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금당(共衾堂) 성동일(成東一)
樂民 장달수
진주시 수곡면 금동마을. 마을 뒷산에서 거문고가 자주 울렸다는 전설로 인해 고금동(古琴洞)이라고 불리기도 한 마을이다. 이 마을엔 창녕 성씨들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살고 있다. 남명 선생 제자인 부사 성여신의 다섯째 아들 황이 처음 이곳에 들어온 이래 400여년을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수곡 창녕 성씨 입향조인 황은 부친인 부사의 나이 50세 때인 1595년 진주 금산에서 태어나 71세를 일기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호는 성성재(惺惺齋)로 ‘성’자를 호로 삼은 것은 남명 선생이 평생 성성자 방울을 차고 다니며 자신을 경계한 뜻을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태계 하진, 간송 조임도 등 지역의 선배들을 따라 학문을 연마했으며, 형들이 자기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애통해 하며 지냈다 한다.
금동 마을 가운데 큰 비석 한기가 서있다. “通政大夫行漆谷都護府使大邱鎭管兵馬同僉節制使昌寧成公里閭碑(통정대부 행칠곡도호부사 대구진관 병마동첨절제사 창녕성공 이려비)”란 글이 전면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때, 창녕 성씨로 칠곡도호부사와 대구진관, 병마동첨절제사의 벼슬을 지낸 분의 효행과 우애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란 것을 알 수 있다. 비석의 첫머리에 “고 칠곡부사 공금당 성공은 진주 서쪽 고금리에서 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마을의 선비들이 그의 생전 효행과 우애, 올바른 처신 등이 나라에서 표창을 내릴만하다 생각하여 여러 번 청원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란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이 비석의 주인공은 바로 공금당(共衾堂) 성동일(成東一)이란 분임을 알 수 있다. 공금당은 입향조인 성성재 성황의 5대손으로 1753년 진주 고금리 즉 수곡면 대천리 금동마을에서 익후와 성산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남명제자인 황곡 이칭의 후손이다. 어려서 재주가 뛰어나 부친이 항상 “이 아이가 장차 우리 가문을 크게 번성시킬 것이다”라며 큰 기대를 걸었다.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강씨의 양육으로 자랐다. 공금당은 계모를 생모처럼 생각하고 뜻을 어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모 소생의 동생들과 우애 또한 남달랐다. 공금당의 5대손 성종근씨(72)는 “공금당 선조의 호는 이불을 같이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형제분이 다섯 분이 있는데, 항상 같은 이불을 사용할 만큼 우애가 있습니다.”며“이는 공금당 선조가 계모 소생의 동생들을 자기 몸같이 아끼고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라 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18세 때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공금당은 계모와 어린 동생들을 잘 보살피며 모든 일을 잘 주선하며 집안을 잘 보존해가자 주위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공금당은 집안일을 도맡으며 자신을 수양하는 일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8세 때에 무과에 급제한 것을 시작으로 37세 때는 내시사(內試射)에 우등 성적으로 충익위장(忠翊衛將)의 벼슬에 승진하였으며, 이어 경상도 중군에 임명되었다. 이때 경상감사 정대용은 공금당이 자질이 뛰어남에도 한직에 머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항상 격려하고 포상까지 했다. 곧이어 원주중군(原州中軍)의 직으로 나아갔다. 그 뒤 공금당은 충장위장(忠壯衛將) 오위장(五衛將)등의 벼슬로 인해서울에 머물며도 고향에 계시는 모친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바쁜 공직 생활 중에서도 틈만 나면 고향으로 내려와 모친의 안부를 살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다.
52세 때 횡성 현감으로 부임했다. 당시 횡성 고을은 궁벽한 곳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공금당은 정성껏 백성들을 구휼하고 깨우쳐 1년 만에 풍속이 아름답게 되었다. 이때 마을 사람의 실화로 민가 10여 채가 불에 탄 일이 생겼다. 마침 농사철이라 민심이 더욱 흉흉했다. 공금당은 고을 창고 문을 열어 백성들의 민생고를 해결하게 했으며, 또한 공물을 조금도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은혜를 보답하고자 기념비를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공금당은 이를 적극 만류하여 비를 세우지 못하게 했다. 3년 후 다시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서울로 왔다. 하지만 이때 모친 강씨가 칠순의 나이로 고향에 있어 오래도록 모시지 못할까 걱정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을 한다. 이때 모친 곁에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공금당에게 크게 승진할 기회도 있다. 하지만 모친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5년 동안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1811년 모친의 병이 극심하자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산천의 신에게 쾌유를 빌었으며 단지를 하는 등 지극한 효성으로 보살폈으나 결국 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3년상을 극진히 치르고 다시 칠곡도호부사의 벼슬로 나아가니 이때 공금당의 나이 65세로 이미 백발이었다. 당시 칠곡 고을에 폐단이 많아서 다스리기가 어렵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공이 정사를 부지런히 하고 몸소 청렴하게 처신하니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감화되어 “세상에서 드문 명사또다”라 하며 공덕비를 세웠다. 임기가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거처하는 집을 지어 ‘공금당’이라고 하고 여러 아우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학문에 정진하고자 하는 뜻을 드러내었다. 공금당은 자손들에게는 “말을 신중히 하고,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며, 바르게 행동하고, 주색을 멀리하며, 재물을 멀리하라”라 하며 “한 가지라도 어기면 나의 자손이 아니다”란 훈계를 남겼다. 고향에서 집안의 화목을 도모하며 학문에 정진하던 공금당은 향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금당이 세상을 떠난 후인 1865년 고을의 유생인 하계현(河啓賢) 등 수 백인이 진주 목사에게 효행과 우애로써 포상을 건의하고 하봉윤 등 유림들은 서원에 모실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때 마침 서원철폐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공금당의 후손들은 선조가 목민관으로 있을 때 사용한 유서통(諭書筒)을 비롯한 호패 등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진양속지 인물편’ 공금당에 대해 “천성이 영특하고 용모가 빼어났으며 소년 시절에 부모상을 당하여 상례를 극진히 치렀으며, 계모를 효도로써 섬겼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청렴하고 강직하여 당시 사람들이 중국의 어진 관리인 공수와 황패에 견주었으며 아랫사람을 대하는 데는 엄격하였으며 감히 사사로운 것으로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사림에서 서원에 모실 것을 논의하였으나 때마침 서원 철폐를 만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라 되어 있다. 지금 후손들은 수곡 금동마을에 이려비(里閭碑)를 세워 공금당의 효성과 우애를 기리고 있다. 서원에 모실만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뜻을 이루지 못해 안타깝지만 그의 행적을 적은 비석이 마을 가운데 서 있어 그마나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취재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