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52) 가치와 육신의 표출 - ① 꿈의 이상/ 시인 이승섭
가치와 육신의 표출
네이버블로그/ 꿈과 이상
① 꿈의 이상
인간은 개인차에 따라 삶의 모양에 있어 각각의 특성과 기질이 있다고들 한다.
물론 한 가지로 규격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소 어렵겠지만 성품과 체득,
체험이 결합하여 나타나는 가치 상상의 질과 육신의 표출 소유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꿈속의 르네상스를 그리며 살아가는 사람과 뜻을 가지고
굽히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상의 나래를 펴고 사는 사람 이상을 찾아가는 등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살아갈 것이다.
꿈과 상상이란 수학으로 나타낼 수 없는 일정 값이 아니라 수시로 변한다는 점에서는
환경, 배경, 기질 등이 가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체험과 체득은 인간마다 갖는 범주가 있기 마련이다.
소심한 사람은 행동에 수반하는 영역이 있고 상상의 범주도 그러한 경계로
사고를 진정시킬 것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이의 상상이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꿈과 상상이 있을 것이지만
사람의 상상은 환경에 따라 자기를 연결하는 한계의 경향이 있기에
자기만큼의 상상에 이름이 탄생되지 않을까.
덧붙여 예술이라는 명제에 적용한다면 이런 상상의 표출은 표현하는 당사자의 작품에 무게와 연결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예술가의 작품에 기준을 둔다면 평범함에 머무는 작품으로 표현된다는 뜻이다.
물론 예술로 표현된 작품에는 저마다 독특한 개성이 용해되어 나타나는 것은
생명체로 바라보는 관점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얼굴이 예쁜 사람이 있고 또는 외면받는 얼굴도 있지만
모두 그 나름으로 생명의 표정이라 칭하면 이 또한 개성에 이른다는 말이 될 것 같다.
이는 그 얼마나 비약의 확장을 할 수 있는가 또는 아닌가를 하는 이유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아는 상상은 이상이 가져오는 묘미가 아닐까?
이는 의식의 확장일 수도 있고 또한 의식이 무한으로 진전하는 길을 만들어
체험의 인자들이 따라오는 길을 확장한다는 뜻을 첨가하면
비약이 갖는 원인은 결국 예술의 표정을 더욱 신선하게 꾸미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 같다.
그러나 비약이 없는 경우엔 예술의 가치는 감소할 것이다.
여기서 논리의 틈은 아무런 설명 못하고 오로지 분위기라는 기분에 압도당하는 점에서 설명이 어려워진다.
또한, 얼굴 모양의 대비라거나 이쪽과 저쪽의 균형미를 이론적으로 대비할 겨를이 없다.
하지만 당도한 매혹에서는 아무런 설명조차 불가하다는 분위기를 맛볼 정서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은 뒤쫓아 오면서,
합리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습관이라면 대부분 학문은 추상의 길을 헤매는 이유가 숨어 있을 것이기에.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유가 있지만, 그 나름 자체로 설명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지구상에는 모두가 예술로 구성된 자연이 있고
인간도 그 일부분이기에 굳이 우열을 따지는 일은 안 될 것이지만
표현 그 자체에 상상력이 없다면 더하기를 할 수 없는 흥미가 아예 없다.
때문에 결과에서는 가치의 개념이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하여 예술은 가치의 개념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과 꿈 조립이 어디까지 구사할 수 있는가의 여지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끝을 보는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이 뒤집어서 전시돼도 상상의 그물은 펼쳐질 것이며
무엇인가 말을 생산하는 일은 지속될 것이다.
여기서 상상의 자유로운 추출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피카소나 전위 예술의 필요성이 나타날 것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백남준 선생의 작품을 예로 들면,
번쩍거리는 TV 화면의 다양한 연결 고리에서 느끼는 종점은 상상의 자유로운 구사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은 상상의 자유로운 의미를 확보할 수 있도록
여지가 많은 작품으로 인정을 받지 않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강박을 풀지 못하고 스스로 갇히는 성을 쌓기 때문에
예술가라는 칭호에 멀리 있게 된다는 점은 참으로 안타깝다.
과학자는 예술을 알 때 바로 상상의 증명이 곧 과학이 된다는 이치에서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예술의 상상 요소로 하여 과학이나 철학 심지어 수학조차도
예술가의 기질을 필요로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예술은 예술가만의 전유물이라고 사유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는 자기의 성(城)을 지키는 수성의 주인일 뿐 영토를 확장하는 개선의 예술인은 될 수 없다.
누구나 자기의 성은 갖고 있지만 문을 열고 혁명의 칼날을 내면으로 돌리는 치열성에서 해답이 된다면
최면 속에서 나와 자유롭게 유영하는 주인공이 되어야만 윤택한 문화의 향수자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주꾸미는 소라 껍데기에 들어가는 것 때문에 어부에게 잡히는 것이라면
응당 이런 일에 자기 부정이 있을 때 생존의 길이 보일 것이다.
여기서 비약이라는 말은 자기를 향해 메스를 들이대는 혁명적인 행위가
결국 타성의 벽을 허무는 일과 병진하는 결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은 자유를 먹고 길을 만들 뿐만 아니라 자유 속에서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확장성에서 개인의 예술혼을 윤택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직업이다.
본인의 성에서 문을 열고 과거의 모습을 지우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나서는 일에 다름이 아닐 것 같다.
인간의 상상력은 변용의 변화를 거칠 때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된다.
나를 낳은 여자라는 어머니의 정의나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인 결합물인 액체를 물이라고 설명하는
사전적인 의미에는 삭막한 느낌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어머니나 물에서는 기쁨과 자애를 느끼는 것이 문학의 가치이다.
때문에 문학적 삶은 윤활유요 생의 의미를 화려하게 꾸미는 역할을 한다.
화학적인 변화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이 도래하기 때문에 감동이 물길을 내는
이치처럼 문학은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임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삶의 문제를 상상하는 의식 세계는 각기 다른 형태로 자기 합리화시키는 것이기에.
다시 말하면 환경적인 요건이 성장의 여건 혹은 성품 등에 의해서
자기 구축의 방편이 다를 수 있다는 학설이다.
인격이란 생물학적인 유기체가 사회적인 세계와 상호 소통 혹은 작용을 함으로써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의 표출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쌓으려는 욕망이 아니라 무심의 경지로 화하는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대상이다.
일상인의 정서와는 다른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사물을 통찰하는 눈,
심안(Mind’s Eye)의 경지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상의 표출은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범인들은 현상의 눈, 가시의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가는 길은 제한이 없고 무한의 거리를 질주할 수 있음에서 형형한 공간을 점유할 수 있게 된다. 상상의 표현 대상에 감정이입의 동화를 구현할 때 목표치에 도달되는 것이다.
현실의 상황에서 정신의 가치, 상상의 가치가 육신의 가치를 드높인다.
둘은 서로 보완 작용하는 작동이 상상의 나래가 펼쳐질 것이기에
인간은 희망의 불을 켤 줄 아는 지혜가 해답이 된다.
<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이승섭, 마음시회, 2022.)’에서 옮겨 적음. (2024. 6. 3.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52) 가치와 육신의 표출 - ① 꿈의 이상/ 시인 이승섭|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