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밖의 종교적 신념들과 관습들에 대해 거의 논의해 본 적이 없다.
미국 기독교 내부의 다양성과 유대교, 이슬람, 불교, 미 원주민들(Native Americans)의 토속
신앙, 그리고 암묵적인 세속 종교들의 존재 때문에, "미합중국의 종교(religion in the United
States)"는 단순히 기독교인들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미 대학들에서 새로운 종교에 대한 관
심이 고조되었다. 이 관심은 표준적 신앙(standard faiths)을 거부하고, 많은 총명한 젊은이
들의 "반문화(counter culture)"와 조화될 수 있는 한 종교의 모든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
반문화"란 과학 기술적 기성문화(technological-establishment culture)에 반발하는 문화를
말한다. 이 운동들의 특징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바 "종교적"인 것은 아니며 사랑,
축하, 그리고 의미의 탐구에 대한 강조란 점에서 "종교적"이다. 로작(Theodore Rozack)은
그의 「the Marking of a Counter Culture」에서 이는 "크루세이드(전도운동)에서 볼 수 있
는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혹은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 류의 종교는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이다"고 보았다. 비전통적인 종교에 몰입하던 학생들의 일
부는, 로작이 이야기한 바 "그들(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꾀죄죄하고, 더러우며 때로는 반쯤
미친 무리들"이었던 고대 기독교인들에 매료 되었다. 이는 보편적 이해를 벗어난 종교의
한 예이다. 최근 미국의 종교적 현상을 다룸에 있어서 고려해야할 다른 요소들도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종교적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더 전통적인 용어로 기독교를 언급
해야 할 것이다. 가장 최근의 발전은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일 것이다. 이는 과거
의 보수주의의 단순한 재등장만은 아니었다. 또한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부흥에 대
해서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의 신근본주의(neo-fundamentalism)는 대체로 이전의
근본주의보다 이론적으로 훨씬 더 정치하며, 훨씬 더 정치적 우파(the political right)와 연
결되어 있다.
미국의 종교는 몇 개의 독특한 시기들로 나눌 수 있다. "형성기(the formative years)"(식민
지 시대)는 제 1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식민지 개척 초기(플로리다의 성 어거스틴, 1565
그리고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 1607)부터 독립전쟁(the Revolutionary War)에 뒤이은 미국
의 건국까지를 망라한다. 제 2기는 새 민족의 생성 및 서부에로의 확장 그리고 이 시기의
역동성을 포함한다. 제 3기는 남북전쟁(the Civil War), 이의 여파, 그리고 1차 대전에서의
미국의 세계적 강대국으로의 부상을 특징으로 한다. 1차 대전 이후의 기간은 특징적인 범
주들로 이루어져 있다. 곧, "광란의 20년대((the Roaring Twenties)", 30년대의 대공황(the
Depression), 40년대의 제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이의 즉각적인 여파들("냉전"과 "철의 장막
"), 그리고 50년대의 "종교적 부흥(religious revival)", 60년대 초의 "종교적 갱신(religious
renewal)", 60년대 후반과 70년대의 "종교적 혁명(religious revolution)", 80년대와 90년대의
재평가가 그것들이다. 2억 4천 2백만의 미국인들(1990)의 대부분은 기독교인들이다. 8천만
은 프로테스탄트들이며, 5천 4백만은 로마 카톨릭들이며, 4백만은 정교회 성도들이다. 8백만
이 이슬람 신자들이며, 6백만이 유대인들이고, 10만이 불교도들이다.
1. 허드슨(Winthrop Hudson)은 식민지 개척시대를 미국 종교에 있어서 "형성기"로 불렀다
(「미국의 종교」, p. 1ff.). "형성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유럽의 전통(the European
heritage)과 미국의 상황(the American context)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제기될 수
있는 역사적인 문제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이다. 전통의 "형식과 내용"은 유럽적이다.
상황은 허드슨이 이야기한 바 "신대륙에서의 삶의 필요성과 기회"로 요약된다.
허드슨은 신대륙의 미국종교와 이의 구세계의 전통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는 "미
합중국은 더 넓은 유럽사회의 한 구성요소로만 이해될 수있다"고 평했다. 「미국교회사의
재해석(Reinterpretation in American Church)」(Jerald Brauer 편집)에 관한 최근의 한 심포
지움에서 그는 "미국종교는 얼마만큼 미국적인가?"하는 문제를 제기한 후, 이는 별로 미국
적이 아니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이 견해는 스위트(W. W. Sweet)의 견해와 매우 대조된
다. 그는 미국종교와 유럽종교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하면서, 특히 신대륙에서 확장일로에
있던 변방은 독특한 미국적 종교를 낳았다고 보았다(「Religion in the Development of
American Culture」).
a. 연속성들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미국언어는 유럽의 산물이다. 혹자는 이것이 영국의 방
언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미국적" 언어이다고 우긴다. 언떤 식으로 평가하
든 간에 미국언어는 파생어(a derivative)이다(아마 미국 토착언어는 다양한 인디안 부족들
이 사용했던 방언들일 것이다. 그들의 땅은 탈취당했으며, 그들은 수천명씩 살해되었다
(Dee Brown의 「Bury My Heart by Wounded Knee」 참조). 이는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
지 않을 오명인 것이다. 이 비극은 서부영화 속에 표현되어 왔다. 이 영화들에서 인디언들
은 야만인들로 불렸으며, 인디언 부족들의 이름을 따서 스포츠팀들의 이름이 지어졌다.) "
트럭"에 대한 영국어는 "로리(lorry)"이다. 단축형(contraction)과 구어체(colloquialisms)가
일반화되었다. "니그로(Negro)" 언어의 영향도 지대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 민족들의
언어의 영향도 크다. 예컨대, 프랑스어 계통(extraction)도 많다. 많은 격언들과 동요
(nursery rhymes)가 유럽에서 왔다. 법률제도(배심원에 의한 평결)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왔다. 미국인들은 처음부터 유럽 시인들, 철학자들, 역사가들, 그리고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
었다. 미국 문화는 유럽 작곡가들 예컨대, 바하, 베토벤, 브람스, 라벨(Ravel), 드뷔시, 로시
니, 시벨리우스, 샤스타코비치(Shastakovitch), 델리우스, 그리고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와 같은 유럽 작곡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소수의 미국 작곡가들만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아마 아이브스(Charles Ives), 코플랜드(Aaron Copland), 그리고 거쉬윈
(George Gershwin)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종교적 전통은 특히 영국제도(the English Isles)와 연결되어 있다. 여느 영국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영국국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회중교회, 로마 카톨릭교회는 미국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플리머스 형제들(the Plymouth Brethren)이 전단을 돌리는 것과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구세군 밴드를 미국에서도 볼 수 있다. 거리 어디에서나 퀘이커
집회소와 유대교 회당(a Jewish synagogue)을 볼 수 있다. 미국의 종교적 다양성은 영국의
그것보다 훨씬 더하지만 두 나라에 있어서 종교상의 기본적 구성요소는 거의 동일하다.
미국교회들의 고향은 영국제도만이 아니다. 대륙에서 기원한 루터파도 있으며, 다양한 형태
의 개혁파도 있고, 메노나이트, 모라비안, 덩커, 슈벵크펠트 교회도 있다. 최근 중앙유럽으
로부터 미국으로의 이민은 로마 카톨릭교회와 유대교의 성장에 기여했다. 미국에 토착 종
교그룹들이 존재하는가? 어느 의미에서 몰몬교도들(Church of Jesus Christ of the
Latter?day Saints)과 크리스챤 사이언스 신도들(Christian Scientists)은 미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많은 소종파들이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유럽에 기원을 둔 소종파도 있다.
미국에 대한 유럽의 계속적인 종교적 영향은 칸트, 슐라이어마허, 리츨, 파스칼, 키에르케고
르, 휘겔, 뉴먼, 모리스, 템플, 베일리 형제들(the Baillie brothers), 바르트, 브룬너, 부버, 불
트만, 케제만, 몰트만, 판넨베르크, 슈바이처의 사상의 영향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미국의
신학은 대체로 유럽 사상의 모방이다.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가 뛰어난 업
적을 이룩했으나, 그의 신학은 칼빈과 유럽의 철학에 크게 의존했다.
b. 반면 불연속성도 존재하고 있다. 미국으로 유입된 것은 단일 "유럽전통"이 아니라, 다양
하고도 국지적인 전통들이었다. 신대륙에 등장한 것은 이 전통의 정확한 전사(an exact
transcript)가 아니었다. 새롭고도 기대치 못한 상황들이 발생했는데, 특히 독립전쟁 이후
변경의 확대가 그것이었다. 신대륙에서의 유럽 전통들의 혼합은 매우 새로운 현상이었다.
영국인들은 영국에,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에, 그리고 스페인들은 스페인에 살았으나, 미국에
살던 미국인들은 영국인, 프랑스인 스페인 사람 등등으로서 대체로 같이 살았다. 그 결과로
인해 유럽전통의 혼합이 이루어졌으며, 이 결과는 새로운 타입의 민족을 생성시켰다. 이민
이 계속되자 이 혼합화의 과정은 급속화되었으며, 소수민족들을 격리시켰던 장벽들이 약화
되었다. 또한 13개 식민지들이 미합중국을 형성하게 만든 입법적 제도는 다소 독특한 현상
이었다. 정부형태는 영국의 그것을 많이 닮았으나, 의회제(parliamentary)가 아니었다. 미국
의 정부형태는 권력집중에 반대하여 행정부(executive), 입법부(legislative), 그리고 사법부
(judicial)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신대륙에서의 삶의 필요성과 기회"는 미국 종교의 형성에 기여했다. 미국 종교의 스타일
및 신학과 변방의 확대 및 산업화와 같은 현상들과의 관계성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어
렵다. 스위트는 변방(the frontier)의 영향을 중시한다. 비록 그는 이 요인을 과도하게 강조
하기는 했으나, 이것이 미국 문화와 종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미국 역사에 있어서 변방에 대한 최근의 평가는 R. A. Billington의 「Westward
Expansion」을 참조할 것). 에드워즈가 그 창시자였던 뉴 잉글랜드 신학을 제외하고, 미국
은 특징적인 신학 스타일을 배태시키지 못했다. 이 스타일은 미국적 경험에 깊이 뿌리박힌
성경적 이미지들이란 상황 속에서 유연성, 개방성, 그리고 자유를 필요로 한다.
미국의 독특한 삶의 경험은 사상면에서 특징적인 요소를 보이고 있다. 미국 종교의 독특한
에토스와 특징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1) 프로테스탄티즘. 현재는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으나, 역사적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이 지배
적이었다. 영국 식민지들은 프로테스탄트였다(메사추세츠, 코네티캇, 뉴 헴프셔, 로드 아일
랜드, 버지니아, 노스 케롤라이나, 사우스 케롤라이나, 조지아, 매릴랜드(이는 처음 카톨릭의
보호 아래 있었으나, 결국 왕당파가 되었다). 그리고 비영국계 소수파들(뉴 네델란드와 뉴
욕의 화란 개혁파, 델라웨어의 루터파, 뉴저지와 펜실베니아의 퀘이커파)도 대체로 프로테스
탄트였다. 매릴랜드가 로마 카톨릭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조차도 카톨릭은 마이노리티의 위
치에 있었다. 로마 카톨릭은 주로 오대호 연안과 미시시피 강변의 프랑스 무역 거점들과
스페인 점령 하의 플로리다 그리고 서부의 일부 지역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로마 카톨릭들
의 신대륙에로의 대대적 유입은 아일랜드에 만연했던 감자역병(potato-rot) 때문이었다. 이
들 대부분은 북대서양 연안의 번성하던 산업체들에서 일했다. 이로 인해 미국 카톨릭 교회
는 노동자 계층에서 확고한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2차대전 후 로마 카톨릭교회는 미국
인의 삶에서 프로테스탄트들과 상응한 위상을 확보했다. 이는 아일랜드계 카톨릭 신자였던
케네디(John F. Kennedy)가 1960년 대통령으로 뽑힌 사실로 상징된다.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자였으며, 1972년 대통령 후보 경쟁자였던 머스키(Edmund Muskie)는 카톨릭 신자였다.
(2) 퓨리턴 전통 (the Puritan heritage). 퓨리터니즘은 뉴 잉글랜드에서 우세했으며, 다른 식
민지들에로 뻗어 나갔다. 예컨대, 퓨리터니즘은 버지니아 식민지(colony)의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요인이었다. 식민지 시대의 영국국교회 사상(colonial Anglicanism)은 주로 저교화
파(the Low Church)였으며, 따라서 퓨리턴 사상에 개방적이었다. 만약 퀘이커들이 퓨리턴
들로 간주될 수 있다면(Simpson은 「Puritanism in Old and New England」, p. 1에서 그
런 견해를 피력했다), 퓨리터니즘은 뉴저지에서, 그리고 특히 펜실베니아에서 영향력이 있었
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국 퓨리터니즘은 식민지 시대의 미국으로 이전되었다. 지그프
리드(Andre Siegfried)는 「America Comes of Age」(1927)에서, "미국 신앙의 진정한 근원
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17세기의 영국 퓨리턴들에게로 소급해야만 한다" 고 했다.
샤프(Philip Schaff)는 "퓨리턴 프로테스탄티즘(Puritan Protestantism)은 적절하게 우리 북
아메리카 교회의 근간을 형성한다"고 평가했다.
퓨리턴들은 그들이 감독제, 비성경적 복장들 및 예식, 그리고 국교의 도덕적 타락에 반대했
기 때문에 엘리자베스의 국교화 정책(the Elizabethan settlement)에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
러한 반대들 저변에 "퓨리턴들과 다른 인간들을 구분하고, 그들에게 선민의 특권과 의무를
부여하는 회심"의 체험을 강조하는 그들의 입장이 존재했다. 이는 엄격한 자기 점검, 회개,
믿음, 중생, 고양, 그리고 선행에 대한 강조를 특징으로 했다. 따라서 회심의 체험은 훈련된
선행의 삶 및 강한 운명의식을 낳게 되었다. 퓨리턴들은 "인간 죄성의 심대함(the
profundity of human sin)"을 믿었다. 그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죄를 어디에
서나 발견할 수 있으며, 발견할 때마다 이를 확대시키도록 배웠기 때문에, 이들은 쉽게 죄를
발명해내는 버릇에 빠지게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합당할지도 모른다(심슨, p. 91)
(3) 종교적 다양성(religious diversity). 이는 미국 종교의 제 3의 특징이다. 종교적 다양성이
만연해 있던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를 제외하고, 뉴 잉글랜드에서 회중교회(the
Congregational Church)는 국교가 되었다. 매릴랜드는 처음 로마 카톨릭 보호 아래 있었으
나, 남부 식민지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결국 영국국교회(the Anglican Church)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중부 식민지들(the Middle Colonies)은 처음부터 다양성을 특징으로 했다: 1644
년 뉴욕이 된 뉴 네델란드(New Netherlands)의 화란 개혁교회; 델라웨어(Delaware)의 루터
교; 뉴저지 및 펜실베니아의 퀘이커교; 메노나이트파 및 침례교와 같은 다른 그룹들이 존재
했다. 제임스 1세(1603-25), 찰스 1세(1625-49), 찰스 2세(1660-85), 그리고 제임스 2세
(1685-88)의 박해로 인해 퓨리턴들이 신대륙을 향해 영국을 떠나야 했다. 일부 프랑스 프
로테스탄트들은 1685년 낭트 칙령의 철회 이후 미국으로 향했다. 다양성은 미국 종교의 지
속적인 특징이었다. 스위트는 1946년 총 7천만 이상의 구성원들을 가진 256개의 "독립파
종교 그룹들(Independent religious groups)"이 있다고 말했다. 1970년까지 이 그룹들의 총
구성원들은 1억 2천 8백 5십만 5천 84명에 이르렀다(「Yearbook of American Churches」,
1970). 소종파들을 포함하여 오늘날 미국에는 300개 이상의 다른 교파들이 존재한다.
(4)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시작. 이는 평신도들의 역할에 대한 강조를 의미했다. 전통의 제
약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함에 따라 이들은 성직자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
에서 보다도 훨씬 더 성경의 단순한 증언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거
룩한 기독교 사회공동체(a holy commonwealth)를 설립하는 신적인 섭리의 도구로 이해했
다. 따라서 평신도의 위상이 매우 격상되었으며, 교구제도(the parish system)가 쇠퇴되었
다. 교구들이 조직되기는 했으나, 기술적으로 모이는 자들의 교회(gathered churches) 형태
로 운영되었다. 자동적으로 교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는 신앙, 부흥, 선교협회들, 소
책자들, 그리고 전도를 필요로 한다. 펜(William Penn)은 펜실베니아에서의 모험을 "거룩한
실험(a holy experiment)"이라 불렀다. "현시적 운명(manifest destiny)" 의식이 미국의 삶
과 종교에 발전되었다. 에드워즈는 제 1차 대각성운동(the First Great Awakening, 1730년
대)을 "성경 속에서 그렇게도 자주 예언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의 여명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서곡으로 보면서, 이 일은 결국 발전되어 인류 세상을 갱신시킬 것"으로 보았다. 이
비전은 세속화되어 왔으며, 정치적 용어들로 표현되어 왔다. 이 비전은 미국 역사에서 거듭
표현되어 왔다. 이는 "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메시아적
이었다. 종교적 용어들로서 이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미국을 구원한다"고 하는 한 책의
타이틀에서 잘 표현되었다. 물론 "순진무구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와 유토피아적
몽상들은 최근의 역사의 견지에서 볼 때 주장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5) 서부개척은 미국종교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공간"의 확대 개념은 양과 팽창에
대한 강조를 규범으로 간주하는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미국은
더 이상 개척되어야 할 변경이 아니다. 더 많은 자기성찰(introspection), 더 많은 질에 대
한 강조 및 더 적은 양에 대한 강조, 단순한 확장보다도 더 많은 높이와 깊이에 대한 관심
의 때가 도래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텔레비전, 스포츠, 그리고 돈에 대한 탐닉으로 상
징되는 피상적인 가치들을 강조하는 대중문화의 분출로 인해 모호해졌다(몰트만의
「Religion, Revolution, and the Futhre」 참조. 이 저술은 유럽인에 의한, 미국의 삶에 대
한 성찰의 일부이다).
C. 식민지 시기(the Colonial Period)의 주요사건들에 대한 약술.
이 시기에는 어느 특정 그룹이 주도하지 않았다. 회중교회주의자들(the Congregationalists)
이 가장 큰 그룹이었으나, 이들은 지역적이었다. 영국국교도들(the Anglicans)이 가장 먼저
들어왔으나, 이 그룹이 가장 크지도 않았고 가장 영향력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장로교인
들, 침례교인들, 그리고 감리교인들이 숫적으로 더 많았고 더 널리 확산되어 있었으나, 영국
국교회들에 비하면 늦게 등장했다.
(1) 남부 식민지들(Southern Colonies). 영국국교회가 영국인들의 최초의 영구 정착지
(Jamestown, 1607)의 개척과 함께 버지니아로 이식되었으며, 식민지 기간 동안 줄곧 국교회
(the established church) 역할을 했다. 전 기간 동안 감독의 부족으로 인해 교회의 사역이
지장을 받았다. 교구들을 관리하고 있던 평신도 교구위원회(lay vestries)가 지역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교구들에 목회하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 런던의 감독은 식민지 국교
회에 관할권을 행사했다. 따라서 안수받은 성직자가 부족했다. 감독 대리들(commissaries)
이 미국에서 감독의 부재로 인해 생긴 공간을 매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권위는 제한
되어 있었다. 블레어(James Blair, 1656-1743)는 1685년부터 그의 사망시까지 버지니아에
감독 대리로 섬겼다. 그는 1693년 윌리엄 앤드 메리 대학(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을 설립했다. 교구위원회를 통한 평신도의 주도(lay control) 및 감독의 부족으로 인
해 야기된 문제는 정착촌들의 확산으로 인해 더 심화되었다. 이는 특히 담배를 재배하던
버지니아와 매릴랜드에서 더 심했다. 또한 미국교도 그룹들(dissenting groups)이 급속하게
확산된 것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버지니아에서의 앵글리칸주의(Anglicanism)는 초기
단계에 영국국교회 내부의 퓨리턴파에 의해 영향 받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런던의 버
지니아 회사(the Virginia Company of London)는 1624년까지 그 식민지를 통제했는데, 이
회사는 영국국교회의 퓨리턴파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버지니아의 최초의 성
직자들은 헌트(Robert Hunt)와 휘타커(Alexander Whitaker)였는데, 이들은(국교회로부터의)
비분리 퓨리턴들이었다. 버지니아는 1624년 직할 식민지(royal colony)가 되었다. 버지니아
교회는 더 엄격하게 "영국국교회적"이 되었으며, 덜 "퓨리턴적"이 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영국정부는 버지니아 교회에 매우 무관심했다. 이는 이미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문제들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버지니아 북부의 매릴랜드는 1632년 로마 카톨릭 신자인 볼티모어경(Lord Baltimore)에 의
해 임대되었다(특허 식민지(charter colony)가 됨). 종교적 관용(religious toleration)의 정책
이 확립되었다. 이는 그의 동료 신자들이 자유를 위해 피난처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오게
하는 방법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또한 그의 동기는 경제적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매매할
땅이 있었다. 처음부터 프로테스탄트들이 카톨릭들을 숫적으로 능가했다. 프로테스탄트들
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카톨릭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던 특허정부(a proprietary goverment)
아래서 프로테스탄트들이 점차 반항적이 되었다. 볼티모어는 1648년 윌리엄 스톤(William
Stone)을 프로테스탄트 주지사로 임명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반대를 완화했다.
이듬 해 그는 종교적 관용법(a toleration act)을 입법화시켰다. 이는 처음부터 존재하던 종
교적 관용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매릴랜드에서의 관용은 철학적 사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고, 일련의 상황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긴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받아
들이는 사람에게로 한정되었다. 이를 부인하는 사람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1691년 매릴랜드가 특허 식민지가 되었으며 영국국교회가 법으로 국교로 선포되었다. 브레
이(Thomas Bray, 1656-1730)는 감독대리였는데, 그가 이 일을 주도했다. 카톨릭 기간 동안
매릴랜드를 특징지웠던 종교적 다양성은 계속되었다. 퀘이커교도들, 침례교도들, 그리고 장
로교도들이 꾸준히 성장했다. 로마 카톨릭교도들은 이제 법률적 무자격자들(legal
disabilities)이 되고 말았다. 카톨릭 역사에 있어서 미국 독립전쟁 때까지 18세기는 "형벌의
기간(penal period)"으로 일컬어진다.
영국국교회는 1706년과 1715년 각각 사우스 및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국교가 되었다. 이 국
교화 조처는 위그노들(Huguenots),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장로교인들, 침례교인들, 그리고 퀘
이커들을 포함하는 종교적 다양성 때문에 별로 효과가 없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
톤(Charleston)에는 일련의 유명한 독사들(rectors)이 있었다. 영국국교회는 1733년 조지아
식민지의 건설과 동시에 사역을 시작했다. 1758년 이는 이 식민지의 국교가 되었다.
(2) 뉴 잉글랜드 식민지들. 뉴 잉글랜드에서의 최초의 정착은 1620년 메사추세츠의 플리머
스에 온 과거 영국 분리주의자들(Pilgrims)과 1628년 메사추세츠의 살렘(Salem)에 온 퓨리
턴들이었다.
(a) 1620년 미국에 온 "필그림들"은 그들이 네델란드로 이민갔을 때 분리주의자들
(Separatists)이었다. 이들은 로빈슨(John Robinson)의 리더쉽 아래 "비분리주의
(non-Separatism)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드디어 "회중교회주의적(Congregational)" 퓨리턴들
이 되었다. 이 그룹의 리더쉽은 영국으로부터 화란으로 피난갔던 스크루비-라이덴 망명자
들(the Scrooby-Leyden exiles)이 잡게 되었는데, 이들은 네델란드에서 반항적이 되었다.
이들은 생계 유지가 더 용이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국적이 보존될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
기를 원했다. 라이덴 회중교회주의자들은 드디어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특허권을 확보했다.
이는 그들이 버지니아로 생각했던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했다. 오랜 지체 후에 그 유
명한 메이플라우어(Mayflower)호는 1620년 9월 영국 플리머스를 떠나 65일간을 항해한 후
에 드디어 신대륙에 도착했다. 승객 102명 가운데 41명은 라이덴교회 출신이었다. 그 나머
지들은 런던 여기저기에서 모집된 "낯선 사람들(strangers)"였다. 그들은 매순간 위험에 처
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일 "응답할 수 있는 용기로서(with answerable courage)" 이
들을 대면했다. 승객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33년간 플리머스 식민지의 주지사였던 브
래드포드(William Bradford)는 그들의 용기를 다음 사실의 탓으로 돌렸다 : "그들은 필그림
들이었으며, 그러한 것들(그들의 매일의 위험)을 별로 응시하지 않고 그들의 영원한 나라인
하늘로 그들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는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마 실수로 그들은 버지니아가 아니라 케이프 코드(Cape Cod)에 착륙했던 것 같다. 버지
니아 회사의 특허증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즉시 메이플라우어호 맹약(the
Mayflower Compact)에 착수했다. 이는 사회생활에 사용된 단순한 교회 언약이었다. 그들
은 플리머스에 회중교회주의 노선에 따라 교회를 설립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대부분 분리주의자들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들이 신천지에 도래하기 전에 이미 비분리 회
중교회주의적 퓨리턴들이 되었다. 라토렛(「History of Christianity」, p. 953)과 워커
(「Creeds and Platforms of Congregatinalism」, p. 86)의 견해, 곧 필그림들은 "분리주의자
들"이었다고 하는 견해는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교회 역사가들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
(b) 퓨리턴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그룹이 1628년 메사추세츠의 살렘에 도착했다. 윈트롭
(John Winthrop)과 다른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1629년 메사추세츠 베이 회사의 허가가 확
보되었다. 영국으로 떠나기 직전 주지사 윈트롭은 영국국교회에 서신을 보냈는데, 여기서
그는 영국국교회를 "우리의 사랑하는 어머니(our dear mother)"라 불렀으며, "우리는 그러므
로 우리를 양육한 그 젖을 혐오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는 베이 식
민 개척자들이 분리주의자들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1631년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가 보스톤에 왔을 때, 그는 교회의 직책을 맡는 것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이는
이와 영국국교회와의 연계를 부인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1629년 봄 회중교회주의 노선에 따라 한 교회가 설립되었다. 히긴슨(Francis Higginson)과
사무엘 스켈톤(Samuel Skelton)은 안수받은 퓨리턴 성직자들이었는데, 각각 목사와 교사로
선출되었다. 그들은 감독제에 따라 안수를 받았었으나, 이 교회의 "가장 근엄함 성도들
(gravest members)"의 일부가 손을 얹음으로써 회중들에 의해 구별되었다. 따라서 살렘의
교회는 회중교회주의의적이 되었으며, 따라서 플리머스 교회와 같은 교회정치를 채택했다.
왜 살렘교회가 교회정치상 회중교회적이 되었는가? 아마 플리머스교회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의사 사무엘 팔러(Samuel Faller)의 도움 때문이었다. 플리머스는 그로부터
돈을 차입하여 첫 해의 엄동설한에 떨고 있는 살렘교회를 지원했다. 그러나 기껏해야 이는
부차적인 이유이다. 밀러(Perry Miller)는 메사추세츠 베이 회사를 설립한 퓨리턴들이 신대
륙에 상륙했을 때 이미 비분리 타입의 회중교회주의자들이었음을 밝힌 적이 있다. 살렘과
플리머스 모두 회중교회였다. 양자 모두 비분리주의 타입이었다.
다른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2명의 뛰어난 지도자들은 보스톤의 카튼(John Cotton, 1584-62)
과 도르체스터(Dorchester)의 마터(Richard Mather, 1596-69)였다. 코네티캇 식민지가 1636
년 설립되었다. 하트포드(Hartford)의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는 주요 목
사였다. 뉴 헤이븐 식민지가 데이븐포트(John Davenport, 1597-1670)의 인도 아래 1638년
건설되었다.
이 사람들은 성경이 회중교회적 정치형태를 가르쳤다고 믿는 헌신된 퓨리턴들이었다. 그래
서 그들은 비분리 회중교회주의자들이 영국에서 할 수 없었던 것을 하기를 원했으며 회중교
회주의를 국가교회로 확립했다. 종교적 획일성이 강요되었다. 비국교도는 제제되었다. 코
네티캇과 뉴 헤이븐은 1665년 합병되었다. 메사추세츠 베이와 플리머스는 1691년 합병되었
다. 그리고 뉴 헴프셔(New Hampshire)는 1680년 메사추세츠로부터 독립했다. 회중교회적
국교는 코네티캇에서 1818년, 뉴 헴프셔에서 1819년, 그리고 메사추세츠에서 1833년까지 계
속되었다. 그러나 국교의 교인들은 유럽의 국교회들과는 달리 모든 거주자들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기독교적 체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어떻든 이 교회들
은 국가와 밀접하게 연계되었으며, 세제상의 지원을 받았고, "모이는(gathered)" 교회들이었
다.
뉴 잉글랜드에 있어서 교회 멤버쉽의 문제는 이른바 중도적 언약(the Half-Way Covenant)
을 초래케 했다. 초기 뉴 잉글랜드 회중교회주의자들은 기독교 체험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
들에게만 완전한 교회 멤버쉽이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자제들은 자동적으로
언약에 참여했으며, 유아세례시 그들에게 언약의 증표를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 이 어린이
들이 분별할 수 있는 나이(the age of discretion)에 이르면 그들이 교회에서 완전한 신분을
획득하고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해, 그들에게 개인적 중생(personal regeneration)에 대
한 공적인 고백이 요구되었다. 중도적 언약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는 중생을 공언하지
않은 사람들의 유아들과 관계가 있었다. 이 유아들이 유아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엄
격한 목사들은 부모가 믿는 사람들의 직계 자녀들만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
유주의적 지도자들(liberal leadership)은 언약을 소유한 "거듭나지 않은(non-regenerate)" 부
모들의 자녀들도 세례를 받을 수는 있으며, 그러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으며 투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메사추세츠교회들이 1662년 중도적 언약을 승인했다.
17세기 중엽 또 하나의 논쟁거리가 있었다. 이는 뉴 잉글랜드에서 개발되어 왔었던 회중교
회주의적 교회정치 시스템과 이의 영국의 비평가들 사이의 논쟁이었다. 이 결과로 캠브리
지 강령(the Cambridge Platform)이 캠브리지 대회(the Cambridge Synod, 1646-48)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 대회는 메사추세츠 주의회(the General Court of Messachusetts)에 의해 소
집되었다. 이 대회는 신학적 규준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회중교회주의적 교회정
치 형태를 채택했다. 스위트(W. W. Sweet)는 캠브리지 강령은 "단순히 뉴 잉글랜드 회중
교회주의 조상들의 행정적 경험의 취합"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감독제적 및 장로교적 개념
들에 반대하여, 회중교회주의적 교회정치가 성경적 견해로 제시되었다.
퓨리턴들의 목표는 성경의 "평범한 법칙(plain law)"에 기초한 거룩한 공동체였다. 성경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 그들의 목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그들은 서둘러 하바드 대학(Harvard
College)을 설립했다(1636). 인디언들을 회심시키기 위한 선교적 노력이 강조되었다. 엘리
옷(John Eliot, 1604-90)은 이 사역의 리더였다.
(C) 비국교도. 침례교도들은 거의 처음부터 뉴 잉글랜드에 등장했다. 1665년 한 침례교회
가 보스톤에서 설립되었다. 1656년 퀘이커들이 등장했다. 5년 이내에 5명의 퀘이커들이 보
스톤 공유지(Boston Common)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영국국교회는 1687년 보스톤에서
시작하여 뉴 잉글랜드에서 항구적인 기반을 확보했다.
로드 아일랜드의 식민지는 뉴 잉글랜드에서 가장 특징적인 반국교주의 운동이었다. 1636년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c. 1604-83)에 의해 섭리 식민지(Providence Plantation)가
확립되었다. 그는 그 당시 메사추세츠로부터 추방된 상태에 있었는데, 그의 신학적 원리는
종교 문제에 있어서 국가의 강압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1639년 한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는 미국에서 최초의 침례교회로 불리고 있다. 분명히 윌리엄스는 잠시 동안이나마 이 교회
의 성도였으며, 그리고 나서 "참된 교회(true church)"를 추구하여 "구도자(a seeker)"가 되
었다.
로드 아일랜드 식민지는 궁극적으로 3개의 요소들로 이루어졌다 : 제 1그룹은 윌리엄스의
섭리 식민지였고, 제 2의 그룹은 앤 허친슨에 의해 인도되던, 메사추세츠로부터 추방된 그룹
(Portmouth와 Newport), 그리고 나라간세트 베이의 서안에 정착했던 사무엘 고톤(Samuel
Gorton)에 의해 인도되던 제 3의 그룹이 그것들이었다. 로드 아일랜드 식민지에 관하여 윌
리엄스는 "나는 이것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던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
했다.
사람들을 교회로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정치철학에 기초하여 교회와 국가의 분리
그리고 종교적 자유가 확립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권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자유도 확립되었다. 따라서 로드 아일랜드에서의 종교적 자유는 매릴랜드의
초기 종교적 관용의 범주를 넘어섰다.
로드 아일랜드의 침례교 견해들이 구 퓨리턴 식민지들 전역에 그리고 회중교회주의의 교회
들 내부에서 수용되었다.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부모들의 수가 증가되었다. 1644년 메사추
세츠 주의회는 "유아들에 대한 세례를 공개적으로 정죄하거나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추
방령에 처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하바드대 총장 던스터(Henry Dunster)는 그의 4번째 아이
가 세례받는 것을 거부했다. 1654년 많은 논의 후 사임이 수락되었다.
(3) 중부 식민지들(Middle Colonies).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앵글리칸주의는 남부 식민지들
에서 법으로 확립되었으며, 로드 아일랜드를 제외한 뉴 잉글랜드에서는 회중교회주의가 확
립되었다. 국교 반대 그룹들이 남부와 북부 식민지들 모두에 나타났다. 중부 식민지들에서
만연했던 종교적 자유와 그로 인한 다양성은 일찍부터 존재했다. 뉴 네델란드는 1624년 네
델란드 사람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1628년 최초의 화란 개혁교회가 결성되었다. 미카일리
우스(Jonas Michaelius, 1584-?)가 화란에서 왔는데,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개혁교회들이
법에 의해 설립되었으나, 1644년까지 주민들은 종교적으로 매우 다양했다. 1664년 식민지는
뉴욕으로 바뀌어 영국인들에게 넘어갔다. 법적으로 영국국교회를 국교로 하려는 노력이 있
었으나, 이 의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퀘이커들이 식민지들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점차 종교적 관용이
뒤따랐다. 1672년 조지 폭스(George Fox)의 방문으로 퀘이커 운동(the Quaker movement)
은 매우 안정되게 되었다. 최초의 퀘이커 실험은 일부 퀘이커의 확산이 가능했던 웨스트
저지(West Jersey)에서 시도되었다. 저지들(the Jerseys)이 뉴저지로 합병되던 1702년까지
퀘이커의 영향력은 감소되었다.
1681년 윌리엄 펜(William Penn)은 왕가가 그의 부친에게 지고 있던 빚을 탕감하는 조건으
로 찰스 2세로부터 땅을 양도받았다. 필라델피아가 1682년 건립되었으며, 퀘이커 실험지역
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의 종교의 자유의 정책은 다양한 그룹들 초치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많은 영국 및 웨일즈(Welsh) 침례교도들이 거기에 정착했다. 1707년 필라델피
아 침례교 협회가 최초로 결성되었다. 메노나이트들, 덩커들(Dunkers), 루터파들, 그리고
다른 그룹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인들은 18세기초에 건너와서 식민지들 전역에 정착했다. 매키미
(Francis Makemie, 1658-1708)는 최초의 장로교 리더였다. 그는 1707년 필라델피아에 최초
의 미국 노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최초의 대회는 1716년 결성되었다. 뉴 잉글랜드에서 온
장로교 퓨리턴들(Presbyterian Puritans)은 회중교회가 부과한 제약들을 피해 남진하는 추세
를 보였다. 독립전쟁후 장로교인들은 서진에 진력했다. 그들은 변경의 확장에 발맞추어 확
장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50년까지 백인 주민들의 대다수는 교회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 5%
정도가 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 18세기 미국의 종교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운동은
대각성운동이었다. 이는 독일의 경건주의와 영국의 복음주의적 각성운동과 유사했다.
대각성운동은 뉴저지의 래리턴 계곡(Raritan Valley)에 있던 화란 개혁교회들에서 시작되었
는데, 이는 프렐링호이젠(theore J. Frelinghuysen, 1691-1748)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는 사
람들의 삶에 있어서 종교를 좀 더 역동적인 요인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영향력은 널리
미쳤다.
한 장로교 그룹이 부흥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윌리엄 테난트(William Tennant, 1673-1745)
는 정통적인 퓨리턴이었는데, 목회로 나갈 젊은이들을 훈련하기 위해 필라델피아 북부에 "
통나무 대학(Log College)"을 설립했다(이는 프린스톤의 시조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아
들 길버트(Gilbert, 1703-64)는 부흥운동의 한 리더였다. 테난트 그룹은 의식적 회심
(conscious conversion)에 대한 퓨리턴의 관심을 강조했다. 이는 바른 교리(correct
doctrine)를 강조하던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의 반발을 초래했다("신파[New Side]"는 부흥
운동을 우호적으로 생각했으나, "구파[Old Side]"는 이를 반대했다). 장로교인들은 이 이슈
로 인해 2개의 대회들(synods)로 나누어졌다. 신파그룹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도
움으로 급속도로 성장했다. 두 대회들이 재결합된 1758년까지 부흥운동주의자들(the
revivalists)은 장로교주의(Presbyterianism)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뉴 잉글랜드의 대각성운동은 조나단 에드워즈(1703-58)를 중심으로 했는데, 그는 메사추세
츠의 노템프톤(Northampton)의 회중교회 목사였다. 그는 그의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에서 대각성운동을 묘사했다. 이 운동은 1734-35년 사이에 노템
프톤을 휩쓸었다. 이는 다시 1739년 뉴 잉글랜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회중교회주의 설교
가들은 길버트 테난트의 도움을 받았으며, 공동체들은 변화되었다. 뉴 잉글랜드에서의 각성
운동은 중부 식민지들에서의 부흥운동과 마찬가지로 논쟁거리가 되었다("신광파[New
Lights]"는 부흥운동을 선호했으며, "구광파[Old Lights]"는 이를 반대했다). 촌시(Charles
Chauncy, 1705-81)에 의해 주도된, 대각성운동에 대한 반발은 회중교회주의자들 사이에 알
미니우스 사상 그리고 나중 유니테리언 사상의 확산에 기여했다. "신광파"는 기존 회중교
회주의자들의 교회들로부터 분리해 나가 "분리(Separate)" 회중교회들을 설립했다. 이들 가
운데 일부는 멸절되었으며, 나머지들은 모교회로 복귀했다. 일부는 침례교도들이 되었다.
회중교회주의자 교회(the Congregationalist Church)의 구조는 약화되었다(E. S. Gaustad의
「the Great Awakening in New England」, ch. 7 참조).
대각성 운동의 영향은 남부 식민지들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1740년대와 50년대에 데이비
스(Samuel Davies, 1723-61)에 의해 인도되던 장로교인들은 버지니아와 그 이남으로 확대되
었다. 뉴 잉글랜드에서 온 부흥운동가들은 특히 버지니아에 많은 분리주의 침례교회들을
세웠다. 대각성운동은 범식민지적(intercolonial) 현상이었는데, 이는 독립전쟁이 도래했을
때 식민주의자들을 결속시키는데 일조했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70)는 영국인이었으나, 그의 목회기간의 대부분을 미
국에서 보냈다. 그는 6차례나 미국으로 여행했다. 그는 보기드문 능력의 설교가였다. 그
는 뉴 잉글랜드 및 중부 식민지들 전역에서 설교했으며, 대각성운동을 범식민지적 부흥운동
으로 만들었다.
에드워즈는 조숙한 어린이었는데, 1720년 17세에 예일을 졸업했다. 1729년 노탐프톤에서 목
사가 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설교자와 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그 시대의 과학적?
철학적 작품들을 폭넓게 독서했으며, 특히 로크와 뉴턴의 작품들에 침잠한 후 대각성운동의
배경으로써 퓨리턴적 칼빈주의를 새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대각성운동을 「A
Treatise Concering Religious Affections」에서 방어했다. 교회 멤버쉽에 대한 그의 종교적
기준 및 그가 그의 회중들, 특히 젊은이들의 도덕적 타락이라고 생각하던 것에 대한 비판으
로 인해 1750년 강단으로부터 그는 축출되었다. 그는 메사추세츠의 스탁브리지
(Stockbridge)에 있는 인디언들의 선교사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저술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그가 해석한 칼빈주의를 열렬히 방어했다. 「Treatise on the Will」(1754)에서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자연적(natural)" 능력이 있으나 "도덕적
(Moral)"능력 혹은 경향성은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은총만이 그 능력을 제공
할 수 있으나, 이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프린스톤 대학(Princeton College)의 총장이 된 직후 요절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그
가 얼마 전 저술에 착수했었던 방대한 조직신학은 완성되지 못했다.
뉴 잉글랜드 신학(New England theology)은 에드워즈의 활동의 결과였다. 이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독특한 신학학파이다. 에드워즈는 식민지시대에 있어서 아니 미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신학적?철학적 인물이었다. 뉴 잉글랜드 신학의 최후의 대표자였던 파크
(Edwards A. Park)는 1900년 사망했다.
18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13개 식민지들은 모국으로부터 분리해 나가 미합중국을 건국했다.
식민주의자들과 영국 왕조 사이의 점증하던 갈등(예컨대, "대표없이 과세없다")은 결국 1775
년 전쟁의 발발과 1776년 독립선언(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으로 이어졌다. 1783년
까지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 새로운 민족의 정체(政체)에 관한 토의들은 지지부진했으나,
결국 1789년 미국 헌법의 제정으로 결말이 났다.
독립전쟁 이후 미국 기독교에 있어서 2가지 주요한 발전들은 유럽교회들의 지부들에 불과했
던 교회들이 독립적 신분과 종교적 자유를 획득한 점이다(비국교화, disestablishment).
(1) 독립. 식민지들의 영국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는 1785년 미국에서 프로테스탄
트 감독교회(the Protestant Episcopal Church)가 되었다. 이 새로운 교파는 화이트
(William White, 1748-1836)의 업적이었다. 1787년 화이트 프로보스트와 사무엘 프로보스
트(White and Samuel Provoost)가 캔터베리 대주교에 의해 미국 감독들로 안수받았다(사무
엘 시버그 [Samuel Seaburg]는 1784년 에버딘의 국왕에 대한 충성서약 거부자 스코틀랜드
감독들 [the Nonjuror Scottish Bishops of Aberdeen]에 의해 감독으로 안수받았다).
미국 감리교(American Methodism). 이는 여전히 영국국교회의 일부였으나, 독립을 추구하
고 있었다. 런던의 감독으로부터 미국 성직자들의 안수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장
로들을 안수하고 콕(Thomas Coke, 1747-1814)과 애스베리(Francis Asbury, 1745-1816)를 "
감독자들(superintendents)"로 세웠다. 1784년 볼티모어의 "크리스마스 회의(Christmas
Conference)"에서 콕과 애스베리는 "감독자들"로 지명되었다. 12명의 다른 설교자들이 안수
받았으며, 규율서가 채택되었다. 이렇게 해서 감리교 감독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가 설립되었다. 얼마 안 있어 콕과 애스베리는 자신들을 "감독들"로 부르기 시작했
다.
로마 카톨릭교회. 물론 카톨릭교회는 독립된 교회가 될 수 없었으며, 캐롤(John Carroll,
175-1815)을 미국 감독으로 세울 수 있었다. 1790년 그는 볼티모어의 감독으로 안수받았다.
1791년 최초의 대회가 열렸다. 1808년 캐롤은 대주교가 되었으며, 뉴욕, 보스톤, 필라델피
아, 그리고 바드스톤(캔터키)에 교구들이 설립되었다.
미국 모라비안교회는 19세기까지 유럽으로부터 자치권을 누리지 못했다. 회중교회주의자들,
침례교인들, 그리고 퀘이커들은 물론 자치적이었으며, 독립전쟁으로 인해 조직상 별로 영향
을 받지는 않았다. 장로교도들도 유럽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었으며 교회구조를 재조직할
기회를 포착했다. 위더스푼(John Witherspoon)은 독립선언문(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에 서명한 유일한 성직자였는데, 총회장(moderator)으로 선출되었다.
(2) 종교의 자유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 미국 개신교 교단들의 다양성으로 인해 어느 특정
교회가 주도적인 위치로 부상하는 것이 어려웠다. 광대한 신대륙에서 국교 제도를 시행하
는 것은 불가능했다. 종교적 다양성에 대한 관용은 어느 의미에서 경제적 고려 때문이었다.
노동력의 부족은 종교적 차이를 간과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영국에 있어서의 종교적 관용
의 확대는 식민지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종교적 자유는 일련의 "우파(left wing)" 그룹들,
곧 메노나이트들, 덩커들, 침례교도들, 퀘이커들의 기본원리였다. 로드 아일랜드와 펜실베니
아에서 이러한 그룹들의 대표자들은 기강이 확립된 국가는 종교적 자유 및 교회와 국가의
분리와 양립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렸다. 버지니아
에서 비국교화 정책(disestablishment)은 1785년 시작되었으며 이는 전국에 퍼져나갔다. 회
중교회는 1818년 코네티캇에서, 1819년 뉴 햄프셔에서, 1833년 메사추세츠에서 국교의 신분
을 상실했다. 국가적 수준에서 종교의 자유는 헌법 6조, 곧 "미국에서 직책이나 공적인 책
무(public trust)의 자격 기준으로서 어떤 종교적 평가도 요구되지 않는다"에 잘 기술되어
있다. 헌법에 대한 제 1차 개정(the First Amendment, 1791)은 "의회는 국교를 설정하기
위해서나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기 위해 어떤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교회들은 법 앞에 평등한 자발적 결사들(voluntary associations)이 되었
다.
b. 서부 개척운동 (the Westward Movement). 파리 강화조약(the Peace of Paris, 1763)으
로 프랑스의 미국 "서부(west)", 주로 미시시피 계곡(the Mississippi Valley)의 점령은 끝났
다. 미국에서 소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는 7년 전쟁의 일부였다)은 프랑스인들과 인디언
들을 대항하여 영국인들과 식민지 개척자들이 싸운 전쟁이었다. 영국인들과 식민지 개척자
들의 승리는 험악한 아팔레치아 산맥(the Appalachians)의 개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제
식민주의자들은 서부에서 경쟁관계에 대한 염려가 없는 상태에서 모국과의 관계 문제에 직
면할 수 있었다. 영국에 대한 반란의 목적이 성취된 후에 미국은 서부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물론 식민지 개척의 초기부터 인구의 서진화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독립전쟁 때까지는 영
국의 개척이 아팔레치아 산맥을 거의 넘지 못했다. 1783년 체결된 조약으로 카나다로부터
플로리다 사이 미시시피강 유역의 방대한 영토가 이 신생국에 주어졌다. 1803년 루이지애
나 구입(the Louisiana Purchase)으로 미국의 경계가 서쪽으로 훨씬 확장되었다. 새로운 주
들이 미국에 첨가되었으며, 사람들은 서부로 몰려갔다.
인구의 변경에로의 이동, 곧 19세기말 변경선(the line of the frontier)이 더 이상 보이지 않
을 때까지 계속된 서진(西進)은 미국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는 "자유영토(free land) 지역의 존재, 이의 계속적인 축소, 그리고 미국 개
척의 서진화가 미국 발전을 설명해 준다"고 하는 유명한 가설(thesis)을 주창했다(「the
Significance of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 p. 1). 이 논지는 오랫동안 미국 역사
문헌학(historiography)을 주도해왔으나, 최근 이 이론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미국역
사에 대한 단지 하나의 해석으로 그 중요성이 격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서
진 운동의 중요성은 미국의 발전에 있어서 여전히 한 요인으로 남아있다고 하겠다."
모드(Peter G. Mode)는 「the Frontier Spirit in American Christianity」(1923)에서 미국종
교를 해석하기 위해 변경 가설을 이용했다. 스위트는 그의 미국종교 해석에서 터너가설을
이용했다(특히 그의 「Religion in the Development of American Culture」, 1952 참조).
그는 이동하는 인구들과 자신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연계시킨 교회들이 주도적인 교단들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교회들은 독립전쟁 이후 3가지의 주요 과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곧,
조직, 역동적인 기독교의 부흥, 그리고 서진하는 인구들을 위한 목회가 그것들이다.
(1) 변경 부흥운동(Frontier Revivalism). 변경에 살던 사람들은 독립적이고 강인했다. 그
들은 역경속에서 생존해야만 했다. 이러한 정신이 변경의 종교에도 만연했다. 동부 연안지
방의 세련된 형태의 종교는 거칠고도 황량한 문화에 어필하지 못했다. 오히려 감정적이고
도 즉흥적인 형태의 종교가 선호되었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의 대각성운동에서 표출된 바
를 능가하는 열광과 감정의 동요를 보였다. 대대적인 감정의 폭발을 수반한 옥외 부흥회
(주로 잡목 숲속에서)의 방법은 원래 장로교인들에 의해 이용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침례교
도들과 감리교도들이 이 방법에 의존했다. 원거리 때문에 "천막집회(camp meeting)"가 가능
했다. 사람들은 부흥회 기간 동안 같이 지내면서 은혜 받을 수 있었다. 때로는 몇몇 다른
교단 출신의 설교가들이 같은 캠프 미팅에 강사로 오기도 했다. 부흥운동 초기에 격렬한
감정적?육체적 동요가 나타나곤 했다. 비록 불상사들이 발생하긴 했으나, 부흥회들은 대체
로 변경의 삶의 도덕적 상황을 개선시켰으며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했다. 가
브리엘(Ralph Gabriel) 교수는 "열광적이고, 낙관적이며, 규율잡히지 않은 변경의 서민종교
(folk religion)는 좀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낭만주의 정신의 표현을 대변했
다. 이 종교는 힘이 있었다. 이는 변방의 심대한 악들을 제어하는데 일조했다. 이는 미국
사회에 20세기까지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Shelton Smith, 「American Christianity」, vol.
Ⅰ, p. 561). 변경 부흥운동은 미국종교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과학적 용어로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일반적으로 다음 특징들이 변방 경험
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개인주의, 감정주의, 자립심, 모종의 유토피아 사상, 실지훈련,
실용주의, 모종의 반지성주의적 성격, 회심에 대한 강조(이는 과거 퓨리턴 사상과 관계성이
있음), 극적인 설교, 말과 매너에 있어서 조야한 교회 스타일, 교회 건축과 예전상의 소박함
(이는 또 다시 과거 퓨리턴 사상과 관계가 있음), 그리고 도덕주의적 경향 등이다. 물론 미
국종교의 이러한 요소들은 형태상?내용상 다양한 모습으로 존속해 왔으며, 보편적인 미국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었다. 서진 운동과 이 요소들의 정확한 관계성은 물론 규명할 수가 없
다. 그러나 스위트의 가설에 대한 수정주의자들(revisionists)은 다른 극단적 견해에 반대했
으며, 따라서 변경의 영향을 매우 가볍게 다루었다.
침례교와 감리교의 급속한 성장의 주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변경 부흥운동이었다(성장 과
정은 침례교도 농부 및 교사 설교자들 그리고 감리교 순회 설교자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장로교주의(Presbyterianism)에 있어서 부흥회들은 교회 분열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흥회 지지파(pro-revivalist) 컴버랜드(켄터키) 노회는 1816년 컴버랜드 장로교(the
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로 발전되었다. 오늘날 주로 켄터키와 테네시에 존속하
고 있는 이 교회는 온건한 칼빈주의를 추종하는 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사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엄격한 학문적 자질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1803년 장로교회에 있어서 "신광파" 분열은 스톤(Barton W. Stone)에 의해 촉진되었는데,
그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독립된 노회를 결성했다. 얼마 안 있어 이는 해체되었으며 "크리
스챤"이란 칭호가 이 운동의 이름으로 선택되었다. 또 하나의 분열이 보수적인 세세데 장
로교인들(Seceder Presbyterians)로부터 생겨났다. 토마스 캠프벨(Thomas Campbell,
1763-1854)은 한 그룹을 리더하여 소위 "워싱턴 기독교협회(the Christian Association of
Washington)"를 결성했다. 이는 그가 사도적 패턴으로 간주했던 바 기독교 연합을 복구하
려던 노력이었다. 알렉산더 캠프벨(Alexander Campbell, 1788-1866)은 1809년 펜실베니아
로 왔으며, 곧 이운동의 리더가 되었다. 1811년 브러쉬 런 교회(the Brush Run Church)가
결성되었다. 성경공부의 결과 이 그룹은 침수에 의한 믿는 자들의 세례(believer's baptism
by immersion)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는 레드스톤 침례교 협회(the Redstone Baptist
Association)와 결합했다. 두 캠프벨들의 견해 때문에 침례교와의 긴장이 조성되었다. 그
는 세례는 구원의 과정에서 한 단계로 생각했으며, 그러므로 이는 어느 면에서 본질적이었
다. 주님의 만찬은 매 주일에 시행되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따라서 캠프벨파들(the
Campbellites)은 침례교와의 연합에서 탈퇴했다. 1832년 그는 바톤 스톤의 추종자들과 결합
하여 주님의 제자들(the Disciples of Christ)을 결성했다. 이 운동은 계속되었다. 연합을
강조하던 사람들("Christian Church")과 사도적 질서를 강조하던 사람들("Churches of
Christ")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부흥운동 추세로부터 다른 교단들이 생겨났다. 오터바인(Philip W. Otterbein, 1726-1813)과
봄(Martin Boehm, 1725-1812)에 의해 1800년 그리스도 연합 형제교회(the Church of the
United Brethren in Christ)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올브라잇(Jacob Albright, 1759-1808)에
의해 복음주의 협회(the Evangelical Association)가 조직되었다. 이 두 그룹들은 나중 연합
되어 복음주의 연합 형제교회(the Evangelical United Brethren Church)가 되었다. 이 교회
는 1968년 연합 감리교회(the United Methodist Church)를 결성하기 위해 감리교도들과 연
합했다. 1939년 3개의 감리교회들의 재연합의 결과 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가 결
성되었다. 세이커들(Shakers)이라 불리던 군소 종파가 그들의 주요 리더였던 앤 리(Mother
Ann Lee, 1736-84)의 사망 후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19세기 초에 변경 부흥회들의 영향
을 받은 지역들에서 새로운 팽창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변방 부흥회들의 결과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복음주의적 해석이 득세했다. 이는 감정적으
로 확인할 수 있는 체험으로서의 회심에 대한 강조, 죄의식, 그리고 신앙을 유발하는 것이
목적인 카리스마적 설교에 대한 강조, 명백한 규범들을 가진 엄격하고도 개인주의적 도덕성
을 특징으로 하는 기독교적 삶에 대한 강조, 찬송과 간증을 통한 회중의 참여에 대한 강조,
그리고 "정통주의"와 "불신앙(infidelity)"의 위험에 대한 강조를 의미했다. 마지막 문제와
관련하여 제 2차 대각성운동에서 동부와 서부 지역들 모두에서 정통주의는 불신앙에 승리했
던 것이다.
c. 논쟁, 분열, 새 운동들, 노예제. 미국 종교에서 약 1830년부터 남북전쟁(the Civil War)까
지는 격동과 논쟁과 분열의 기간이었다. 만약 미국의 건국부터 1830년경까지의 기간이 민
족주의를 특징으로 했다면, 그 이후로부터 남북전쟁까지의 기간은 교회와 국가에 있어서 파
벌주의(sectionalism)를 특징으로 하던 시기였다. 국가가 각자의 문화, 경제, 그리고 이데올
로기를 가진 2개의 분명한 영역으로 분리될 때까지 노예제(slavery)는 점차 결정적인 요인
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1) 논쟁과 분리
(a) 장로교인들은 논쟁으로 인해 나누어졌으며, 결국 1837-1838년의 분열이 초래되었다. 연
합계획(the Plan of Union, 1801)은 변경에서 선교 수단들을 공유하기 위해 장로교인들과 회
중교회주의자들 사이에 맺은 협약이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장로교인들은 장로교회에
대한 회중교회의 영향을 사시로 보기 시작했으며 이 연합계획에 비판적이었다. 뉴 잉글랜
드에 기원한 새로운 신학적 조류들은 위험해 보였다. 이단 재판들이 이어졌다. 필라델피아
제 1장로교회 목사 반즈(Albert Barnes)는, 비록 다음 총회에서 그 결정이 번복되긴 했으나,
그의 대회에 의해 강단에 서는 것이 금지되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혹은 구파(Old
School party)는 그들의 "자유주의" 동료들을 이단으로 정죄했으며, 그들의 노예폐지 노선
(the abolitionist stance on slavery)을 반대했다. 그 결과는 분열로 이어졌다. 찰스 하지
(Charles Hodge)가 인도하던 프린스톤 신학교 그룹이 구파를 주도했으며 총회소속 교회들
의 40%를 이끌었다. 따라서 구파 총회가 결성되었다. 1838년 신파는 분리된 총회를 결성
했다. 이는 신학적 입장에 있어서 관대했으며, 자유주의적이었고, 대체로 반노예주의적이었
다.
(b) 이 기간에 감리교회 내에 고교회와 저교회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루터교는 교회 내
두 파가 개입된 더 치열한 논쟁에 휩싸였다. 한 파는 루터교를 미국화시키는 것과 신앙고
백적 신학의 자유주의적 해석을 선호했다. 다른 파는 독일어 사용과 특히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엄격한 준수를 강조했다. 이 논쟁의 결과 월터(C. F. W. Walther)가 인도
하던 보수적인 미주리 대회(Missouri Synod)가 생겨났다.
(2) 이 기간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거의 "새로운" 운동에 해당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들의 증가는 주로 아일랜드와 독일로부터의 이민 때문이었다. 아일랜드
인들(the Irish)은 동부 해안지역을 따라 정착했다. 독일인들은 중서부(the Midwest)를 향
해 내지로 이동해왔다.
순수하게 "새로운 운동들(new movements)"이 이 시기에 나타났다. 몰몬교(Mormonism),
밀러파 운동(the Millerite movement), 영성주의(Spiritualism), "공산주의적 시도들
(Communistic experiments)", 그리고 개혁운동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a) 몰몬교. 이는 서부 뉴욕에서 생겨났다. 창시자인 요셉 스미스(Joseph Smith)는 그의
부부와 함께 파마일라(Palmyra) 타운에 정착했다. 어린 스미스는 자주 환상을 보았다. 한
번은 환상에서 서방 세계의 성경이 근처 언덕에 숨겨져 있다고 하는 소리를 천사 모로니
(Moroni)로부터 들었다. 결국 1827년 9월 22일 발굴해 내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이 "개혁
된 이집트어(reformed Egyptian tongue)"로 새겨진 얇은 황금판들로 되어 있었다고 했다.
몰몬경(the Book of Mormon)은 스미스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4명의 보조자들이 받아 적었
다. 그리고 황금판들은 스미스에게 이것이 묻혀 있는 것을 알려준 그 천사에 의해 옮겨졌
다고 한다.
몰몬경의 실제적 기원은 비밀에 싸여 있다. 아마 몰몬경은 스폴딩(Solomon Spaulding)이
지은 미출판 소설에 기초하고 있는 듯하다. 이의 기원이 어떠하든 간에 이는 무수한 추종
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1830년 4월 파예트(Fayette)에서 교회가 설립되었다. 몰몬교
도들은 곧 오하이오주의 커크랜드(Kirkland, 1831-37)로 옮겨갔다. 전직 침례교 목사였던
리그던(Sidney Rigdon)이 초기 역사에서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서 브리검 영(Brigham
Young)이 이 운동에 가담했다. 그들은 거기서 미주리(Missouri)로 옮겨갔다. 거기서 다시
여러 가지 난관으로 인해 일리노이로 건너가 나부(Nauvoo, 1840-46)로 갔다. 얼마 안 있어
이는 이 주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여기에서 스미스는 1843년 7월 일부다처제
(polygamy)를 허용하는 계시를 받았다. 이는 이 도시에 분열을 촉진시켰다. 「Exposito
r」이라고 하는 신문이 그의 부도덕성에 반대하기 위해 창간되었다. 이의 편집자가 체포되
고 인쇄기가 파괴되었을 때 몰몬교도들을 반대하는 시위가 뒤따랐다. 주 국민군(militia)이
개입했다. 스미스와 그의 형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844년 6월 7일 밤 국민군의 지원을
받은 듯한 군중들이 감옥으로 진입하여 두 형제들을 살해했다.
2년 후 브리검 영이 인도하던 몰몬교도들은 나부를 떠나 서진을 계속하여 그레잇 솔트 레이
크 계곡(the Valley of the Great Salt Lake)로 옮겨갔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말일 성도교
회(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the Latter?day Saints)의 본부가 되었다. 이는 강력한
사회적?경제적 기관이다. 선교사들이 국내외로 파송되었다. 유타의 솔트 레이크시는 몰몬
주의의 심장부가 되었다. 거대한 예배당(tabernacle)이 건축되었다. 오늘날 "테버너클 합창
단"과 파이프 오르간은 라디오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에반즈
(Richard Evans)의 설교들이 널리 방영되고 있다.
몰몬주의의 강점은 이의 독특한 신학보다도 이의 문화에 있다. 이는 이의 신도들에게 경제
적 뿐만 아니라 우주적 안정감(a sense of security)을 준다 이는 "미국 중산층(Middle
America)"과 결합했다. 이의 윤리는 매우 퓨리턴적이다. 그리고 이의 정치관은 보수적이
다.
(b) 밀러파 운동(the Millerite Movement). 이는 침례교 배경을 가진 뉴 잉글랜드 농부의 예
언적 설교로부터 생겨났다. 그는 다니엘서와 계시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정확한 재림의
날을 예언했다. 그는 1843년 3월 21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다고 못박았다. 그는 1831
년 8월 그의 선교에 착수했다. 1839년 그는 보스톤의 차돈 스트릿 침례교회(the Chardon
Street Baptist Church)에서 설교했는데, 얼마 안 있어 동부 전역에서 유명해졌다. 「한 밤
의 도시(the Midnight City」와 같은 재림파 저널들이 등장했다. 새로운 유의 복음이 신속
하게 전파되었다. 그날이 도래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밀러는 그의 추종자들
에게 그는 정확한 재림의 날짜를 설정한 적이 없었으며, 이 영광스러운 사건은 이듬 해에
일어날 것이므로 믿음을 잃지 말고 기다리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1844년 3월 21일 여전
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도래하지 않으셨으며, 그 날은 지나갔다.
이 운동은 계속되었으나 카리스매틱한 리더의 부족으로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다. 1846년
제 7일 안식일 재림파(the Seventh-Day Adventists)는 유대교 안식일(토요일) 문제로 재림
파 운동(the Adventist movement)의 주류로부터 분리해 나갔다. 안식교는 토요일이 참된
예배의 날이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와 같은 다른 그룹들이 결성
되기도 했다.
(c) 영성주의(Spiritualism). 이는 이 시기의 또 하나의 현상이었다. 가장 초기의 영성주의
적 시현(spiritualistic manifestations)은 몇몇 세이커 그룹들 사이에서 발생했다(1837). 그러
나 처음으로 널리 알려진 현상은 1847년 서부 뉴욕의 폭스 자매들(the Fox sisters :
Margaret and Kate)과 관련이 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지성적 존재들이 일으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그들에게 들렸다. 1855년까지 약 2백만의 사람들이 영성주
의를 믿었다. 중요한 것은 똑똑하는 소리, 탁자가 뒤집혀짐, 그리고 자서(automatic
writing)를 통한 소위 산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이 운동은 오늘날에
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의 주창자들은 로지 경(Sir Oliver Lodge)과 코난 도일경(Sir Conan
Doyle)이었다. 근래 영성주의와 관련된 것으로는 심령 연구(psychic research)와 초심리학
(parapsychology) 그리고 초감각적 인지(extrasensory perception) 등이 있다.
(3) 흑인 노예제(Negro slavery). 이는 미국 교회들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모든 교회는
노예제와 관련하여 성장했으며, 또한 가장 심각한 교회 분리들이 이 노예제 때문에 발생하
게 되었다.
1562년 호킨스(John Hawkins)에 의한 최초의 영국 노예선이 아프리카 서안으로부터 서인도
제도(the West Indies)로 노예들을 수송했다. 1세기 후 노예 매매를 주목적으로 하는 왕립,
아프리카 회사(the Royal African Company)가 설립되었다. 18세기 중엽까지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모든 뉴 잉글랜드 식민지에서 노예들을 볼 수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 때까지 메
사추세츠에 6천명의 노예가 있었다. 노예제에 대한 강렬한 반대의 목소리가 교회들 사이에
제기되었다. 이 반대는 영국에서 복음적 부흥운동과 관련된 인도주의적 정신과 미국 독립
전쟁의 리더들의 자유주의 사상의 확산에 의해 강화되었다. 크리스마스 컨퍼런스(the
Christmas Conference, 1784)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회원들에게 1년 이내에 그들을 석방
할 것을 규정했다. 비록 이는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감리교도들 가운데 퍼져 있던 노예제도
반대의 분위기를 잘 대변해 준다. 1789년 버지니아 침례교회의 중앙위원회(the General
Committee)는 "노예제도는 폭력적인 자연권 박탈이다"고 선언하면서 이를 "엄청난 악"으로
묘사했다.
스위트는 1830년까지 노예제도에 대한 자세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믿었다. 이에 앞서, 노예
제도에 대한 반대는 실제적이라기 보다도 이론적이었다. 일부 노예 소유자들은 실제로 노
예제도 반대 협회들에 가입되어 있었다.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교인들은 노예제 폐지 결의
를 기꺼이 지지했다. 1830년경부터 노예제도 반대 감정은 호전적으로 돌변했으며, 노예제
찬성의 주장도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왜 그랬을까? 영국의 방적기 및 방직기의 발명으로
인한 새로운 목화 시장의 등장, 그리고 휘트니(Eli Whitney)의 조면기(cotton gin)의 발명이
주요한 요인들이었다. 목화 생산에 관한 통계를 보면 잘 알수 있다. 1791년과 1795년 사이
5백 20만 파운드, 1826년에서 1830년까지 3억 7백 2십 4만 4천 4백 파운드를 생산했는데, 양
기간 사이에 600% 이상 생산량이 증대되었다. 1820년 목화는 미국 수출의 22%를 차지하
고 있었으며, 1860년에는 57%를 차지했다. 목화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목이었다.
대부분의 목화는 남부에서 생산되었으며, 남북전쟁 이전의 남부 지도자들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목화 생산의 증대는 노예제와 밀접하게 관계될 수밖에 없었다.
스위트는 노예제 상황을 변화시킨 제 2의 요인을 지적했다. 곧, 특히 뉴 잉글랜드에서의 호
전적인 노예제 반대운동이 그것이었다. 게리슨(Lloyd Garrison)(「Liberator」)과 필립스
(Wendell Phillips)는 노예제로부터의 해방의 복음을 설교했다. 남부에서 노예제가 점점 더
중요해지자 노예제 페지론(abolitionism)이 동부와 북부에서 더욱 격렬해졌다. 이러한 사회
적 분열 현상은 교회들 내부에도 그대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북부 교인들의 노예제 반대
주장과 남부 교인들의 노예제 찬성이 그것이었다. 남 케롤라이나의 퍼만(Richard Furman)
은 "노예 소유의 권리가 개념적으로만이 아니라 예증적으로 성경에 확립되어 있다"고 주장
했다. 노예제를 정당화시키는데 인용된 성경구절 가운데 일부는 엡 6:5, 딛 2:9, 벧전 2:18,
그리고 빌레몬서 등이었다.
침례교, 감리교, 그리고 장로교의 분리는 노예제 이슈로 인해 촉진되었다. 최초의 전국적
침례교 조직은 1814년 결성된 3백주기 컨벤션(the Triennial Convention)이었다. 1841년 모
임에서 노예제는 주요한 토의 의제였다. 1844년 이 이슈가 다시 등장했으나, 옆으로 밀려났
다. 이 이슈는 국내 및 해외 선교부들이 결정하도록 그들에게 일임되었다. 국내 선교부는
조지아의 제임스 리브스(James E. Reeves)가 노예 소유자라는 이유로 그를 선교사로 임명
하는 것을 거부했다. 해외선교부는 일라바마주 컨벤션이 노예 소유자가 선교사가 될 수 있
는지 여부에 관한 질의에 대해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 이러한 노예제 반대의 입장에 대한
대대적인 반발은 1845년 5월 8일 조지아의 아우구스타(Augusta) 회합에서 표출되었으며, 결
국 여기에서 남침례교 컨벤션(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이 결성되었다.
감리교와 장로교의 노예제 이슈로 인한 구체적인 분리의 과정은 침례교회의 그것과 다르긴
하나, 근본적인 원인들은 동일했다. 곧, 노예제에 대한 의견의 차이로 적대감이 고조된 점
이다. 남부 감리교 감독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가 1845년 5월 1일 켄
터키 루이빌(Louisville)에서 조직되었다. 1861년 아우구스타에서 남부 연방주들(the
Confiderate States of America)의 장로교회가 결성되었다. 이는 남부 연방주들의 구파 대
회들(the Old School Synods)과 노회들로 구성되었다. 주로 북부 출신인 신파 장로교인들
(New School Presbyterians)은 1870년 구파 장로교인들 가운데 남부 연방주들의 장로교회
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과 재결합했다. 미국의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은 1983년 미합중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U.S.A)]를 형성하기 위해 연합했다.
3. 남북전쟁(the Civil War)으로부터 제 1차 대전까지.
a. 남북전쟁. 이는 특히 남부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종교적인" 전쟁이었다. 기독교와 애
국심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부 침례교 컨벤션은 1861년 남부 연방(the
Confideracy)을 지지하는 일련의 결의안들을 채택했다. 그 결의안들 가운데 하나는 남부군
들(Gray)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모든 교회들은 육군과
해군에 군종들을 파송했다. 감리교도들은 북부 연합군(the Union Army)에 500명의 군종을
파송했다. 군인들을 위한 부흥집회들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군인은 남군교회?북군교회로
나뉘어 예배를 드리곤 했다. 1863-64년 사이 한 연속된 집회가 북 버지니아 군대를 휩쓸었
다. 미성서협회 및 문서협회와 같은 각종 기관들이 군인들 사이에서 활동했다.
톤웰(John H. Thornwell)과 파머(Benjamin Palmer) 같은 설교자들은 남부의 주장에 대해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일반적으로 남부 목사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예정된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의무감에서 노예제를 방어했다. 주인의 권리는 노예의 노
동에 관한 것이지 노예 자체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프린스톤의 찰스 하지(Charles Hodge)
는 노예제 찬성의 견해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노예제를 방어하기 위해 남부 설교자들이 널
리 인용했던 성구는 엡6:5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남북 전쟁은 민족을 분열시켰다. 물론,
이 분열은 19세기 전반 60년 동안 조성된 상이한 문화들에 기인하고 있었다. 남부는 인종
의 구성상 앵글로 색슨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북부는 구 대륙의 다양한 국가들로부터 온 사
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부는 목화 재배를 주종으로 하는 농업문화였으며, 북부는 점점
더 제조업의 중심지로 변모되어갔다. 남부의 사회적 구조는 대체적으로 계층질서적이었다.
거대한 플랜테이션(plantation)을 소유하며, 목화밭에서 일하며 그들의 백인 소유자들을 시중
들던 노예들을 거느리던 대농장 지주들(the planters)에 의해 귀족사회가 형성되었다. 니그
로 "아줌마들"이 부엌에서 일하면서 백인 주인들의 애를 키웠다. 어느 의미에서 플랜테이
션 시스템은 중세의 봉건주의와 유사했다. 부요한 백인들에게 이는 은총과 여유의 삶이었
는데, 이 삶의 중심에 백인 여주인이 위치했다. 북부 사회는 훨씬 덜 조직적이었으며, 더
개방적이었고, 더 유연성이 있는 사회였다. 북부의 문화는 더 코스모폴리탄적이었으며, 덜
종교와 연계되어 있었다.
b. 전후
(1) 니그로 교회들(여기에서 "니그로(Negro)"란 말은 역사적 의미를 가지며, 인종차별적 의
미를 가지지 않는다. 1960년대에 "흑인(Black)"이라는 말이 "니그로"란 말을 압도하게 되었
으며, 현재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이란 용어가 득세하고 있다.) 남북
전쟁 이전 흑인들은 일반적으로 백인 교회들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보통 특별히 그
들을 위해 만든 발코니에 의해 그들은 백인들로부터 격리되었다. 전쟁 이후에 니그로교회
들이 신속하게 조직되었으며, 교회 내에서의 분리가 이제는 교회 사이의 분리로 변모되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왜 대부분의 흑인들은 그들의 이전 주인들의 교회로부
터 이탈했는가? 이러한 이탈은 그들이 획득한 새로운 자유의 상징적인 표현이었다. 한편
거의 아무 백인교회도 노예제 아래서보다 더 나은 위상을 흑인들에게 부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구분된 지역에 앉아 있을 때 그들은 교회의 일들에 대해 어떤 발언권도 없었
으며, 직분도 맡을 수 없었다. 노예제가 불법화된 이후에도 이러한 현상은 마찬가지였다.
흑인들이 백인교회들을 떠난 제3의 이유는 그들이 이미 백인의 설교에 식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핀레이(Molly Finlay)의 증언이 전형적인 설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설교자는
단지, "당신의 주인을 섬기시오, 당신의 주인의 고기를 훔치지 마시오, 당신 주인이 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하시오"라고 선포했다. 아무리 백인 설교자들이 선한 의도에
서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노예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경험해보지 못한 자
들로서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선포할 수 없었다.
흑인 종교에 대해 한가지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노예제로부터 흑인 영가(the Negro
spirituals)가 등장했다. 터만(Howard Thurman)은 그의 「니그로 영가는 삶과 죽음을 이야
기 한다(the Negro Spiritual Speak of Life and Death)」에서 흑인 영가는 흑인교회의 가장
지속적인 공헌이다고 했다.
(2) 재편입(the Reconstruction)과 그 이후. 남부는 패전하고 말았다. 이의 결과는 오늘날
에도 남부 문화에서, 일인당 평균 소득에서, 그리고 교육수준에서 여전히 나타난다. 남부의
삶은 전후에 더욱 더 내부지향적이 되었다. 일인당 평균소득과 교육수준은 미합중국의 다
른 지역들보다도 낮다.
바우어즈(Clauce Bowers)는 남부의 전후의 기간(the post-war period)을 "비극적인 시기
(the Tragic Era)"로 묘사했다. 역사가들은 이를 재편입이라고 하나, 이 용어는 매우 부정
확하다. 이는 실제로 비극의 시기였다. 그들은 뉴 올리언스, 루이지아나, 그리고 다른 도시
들에서의 소규모 카톨릭 밀집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로테스탄트 영역이었다. 더욱이,
교회들은 앵글로 색슨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전통은 현상유지를 선호
하는 퓨리턴주의 및 부흥운동(revivalism)의 전통이었다. 이는 사상적으로 개인주의적이고
중말론적이었으며, 미국에서 발아하고 있는 산업주의(industrialism)가 대중들에게 미친 부정
적인 혹은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 별로 민감하지 않았다.
철로가 국가를 결속시켰다. 풍부한 천년자원이 탐사되고 개발되었으며, 미국의 얼굴이 변모
되고 있었다. 삶의 수준이 일부 사람들에겐 개선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삶은 더 어려워
져 갔다. 막 생성하고 있던 산업주의는 이전에 사람들이 꿈꿀 수 없었던 부를 창출했으며,
동시에 이는 착취공장(sweatshop), 어린이 노동, 장시간 노동, 그리고 특히 특별한 기술이
없는 노동자들에 대한 저임금의 문제를 야기시켰다.
(3)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성결파 운동(the Holiness movement)과 오순절 운동
(Pentecostalism)이 등장했다. 성결파 운동은 감리교 주류로부터 분리해 나와서 웨슬레의
감리교주의(Wesleyan Methodism)에서 완전주의 요소(the perfectionist element)를 영속화시
켰다. 오순절 운동은 성결파 운동으로부터 분리해 나갔는데, 후자는 "방언(speaking in
tongues)"을 거부했다.
c. 이른바 흔히 "사회적 복음(the social gospel)" 이라 불리던 운동은 남북 전쟁후 산업상의
전환기에 등장했다. 이 운동은 "기존의 기독교의 사상 조류에 대한 미국의 가장 독특한 공
헌"으로 일컬어진다. 기독교 복음의사회적 의미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상황에 대해
고찰해보자. 1870년 중반부터 1880년대까지 노동쟁의(industrial strife)가 미국에서 확산되
었다. 1886년만 해도 경영진과 노동자들 사이에 임금, 노동시간, 노동조건 등의 문제들에
관해 무수한 쟁의들이 발생했다. 1892년 펜실베니아의 홈스테드(Homestead)에 있는 카네
기 철강회사(the Carnegie Steel Company)의 격렬한 스트라이크가 임금 삭감과 철강 노동
자들의 노조에 대한 회사의 인정 거부로 인해 발생했다. 시카고의 풀만 팰러스 자동차 회
사(the Pullman Palace Car Company)의 노동자 파업은 임금의 과도한 삭감으로 인해 발생
했다. 대체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현존하는 사회구조 속에서의 개인의 구원에 대해 강조했을 따름이다. 기독교 윤리는 개인
적 도덕성을 중시했다. 사회적 문제들은 개인들을 회심시킴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
다. 사회적 이슈들에 민감한 기독교인들의 대답은 많은 노예 소유자들이 회심을 고백했음에
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예들을 여전히 보유했다는 것이다. 노동과 교회 사이에 괴리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는데, 이는 어느 의미에서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사회적 복음"을 낳은 또 하나의 접근법이 존재했다. 독일의 리츨과 미국의 채닝
(Channing) 및 부쉬넬(Bushnell)과 관련된 신학의 자유주의적 경향들은 현실에 안주하는 경
직된 칼빈주의에 회의를 품었다. 과학적 접근법을 원용하는 사회학 연구의 태동이 모종의
역할을 했다. 이는 또한 퓨리턴들로 하여금 거룩한 기독교 사회공동체(a holy
commonwealth)를 건설하도록 대서양을 건너게 했던 꿈과 관련이 있었다. 이 운동의 주요
인물에는 글래던(Washington Gladden, 1836-1918), 스트롱(Josiah Strong, 1847-1916), 피바
디(Francis G. Peabody, 1847-1920), 그리고 특출한 인물이었던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가 있었다. 그가 저술한 3권의 책들이 사회적 복음을 미국 전역에 미치게
했다. 「기독교와 사회적 위기(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1907), 「사회적 질서
의 기독교화(Christianizing the Social Order)」(1912), 그리고 「사회적 복음의 신학(the
Theology of th Social Gospel)」(1917)이 그것들이다. 시카고 대학의 신학부(the Divinity
School)는 예수의 사회적 가르침들에 대한 연구센터가 되었다(Shailer Mathews).
프로테스탄티즘은 이 이슈에 관해 의견이 나누어졌다. 특히 남부에서 대다수는 사회적 복
음 운동에 회의적이었다. 거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사회적 기독교(social
Christianity)의 "자유주의적" 신학적 기반이 그들에게 의심스러워 보였다. 그러므로 상부구
조(superstructure)도 의심스러웠다. 사회적 복음의 많은 리더들이 취했던 정치적 입장은
좌파적이었으며, 따라서 이 운동에 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는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운동의 도시적 성격은 소읍이나 시골에 사는 사람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d. 신학적 논쟁. 부쉬넬과 라우센부쉬가 취한 신학적 입장은 프로테스탄티즘에 경종을 울
렸다.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을 성경에 적용하고 진화론을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활동
하시는 한 원리로 간주함으로써,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려는 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이
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규범적인 기독교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던
것으로부터 이 운동이 과격하게 이탈하자 긴장이 삼화되었다. 시카고 대학의 신학부는 "모
더니즘(modernism)"의 센터가 되었으며, 매튜스는 이 신학부의 학장으로서 이 운동의 탁월
한 옹호자였다. 이러한 추세들에 대한 반대 입장은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고 하는
운동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 타이틀은 1910년 발간된 「the Fundamentals : A Testimony
to the Truth」란 제하에 일련의 팜플렛으로부터 왔다. 2명의 부요한 평신도의 재정지원으
로 2백 50만부나 발행되었는데, 거기에서 이른바 근본적인 5대 기독교 진리를 개진했다. 여
기서 근본적인 교리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birth of Christ), 그
리스도의 육체적 부활(His bodily [physical] resurrection), 성경의 완전한 무오류설(the
complete inerrancy of the Scriptures), 그리스도의 대리적 구속(the vicarious
[substitutionary] atonement),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박한 개인적(육체적) 재림(the imminent
personal [physical] second advent of Christ)(주로 전천년설)이다. 이 논쟁은 1차 대전후
격화되었다.
e. 크리스챤 사이언스 교회(the Church of Christ, Scientist)의 등장. 이는 크리스챤 사이언
스교회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기간에 등장했다. 에디 부인(Mrs. Mary Baker Eddy)은 이의
설립자였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신경질환을 앓고 있었다. 큄비(P. P. Quimby)라는 사람
에 의해 그녀는 완쾌는 아니었지만 회복될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어떤 원
고를 복사했다. 이 자료가 그녀의 저술 「Science and Health with Key to the Scripture
s」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녀는 큄비에 의존한 사실을 부인했다. 크리스찬 사이언스는 악,
질병, 그리고 죽음은 "죽을 영혼들의 환상"이라고 가르쳤다. 이 운동은 메사추세츠 린
(Lynn)에서 조직되었다. 1882년 본부를 보스톤으로 옮겼다. 크리스찬 사이언스는 미국 전
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세계적으로 뻗어 나갔다. 여러 가지 "새로운 사상(New Thought)"
운동들이 이로부터 나타났다. 진정한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질병은 기본
적으로 기능적 질환(functional disease)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찬 사이언스와 모든 믿음에
의한 치유(faith healing)의 문제점은 어떤 질병은 기본적으로 기질성의 질환(organic
disease)임을 인정하지 않는데 있다.
제 1차 대전. 몇몇 주목할만 한 예외들을 제외하고, 미국에서 제 1차 대전은 성전(a holy
crusade)으로 취급되었다. 아브람스(Roy H. Abrams)는 그의 「Preachers Present Arms」
에서 이런 사상을 잘 표현했다. 연방 위원회(the Federal Council)의 의장이었던 노스
(Frank Mason Noth)는 "의를 위한 전쟁은 승리할 것이다! 이 전쟁에 그들의 몫을 담당하
게 하자"고 선언했다. 또 한명의 유명한 설교가는 "그리스도는 평화주의자(a pacifist)였는
가?"고 질문을 던진후,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는 가장 위대한 전
사였다"고 답변했다. 평화주의자 목사들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50명 이상의 목사들이 체
포되었다. 전쟁을 지지했던 포스틱(Harry Emerson Fosdick, 1878-1969)은 정전후 전쟁을 열
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평화주의 목사가 되었는데, 다시는 "전쟁을
축복하지(bless war)" 않겠다고 공언했다.
4. 혼란과 희망의 세기들(1920-1991)
a. "격동의 20년대(the roaring twenties)"는 제 1차 대전 이후의 시기를 잘 묘사해 준다.
하딩(Warren Harding)은 1920년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정상(normalcy)"에로의 복귀를
언급했다. 이는 민족주의와 높은 관세 장벽들(high tariff walls)을 의미했다. 주류의 제조
와 판매의 금지가 1920년 발효되었다(헌법에 대한 제 18 수정조항). 이는 1930년대 초에 무
효화되었다.
1920년대는 "정상"의 시기가 아니었다. 표면상 미국은 상대적으로 평온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스캔덜이 하딩 행정부를 강타했다. 그는 기업에 유익하고, 미국에 유익한
것이면 무엇이든 그것들에 헌신했다. 이러한 부러워할 만한 미국의 삶의 이면에는 알 카폰
(Al Capone)과 같은 "주류 밀매업자들(bootleggers)"이 번창했다. 술은 "밀주 판매상
(speakeasys)"에서 구할 수 있었다.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와 피츠제랄드(F. Scott
Fitzgerald)가 썼던 "잃어버린 세대(the lost generation)"는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들에 대해
회의했던 젊은이들로 이루어졌다. 이는 "왈가닥의 세기(the flapper era)"와 "재즈 시대(jazz
age)"였다. 이 시대의 경박함과 가치관의 부재에 대한 비판은 크라취(Joseph Wood
Krutch)의 「근대적 열기(Modern Temper)」에 잘 기술되어 있다.
미국교회들 사이에 국가의 전반적인 번영에도 불구하고 선교와 다른 자선 사업들에 대한 노
력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근본주의자들과 근대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은 더 격화되었다.
예컨대, 근본주의자들은 프린스톤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장악하려고 했
다. 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메이첸(J. G. Machen)이 이끄는 일부 교수진들이 이 신학
교를 떠나 1929년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the Westminster Seminary)를 설립
하고 성경 장로교회(the Bible Presbyterian Church)를 시작했다.
진화론을 가르치던 스콥스(John T. Scopes)의 소송사건은 전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이 소
송사건이 개최된 테네시의 데이톤(Dayton)가 중심 무대였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은 진화론은 기독교의 영원한 적으로서, 이는 인간사에서 하나님을 제거해 버리며 성
경의 권위를 부인한다고 주장했다. 다로(Clarence Darrow)는 브라이언에게 가차없고 조소
섞인 심문을 했다. 스콥스는 벌금형에 처해졌으며, 이 논쟁은 이것으로 끝났다. 1주후에
브라이언은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도덕적 이상주의(moral idealism)와 미국인의 단순한 미
덕들을 상징하던 한 지도자의 생애의 종언을 의미했다. 이제 미국은 새로운 시기에 진입하
고 있었다.
b. 1930년대. 경기침체가 이 시기의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1937년 킨첼로(Samuel C.
Kincheloe)는 유익한 「대공황기의 종교에 관한 연구 메모(Research Memorandum on
Religion in the Depression)」를 저술했다. 그는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 사람들로
하여금 개신교 주류 교단들(the mainline Protestant denominations)에 몰입하게 하지 않았
다고 지적했다. 부흥운동의 상당한 부분은 소교파들(sects: Pentecostal, Holiness 등)사이에
서 일어났다. 이들은 경제공황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목회했다. 보이슨
(A. T. Boisen)은 "종교와 시련기"라는 한 연구 논문에서, 때로 "떨떨이들(Holy Rollers)"이
라 불리던 사람들의 종교적 현상과 활동을 서술했다. 이들이 강조한 것은 "방언
(glossalalia)", "거룩", 그리고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을 특히 중시하는 종말론을 특징으
로 하는 카리스마적 요소였다. 물론 분파주의 그룹들의 빠른 성장은 대공황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주류 교단들이 소종파들에 가담한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없었던 사실의 결과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이슈는 주로 문화적이고 사회학적인 것이었다. 교육수준이 낮고 문화의 혜
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복음성가들 대신에 장엄한 찬송가를 부르며, 그
들의 평범한 옷과는 대조적으로 사치스런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에서 편안하지 못
했다.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과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교육수준이 높은 중심층으로 이
루어진 오래된 교회들에서 리더쉽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이 "오순절(Pentecostal)" 운동은
193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이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적 현상"일
것이다.
또 하나의 그룹이 전후 시기에 등장했는데, 이는 부크만주의(Buchmanism)이었다. 부크만
주의자의들(Buchmanites)은 부크만(Frank Buchman, 1878-1961)을 따르는 무리들이었다.
그는 미국의 루터교 목사였다. 이 운동은 영국에서 옥스포드 그룹 운동(the Oxford Group
Movement, 1921)으로, 미국에서는 도덕재무장운동(Moral Rearmament)으로 불렸다. 이는
사회의 중상위 계층에 호소력이 있었으며, "가정 파티들(house parties)"이 이들이 주로 사용
한 방법이었다. 이는 나중 "그룹 테라피(group therapy)"라 불리는 것을 제공했다. 주요
관심사들에 대한 비공식적 그룹 토의들(informal group discussions)에 강조점을 두었다.
1938년 이 운동은 엠알에이(M.R.A.)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제 2차 대전 발발 이전 기간에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주장하는 듯 했다. 인간과 국가가 도덕적으로 재무장하지 않으면 재
난이 곧 닥칠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는 "개인적, 사회적, 인종적, 국가적, 그리고 초국가적
변화"를 유발시키기를 의도했다. 이 운동은 60개국 이상의 나라들에 확산되었으나 작금에
는 쇠퇴해가고 있다.
c. 2차 대전과 이의 여파
제 2차 대전 시기 교회들의 주요한 희생은 바로 평화주의였다. 예컨대, 「기독교 세기(the
Christian Century)」는 평화주의 입장을 견지하던 주요 저널이었으나, 평화주의 견해에 대
해 괴로운 재평가 작업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 저널은 나치즘과의 전쟁은 "비극적인 필연
성(a tragic necessity)"이라고 말했다. 물론, 포스딕이나 바트릭(George Buttrick)과 같이
평화주의 입장을 고수하던 자들도 있었다. 니버(Reinhold Niebuhr)가 편집장으로 있던
「기독교와 위기(Christianity and Crisis)」는 미국의 제 2차 대전 참전 직전 발간되기 시작
했는데, 이는 전쟁에 대해 "현실주의적(a realistic)" 견해를 개진했다. 이는 교조주의적 평
화주의(doctrinaire pacifism)에 회의를 품었으며, 전쟁은 두 악들 가운데 작은 악(the lesser
of two evils)일 수 있다는 견해를 보지했다. 이는 일본의 진주만(Pearl Harbor) 습격(1941)
이후 영국과 미국의 참전을 고무시켰다.
제 1차 대전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던 교회들의 성전적인 입장(the crusading attitude)은 제 2
차 대전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많은 미국 기독교인들에 있어서 제 2차 대전은 히
틀러의 등장으로 인해 냉혹한 필연성처럼 느껴졌다.
전쟁 말기에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점증하는 공포가 미국 교회들에게 만연하게 되었다. 동
구가 공산주의 통치 아래 들어가자 이 두려움은 심화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의
무신론적 요소로 인해 공산주의는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의심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소련과의 "냉전(cold war)"은 특히 교회의 대대적인 지원 아래 발전되었다. "철의 장막(iron
curtain)"과 베를린 장벽(the Berlin wall)으로 인해 양극화 현상은 심화되었다. 유럽의 나토
(NATO) 그리고 아시아의 시토(SEATO)가 강력하게 지원되었다.
제 2차 대전 직후 군비지출은 삭감되었으나, 러시아의 팽창 정책(expansionist policies)과 한
국동란(1950)은 이 정책의 기조를 바꾸어 놓았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을 때 트루만
(Harry Truman)의 남한 지원에 대한 대대적인 후원이 뒤따랐다. 그 이유는 군사적인 힘으
로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미국인들과 교회들은 인도차이나 전쟁
(Indochina War, 1954-71)에의 개입 문제를 놓고 입장이 양분되었다.
d. 최근의 발전. 미국의 1950년대는 종교적 "부흥(revival)"의 시기로 특징지워졌다. 이는
통계수치들을 보아도 잘 알수 있다. 교회 교인들의 수와 예배 참석자의 수도 증가했다. 빌
리 그래함(Billy Graham)은 이 부흥운동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무수한 사람들 앞에
서 미국과 해외에서 설교했다. 회심자들을 지역교회들과 연계시키고자 하는 많은 노력들이
기울여졌다. 그래함과 그를 모방하려고 했던 다른 사람들의 부흥운동은 계속되었다. 그러
나 1960년대는 수적 성장보다도 "갱생(renewal)"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함께 시작되었다.
개인과 교회의 갱생은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이들은 이를 위해 그들의 삶을 점검하기를
원하고 기독교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소그룹들에 관심을 두었다. 이 스타일은 경건
주의와 도덕재무장운동을 생각나게 한다. 1960년대 중반부터 일부 사람들은 종교적 "혁명
(revolution)"의 시기를 이야기했다. 아마 "혁명"이라는 말은 어감상 너무 강한 말인지도 모
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시기는 종교에 관한 한 급속하고도 중요한 변화를 특징으로
하던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과거 20년(1980년대와 90년대)은 신보수주의와 신근본주의의 출
현을 특징으로 하는, 재평가의 기간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 초의 보수주의적 무드는 어느
의미에서 60년대와 70년대 미국과 카나다에 있어서 정치 및 종교상의 과격한 변화에 대한
반작용이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영속적인 가치들을 보수하면서 한편으로
필연적 변화들에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일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과업이 아닐 것이
다. 갤럽(George Gallop)은 다음 10년간은 미국이 종교적으로 더욱 더 다원주의적이고 덜
프로테스탄적인 경향을 노정할 것으로 예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