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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되는 길이 있다
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요한복음 9장)
수난 예고 – 어긋난 응답 – 가르침(제자도)
예수께서는 세 번에 걸쳐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셨다고 알려집니다. 마가복음에서, 그 예고는 모두 “길에서”라는 공간적 부사구와 연결됩니다(8:27; 9:33-34; 10:32). 그런데 그 세 번의 경우 모두는 비슷한 행태의 반복입니다. 예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고, 말씀을 오해하는 제자들의 어이없는 반응이 뒤따르고, 못 알아듣는 제자들을 다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같은 과정이 세 번에 걸쳐 계속됩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에 해당하는 이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외면하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제자의 길’에 대해 교훈하십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8:31-9:1)와 두 번째 예고(9:30-37) 사이에는, 예수께서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던 변모산 사건(9:2-13)이 있었고, 산 아래 내려오셔서 한 아버지의 간곡한 간청으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신 일(9:14-29)이 있습니다. 세 명의 제자는 변모산에서 예수의 영광을 목도하지만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그 사이 산 아래에서는 남은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실패를 겪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낫지 않은 상황에서 예수께서 돌아오시자,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를 붙잡고 말합니다.
아버지 :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
예수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아버지 :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대화에서, 아버지는 믿음 있음과 믿음 없음의 경계에 있습니다. 마치 맹인이 눈을 떴지만 희미하게 보고 있음과 같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이와 같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가르침 (31-32절)
수난 예고는, 단순히 고난과 죽을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예고가 아니라, “그리스도는 무엇을 하셔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didasko) 말씀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8:29)는 가르침을 수용한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이 새로운 가르침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고 묘사됩니다. “죽음”이라는 말이 두 번씩이나 강조된 까닭이기도 하겠습니다.
예수의 말씀 마지막에는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분명히 명시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왜 이리 두려워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죽는다는 말에 집착한 나머지 살아난다는 말을 못 들은 것일까요? 그보다는, 그리스도는 죽어가는 이들을 살려내야 할 분이지, 죽었다가 살아나는 분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활이란, 억울하게 희생당한 의인이 정당한 판결을 받기 위해 다시 살아 하나님 앞에 서는 종말 사건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부당한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인데, 모든 부당한 죽음을 종식하고 의인들을 구원하셔야 할 그리스도가 부당한 죽음을 겪음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살아나실 분이 아니라 죽지 않으셔야 할 분인 것이지요.
제자들의 반응 : 길에서의 논쟁, “누가 크냐?” (33-34절)
예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를 듣고 나서 가버나움으로 가는 도중에, 제자들 사이에 다툼(쟁론)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다음에는 제자인 베드로가 선생인 예수와 다투었는데, 두 번째 수난 예고 때는 제자들끼리 다툽니다. 예수께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고 물으셨을 때(33절),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차마 예수께 말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34절).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끼리 치열하게 공방을 벌인 쟁론의 주제는 ‘우리(제자들) 중, 누가 가장 크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수난과 죽음을 언급하신 맥락에서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는 논쟁이 있었다는 것은, ‘누가 예수의 후계자인가?’를 두고 각축을 벌였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도마복음서 12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우리는 당신이 우리로부터 떠나가실 것을 압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들의 지도자가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대목이 있는데, 아마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후계자 논의에 돌입하는 제자들이 어이없긴 하지만, 남은 이들에겐 늘 이런 관심사가 우선적일 수밖에 없고, 그에 초연할 수 없음이 인간의 정황입니다.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상황을 가정했을 때, 후계자의 문제는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된 시급한 일이며 일차적인 숙제이지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35절)
한데, 후계자 지정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누가 리더인가와 관련한 서열 관계는 모든 사람의 지대한 관심사입니다. 고대 랍비 문헌에는 ‘낙원에서 앉게 될 자리 순서’에 대한 언급들이 있는데, 지상의 예배 때에 앉는 순서, 혹은 식탁에서의 자리, 혹은 공동체 내에서의 권위에 따라 결정된다고 봅니다. “지도자가 되는 법”과 관련한 계발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오늘날의 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일등이 되고 싶은 욕구를 막을 도리가 있을까요? 신앙과 희생과 충성과 성실과 의로움조차도 첫째가 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께서는 첫째가 누군지 공방을 벌이는 제자들을 나무라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모으시고 ‘첫째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앉음”(35절)는 가르치는 스승의 전형적인 동작입니다(눅4:20) ‘모든 사람의 끝이 되어 모든 사람을 섬겨라.’(35절)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함정 : 뭇 사람의 끝이 되고 뭇 사람을 섬김 (35절)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제각각 자기가 맨 끝(꼴찌)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또한 서로 섬기겠다고 경쟁적으로 나섰다고 합시다. 내가 꼴찌라고 내가 섬기겠다고 앞다투는 상황에서, 그 꼴찌는 진정한 꼴찌가 아니며 그런 섬김은 섬김이 아닙니다. 다만 다른 첫째라는 인정을 받기 위한 꼴찌 됨과 섬김은 위장일 따름입니다. 어디에나 그런 사람은 넘치고,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어려움에 빠뜨리는 이들은, 자신이 꼴찌라고 주장하면서 종이라 자처하는 이들입니다.
‘첫째가 되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한, 꼴찌가 되겠다는 결단은 속임수이며, 남을 섬기는 삶은 위선이 됩니다. 예수께서 의도하신 것이 이런 것일까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꼴찌인 척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 꼴찌가 되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척’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는 얘깁니다. 종이란 태어날 때부터 종이요, 죽을 때도 종입니다. 종 아닌 무엇도 꿈꾸거나 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꼴찌로 살고 그런 종으로 섬기라는 뜻이지요.
어린아이를 데려와 안으시다 (36절)
꼴찌가 되려면 꼴찌 밑에 자리하면 됩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데려와 제자들 앞에 세우신 것은, 고대사회에서의 꼴찌는 어린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를 귀하게 여기는 오늘날과 달리, 고대 세계에서 어린아이는 사람이 아니라 비존재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30%의 아이가 유아 시기에 죽고, 살아남은 유아 중 30%는 6세를 넘기지 못합니다. 대체로 모든 아이 중 60%는 열여섯 살을 맞지 못했다고 합니다. 질병 등으로 많이 자연사한 이유도 있지만, 학살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연약하고 무력한 어린아이는 생산노동이나 싸움에 참여할 수 없기에 쓸모없는 존재일 따름이었습니다. 쓸모가 없기에 전쟁이나 기근이나 질병에서 아이들이 가장 먼저 희생당했고 버려졌습니다. 노예는 사고팔 가치라도 있었기에 살아남지만, 누구도 부모 없는 아이들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대사회에서의 꼴찌는 어린아이인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그 아이를 안으십니다(36절). 아이를 안는 행동은 그 아이의 가족이나 혹은 그 아이를 주인으로 받드는 노예가 하는 일입니다. 내 자식이 아닌 아이를 안아주는 어른이 있다면, 그 어른은 그 아이의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를 꼴찌로 인식하는 사회에서, 아이의 종은 두말할 나위 없이 꼴찌입니다.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37절)
아이들을 안으신 예수께서는 어른들(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이 그림은 어른들의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 있습니다. 보통 ‘아이들을 가르치고 어른은 접대받아야 한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축복하시고, 어른들을 가르치십니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환대)하면 곧 나를 영접(환대)한 것이다”(37절)는 말씀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어린아이를 환대하는 일이 “내(예수) 이름으로” 수행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에 따르기 위함이 아니라면, 아무도 이렇듯 어린아이를 환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환대는 지중해 연안의 고대 세계에서 최고로 중요시되던 덕목이었고, 환대는 곧 자신의 명예와 직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대는 손님에게 국한되었습니다. 환대의 범위를 더욱 폭넓게 확장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라, (손님을 넘어) 나그네까지 환대하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환대에서 어린아이는 제외되었습니다. 어떤 전통이나 계명이나 스승도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세상에서, 예수 홀로 어린아이를 환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니 어린아이를 환대함 자체는 예수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는 예수의 말씀은, 당시의 어린아이들이 흔히 겪는 운명이었습니다. 예수의 탄생 때도 어린아이들이 학살당했다고 성경은 알려줍니다(마 2장). 그렇기에, 비참한 어린아이의 신세는 예수의 길이 될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어린아이를 환대함은 예수를 환대함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환대하는 이는 예수를 보내신 분 곧 하나님을 환대함과 같다고 선언됩니다.
길에서, 제자들은 후계자가 될 것인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후계자는, 선출이 아니라, 스승이 지명합니다. 마태복음(16장)과 요한복음(21장)에서는 베드로가 지명되고, 도마복음에서는 야고보가 낙점받습니다. 그런데 낙점하시는 예수께서는 고난을 겪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는 꼴찌의 길을 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꼴찌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유는, 수많은 경쟁자를 제쳤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도 경쟁하려 하지 않는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를 따라 꼴찌로 사는 사람, 그 역시 첫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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