이끌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하기에 기꺼이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 아침에 시작한 것이요, 오늘 두 번째 하는 것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 ***교회와 거기에 출석하는 아들을 기억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목사님이 교정해 달라고 주신 출애굽기 공부 교재를 펼쳐 읽으며 오탈자가 있는지 살폈습니다. 아내가 준비한 아침 식사가 끝나자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 나가서 비운 뒤 차에 넣어두고 농협에 가서 일을 처리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음식물 쓰레기통을 꺼내어 집으로 가져와 아내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종교개혁 강좌를 들었습니다. 카톡으로 온 소식이 있어서 다른 분들에게 전달한 후에 제가 쓴 글을 Facebook에 올렸습니다. 마침 오늘 생일을 맞은 분이 있다는 알림이 보여서 간단히 생일 축하의 글도 적어 보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카톡으로 소식을 보내 준 분과 한참 통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우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여동생이 시부상을 당했기에 아내와 함께 전남 보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외곽도로가 계속 이어져서 가는 길은 편했지만 2시간 30분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시간이 많으니 요즘 장모님을 집에서 모시고 돌보느라고 고생이 많은 아내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도 여동생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평소에 많은 형제들이 모일 때에는 불가능했던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눌 수 있어서 마음이 좋았습니다. 순천에서 살 때에 교제했던 분들도 만나서 정겨운 인사와 옛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오니 밤 9시 30분이 되었습니다. 오후에 스마트폰에 전화번호가 찍힌 것을 보았지만 통화를 못 한 분이 있어서 서둘러 전화를 걸었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 다른 교회의 교우인데 거의 한 시간 동안 통화를 했습니다. 다른 분과도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너무 늦어서 내일로 미루고 컴퓨터를 켰습니다. 남편으로서, 보무로서, 사위로서, 가장으로서, 오빠로서, 교인으로서 했던 오늘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서 갑자기 ‘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이란 말이 생각났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무슨 의미로 이 말을 썼을까? 그리고 오늘 내 생활과 어떤 관계를 찾아볼 수 있을까?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이며 정치가인 아브라함 카이퍼는 인간의 모든 영역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것이 없다”고 말할 만한 영역이 단 한 부분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계의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다 하나님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것이며, 우리들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이퍼는 이 세계를 ‘거룩’과 ‘세속’으로 이원화시키고 이 세상에서 도피하는 종교적 은둔주의 내지 도피주의는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카이퍼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우리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하는 정의를 실현하자는 거룩한 열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영역을 회복함에 있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 즉 그리스도인은 수동적 기도나 하며 사는 은둔형 외톨이가 아니고, 교회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학교와 직장과 학문과 과학과 문화와 예술과 같은 세상의 모든 영역의 최전선에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명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모든 관계에서의 생활이 무의미하거나 회피해야 할 죄악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인의식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신학적으로는 영역주권이라는 주장에 중요한 많은 것이 담겨 있고, 그래서 굉장히 깊고 넓은 이야기를 하지만 저는 제 삶에서 여러 영역에 걸쳐서 있는 역할(?)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 한 사람이 여러 영역에 걸쳐서 권리도 있고, 의무도 있습니다. 저는 권리보다는 의무를 생각했습니다. 나 한 사람이 자식으로서 부모님에게 어떤 의무가 있는지를 깨달아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고, 부모로서 자식에 대해서는 어떤 의무가 있는지를 깨달아 그것을 행해야 하며, 친척들에게는 어떤 의무가 있는지를 깨달아 그것을 행해야 하며, 사회의 일원으로서는 어떤 의무가 있는지를 깨달아 그것을 행해야 하며, 교회의 일원으로서는 어떤 의무가 있는지를 깨달아 그것을 행해야 하며, 국가의 일원으로서는 어떤 의무가 있는지를 깨달아 그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여러 의무를 다 잘 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역할과 그 의무를 전체적으로, 그리고 균형 있게 생각하지 않으면 한두 가지 영역 혹은 역할만 잘 하고 다른 영역 혹은 역할들은 소홀히 하거나 전혀 모르는 체로 버려두는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보면 어떤 분은 자녀들에게는 대단히 잘 하는데 배우자나 부모님에게는 대단히 잘못합니다. 어떤 분은 사회의 일은 대단히 잘 하는데 교인의 의무는 소홀히 합니다. 어떤 어머니는 교회에서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는 열심이 특별하나 자기 자녀들을 돌보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직장에 와서도 자기 집안일만 생각하고 자녀들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있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취미생활에만 마음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군인이 되었는데도, 그것도 장교가 되었는데도 재산 증식에 몰두하여 땅투기나 부동산 투기 혹은 주식 투자에만 마음을 쏟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되었는데도 그 직분의 일에는 충실하지 않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다른 일에만 마음을 기울이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이나 자녀에게만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영역주권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는 여러 영역 혹은 역할 중에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 없고 그리스도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왜 어떤 영역 혹은 역할은 열심을 내어 충실하게 하고 어떤 영역 혹은 역할은 소홀히 하거나 무관심할 수 있을까요?
사진과 같은 표를 만들어서 자신의 영역 혹은 역할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에 따른 자신의 의무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부모, 자식, 사회인, 교인, 국민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많은 칸을 만들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이런 영역 혹은 역할에 따르는 의무를 고르게 잘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아야 하겠지요. 일주일 단위의 시간 계획을 만들어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입니다.
살아볼수록 어떤 노릇 혹은 역할을 잘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을 아쉬워하고, 게으르고 무지하고 무능한 모습에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럴수록 이런 구체적인 노력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많이 있고,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신앙의 조상들이 믿음으로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영역에서 충성을 다하며 살기를 원하신다는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일한 바울 사도의 고린도전서 10:31-33을 기억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