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51) 개념적인 언어를 해체하라 - ② 시적 상상력과 창의성/ 시인, 우석대 문창과 교수 안도현
개념적인 언어를 해체하라
Daum카페/ 단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아라/ 안도현
② 시적 상상력과 창의성
상상력은 무엇보다 창의성과 긴밀하게 동거한다.
아동의 창의성 교육에 관한 이론이 일상에서 ‘시적인 사고’와 ‘시적인 상상력’을 추출하려는
우리의 관심과 거의 유사한 접근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즉 창의적 사고와 시적 사고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한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현대창의성연구소 소장 임선하 박사에 의하면 창의적 사고의 기능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임선하, 『창의성에의 초대』, 교보문고, 1998, 117~121쪽)
첫째, 민감성이다.
주변의 환경에 대해 예민한 관심을 보이는 능력을 이른다.
자명한 현상에서도 문제를 찾아보고, 나와 친숙하지 않은 이상한 것을 친밀한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그렇다.
둘째, 유창성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능력이다.
초기의 아이디어가 최선의 아이디어인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보다 많은 아이디어를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최선의 것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들로부터 많은 것을 연상하기,
문제 상황에서 가능한 해결방안을 있는 대로 많이 찾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 융통성이다.
고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시각 자체를 변환시켜 다양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상투적이고 고정적인 사고의 틀을 깨고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것이다.
전혀 관계없는 사물들의 유사점을 찾아본다든지,
사물의 구체적인 속성에 주목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넷째, 독창성이다.
기존의 것에서 탈피하여 참신하고 독특한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능력이다.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나만의 것을 찾고,
기존의 생각이나 가치를 고려해서 발전시키는 활동이다.
다섯째, 정교성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기존의 아이디어를 보다 치밀한 것으로 발전시키는 능력이다.
헝클어지고 조잡한 생각을 다듬고 그것의 실제적인 가치를 고려해서 발전시키는 활동이다.
이와 함께 이 책에서는 창의적 사고의 성향을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자발성, 독자성, 집착성, 호기심이 그것이다.
이런 용어는 ‘상상력·독창성·확산적 사고·창조성·발명·직관·모험적 사고·
창출·탐구·창안’과 더불어 시를 읽고 쓰며 상상력을 공부하는 우리의 잠든 의식을 적절하게 자극한다.
시인들이 때로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이거나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기인으로 비치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덜 떨어진, 철없는 낭만주의자로 인식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들이 인생의 모범생이 되지 못하고 일탈을 꿈꾸거나 혁명을 갈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온 시집의 겉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에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의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고영민의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전문이다(고영민, 『악어』, 실천문학사, 10쪽).
소재는 시집을 찢어 똥을 닦는 화장지로 쓰는 이야기다.
겉으로 보면 시인과 시에 대한 결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가 되는 변화의 과정을 읽으며 우리는
어떤 통쾌한 울림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낀다.
또 시인은 이 휴지로 밑을 닦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읽는다’고 한다.
항문이 시를 읽는다는 것이다.
항문만큼도 깨끗하지 않은 눈으로 시를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휴지로나 쓰일 시 따위는 쓰지 말라는 뜻일까?
이 시의 해학과 세계에 대한 비판적 안목 역시 상상력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시를 쓰는 일은 마음속에 상상력 발전소를 차려 가동하는 일이다.
그 발전소에서 당신은 먼저 머리에 입력된 모든 개념적 언어를 해체하라.
정진규의 말처럼 시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말을 버리고 ‘어머니의 고봉밥’이라고 말하는 데서 시작한다.
개념어는 삶을 일반화해서 딱딱하게 만들지만 구체어는 삶을 말랑말랑하고 생기 있게 만든다.
나는 바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계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비의 말을 새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측량이 되기 전에는
나는 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해석이 되기 전에는
나는 대지의 말을 받아적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동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숲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시제가 되기 전에는
이제 이들은 까닭없이 심오해졌습니다
그들의 말은 난해하여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측량된 다음 삶은 터무니없이
난해해졌습니다
내가 계산되기 전엔 바람의 이웃이었습니다
내가 해석되기 전엔 물과 별의 동무였습니다
그들과 말 놓고 살았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소용돌이였습니다
백무산의 「나도 그들처럼」 전문이다(백무산, 『거대한 일상』, 창비, 2008, 92~93쪽).
여기에서 ‘바람·비·별·대지·숲·물’은 물기를 가진 구체어라면
‘계산·측량·해석·부동산·시계’는 딱딱한 개념이다.
구체어는 따뜻한 이웃이면서 살가운 동무지만 개념어는 저 혼자 심오한 척, 난해한 척한다.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개념은 ‘소용돌이’ 없는 생, 즉 상상력 없는 삶을 구성할 뿐이다.
때로 상상력의 발전소가 이유 없이 정전이 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거나 조급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나는 글렀어, 하고 체념하거나 포기해서도 안 된다.
어둠 속에서는 어둠을 오래 바라보라.
시각이 닫히면 청각이나 후각이 열릴지도 모른다.
당신은 상상력을 위해 자신에게 맞는 필기구를 준비해두고 자신만의 장소를 찾아갈 필요가 있다.
가지고 있는 것의 절반쯤을 과감하게 버릴 필요도 있다.
상상력을 위해서 며칠 동안 세수를 하지 않고 수염을 깎지 않은들 어떠리.
시는 놀이가 아니라 상상력의 게임이니까.
상상력으로 승부를 걸고 싶은 당신은 체 게바라의 말을 상상력 발전소의 연료로 써라.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4. 5.31.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51) 개념적인 언어를 해체하라 - ② 시적 상상력과 창의성/ 시인, 우석대 문창과 교수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