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학이 가볍게 다루는 말의 본래 무게
지난 호에서 우리의 호흡이 어느새 죽음을 향한 호흡으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죽음의 가장 끝자락에서 마주하는 것,
공황(恐惶)을 살펴봅니다.
요즘 "공황"이라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그런데 경학이 말하는 공황은
오늘날 가볍게 쓰이는 그 말과는 무게가 다릅니다.
공황이란, 발병시원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수감하게 되는 증상.
즉 공황증은 죽음의 고통으로서
그 어느 고통도 비견할 수 없는 최악의 저주성 고통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공황이라는 말을 입에 올립니다.
하지만 죽음을 당해보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공황의 정의를 모르고 남발하는 일반 병명으로만 인식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현대의학에서까지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인 부분을 비껴가려는 방편으로
공황을 가벼운 병명으로 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본래의 공황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동의(東醫)에는 사후진단(死後診斷)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생명이 떠난 죽음의 모습을 보고
한 인생이 일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없어
전신이 꼬이고 비틀어진 채 굳어버린 시체.
반대로, 죽어 사흘이 지나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마치 잠자는 듯 고요하게 유지되는 시신.
이 후자가 바로, 공황을 넘어선 사람입니다.
평생을 통해 어느 순간 삶의 목적을 깨달아
자신의 근본 생리를 회복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경학은 의사의 사명을 묻습니다.
의사(醫者)는 자신이 감지한 증상에 대하여
그 모두를 치유해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황증까지를 논하고, 규정하고, 치유해야 합니다.
공황을 치유한다는 것은
죽음까지도 치유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생을 마침에 있어
공황의 고통 없이 평안함으로 고요에 들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갈림길에 있는 것이 치리(治理)입니다.
생리(生理), 병리(病理), 치리(治理) — 이 셋은
인간이 본연적인 기준을 중심으로
상하 양단 간에 중용(中庸)의 변즉상태(變卽狀態)에 따릅니다.
다행히 길이 있습니다.
평소의 삶을 통해 묵상하는 생리를 회복하면
공황이 상관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 태식호흡을 회복하는 실천법을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