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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금을 우리 안에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장)
안에서의 다툼, 바깥과의 대결
예수께서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실 때마다(막8:31-33; 9:30-34; 10:32-41) 제자공동체(교회)는 크게 동요합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은 메시아에 대한 어긋난 기대와 몰이해, 욕망, 갈등, 충돌을 있는 그대로 표출합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가 있은 후, 길거리에서 "누가 크냐?"고 제자들끼리 다툰 일이 그러합니다(9:30-37). 예수 이후의 후계자 구도와 관련되는 '누가 크냐?'의 논쟁은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원시교회 안에서 수위권을 놓고 사도들과 교회 안에서의 갈등이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모든 집단이 권력을 놓고 벌이는 내부 암투로서, 제자공동체(교회)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주도권을 두고 벌이는 경쟁은 신앙공동체 내부에서도 일어나지만, 공동체 외부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에서도 생겨납니다. 9:33-34이 제자공동체 안의 구성원들 사이에 벌어진 각축(角逐)을 반영한다면, 9:38은 제자공동체가 바깥의 사람들(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과 벌이는 각축을 보여줍니다. “우리”를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축출하고 있는 사람의 사역을 금지했다는 요한의 보고는, 제자공동체인 교회가 내부자와 외부자를 구별하고, 외부자들의 자격을 시비하고 따지고 제약을 가하는 상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구별과 배타
누가 “우리인지”, 누가 “우리가 아닌지”를 구별해야 하는 일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와 "우리가 아닌 이들"을 가르지 않는다면, 우리 존재의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한 몸 안에서도 눈은 눈으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한국인과 중국인도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고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도 사이에도 차이가 존재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도 구분되는 경계가 있고, 감리교와 장로교도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자신의 고유한 정체와 특성을 가진, 독립적 존재라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존재를 지속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지만, 대결을 야기하고 충돌을 일으킵니다. “나” 혹은 “우리”를 힘주어 강조할 때, 정체성은 특권의식으로 변질하게 되고, 우리의 특권을 정당화하려는 욕구로 발전합니다. 그럴수록 우리 편의 결속력은 강화되고 소속감과 충성심이 배가됩니다. 이 목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보통 “배타(排他)”의 칼을 휘두르는데, 외부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을 보존하려는 방법입니다. 기득권을 강화하거나 지키려는 이들이 “우리 편”을 강조하며, “우리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배타합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선민의식
유대교의 배타성은 선민(選民)의식을 근간으로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거룩은 구별이라는 의미)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이스라엘의 자의식(自意識)은, 오랜 고난과 박해의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의 신앙과 민족성을 지켜내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는 그 선민의식이 강력한 배타의 논리로 작용했습니다. 이방인을 경멸하고 죄인을 차별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예수는 죽임을 당했고, 원시교회는 거절과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유대교의 선민의식과 유사하게, “우리는 부름 받은(구별된) 공동체”라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자의식은 종종 특권의식으로 왜곡되어,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그리스도교가 배타성의 극단을 보여주는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요한의 주장처럼,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 내쫓는 것을 불허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많아지고 교회가 힘을 가지게 된 시대에는 어김없이 이런 식의 배타가 자행되었습니다.
요한의 주장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자라도 우리를 따르지 않으니(우리에게 속하지 않았으니) 자격이 없다는 얘깁니다(38절). 공동체 안에서 제각각 “내가 크다”고 분열하던 제자들이, 공동체 외부에 있는 이들을 향해서는 “우리를 따라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냅니다. 역사적으로, 비대해진 권력을 놓고 분쟁하던 교회와 기독교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십자군의 깃발 아래 집결하던 중세 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을 금하지 말라(39절)
“너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선언은, “너는 우리 편이 되라”는 압박입니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귀신 축출 사역을 막았다는 것은, 우리가 곧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오만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독점하고 있다는 독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보다 우리 자신을 더 높은 기준으로 올리는 자기 신격화이기도 합니다.
귀신을 쫓는 일은, 마가복음에서, 예수께서 가장 많이 행하신 대표적인 구원(해방) 사역입니다. 그런데 해방의 일을 수행할 자격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 “우리 편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면 어불성설입니다. “우리 편에 속해 있기만 하면 당신은 무얼 해도 문제될 게 없는 반면, 우리 편이 아니면 모든 것이 문제”라는 논리는, 당시에 최고의 힘을 가졌던 로마가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내걸었던 기치인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와 같은 편이면 평화를 누릴 것이고, 로마와 한 편이 아니면 평화로울 수 없다는 논리는 자주 예수의 제자공동체인 교회 내에도 팽배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우리 편이 아니라고 해서 금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다”(41절)라는 말씀은 눅 9:50에도 발견됩니다. 이에 반해,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라는 말씀도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마12:30; 눅11:23). 서로 모순되게 보이는 이 두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공동체)”와 “나(예수)”의 차이를 보아야 합니다. “나(예수)”와 함께하지(따르지) 않는 자는 예수를 반대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우리(교회)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를 반대하는 자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이라도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41절)
“누가 큰가?”의 논쟁에 답하신(9:35-37) 예수께서는, 이어지는 논쟁에 대해서도 가르침(제자도)을 제시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다"(40절)는 말씀은 배타성을 무력화시키는 원칙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조건으로도 공존의 이유가 충분합니다. 또한 “우리” 혹은 “우리 편”에 속해야 한다는 배타적 기준을 넘어, '그리스도에게 속한다'(41절)는 더 포괄적인 기준이 제시됩니다.
이어,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41절)”고 말씀하십니다. 상을 받게 되는 자격은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에 있지 않고, 물 한 그릇을 주는 행위, 즉 환대의 행동에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누군가가 포도주를 적신 해면(스펀지)을 갈대 끝에 꿰어 예수의 입에 대어주는 일이 있었습니다(15:36). 그가 예수의 편이었는지 적대자였는지는 모르지만, 예수께서 그것을 외면하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물 한 그릇을 주는 작은 환대에도 반드시 상이 수여될 터인데, 귀신을 쫓아내는 자비의 행동에 상이 없을 리가 없겠지요. 우리 편에 속했든 아니든, 예수께서 편가름 없이 사랑으로 행하시듯이, 그 사람이 환대와 자비를 행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실족하게(범죄하게) 하면 … (42, 43, 45, 47절)
이어, “작은 자들”을 실족하게(skandalizo) 하는 자에 대한 심판이 언급되는데, 그는 연자맷돌을 목에 묶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42절). 맥락을 고려하면, 작은 자들은 “우리 편에 속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스칸달(skandal)”은 “덫”이라는 말로서, 그 동사형인 “스칸달리조”는 ‘덫을 놓다’, 즉 ‘넘어지게 만들다’는 뜻입니다. 작은 자들을 실족하게(실망하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우리”이고, 구체적으로는 그들을 배타하거나 차별하는 정황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과장된 심판과 연결되는 것은 엄격히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뒤에 세 번 반복되는 ‘범죄하게 하다’(43,45,47절)는 동사도 “스칸달리조”입니다. 여기서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나의 손이요, 나의 발이요, 나의 눈입니다. 넘어지게 되는 원인이 남에게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같은 말씀이 등장하지만(5:29-30), 마가복음과 다른 맥락입니다. 유혹에 빠져 잘못을 범하는 것이 마태복음에서의 실족이라면, 마가복음에서는 작은 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실족입니다. 찍어내고 빼버려야 할 것은 나의 지체이지 남의 지체가 아닙니다. 즉, 우리 편이 아닌 이들을 색출하고 제거함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50절)
그리하여 마침내 성취해야할 것은 "평화(화목)"(50절)입니다. 산상수훈에서는 소금이 착한 행실의 의미로 해석되지만(마5:13), 오늘의 말씀은 소금이 지닌 맛이 평화(eivrhneu,w, 화목)라는 점을 적시합니다(50b).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는다”는 말을 새번역 성서는 “소금에 절여지듯 불에 절여진다”고 풀이합니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소금에 절이는 이유는 썩지 않게 하고 맛을 내기 위함입니다. 평화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변질하지 않도록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소금을 쳐야 합니다. 소금에 절어진 그리스도인이 평화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은 그런 의미로 해석됩니다.
소금을 넣으면, 소금이 사라지고 짠맛이 됩니다. 평화는 상대를 바꾸고 우리 뜻을 따르게 함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체를 쳐내고 우리 자신을 내어줌에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평화의 길을 여신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제자도입니다. 우리를 지키겠다는 목적으로 상대편을 배타하는 방식으로는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와 너희를 구별하는 장벽을 넘어,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는 일을 위해 교회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평화는 예수께서 자신의 수난을 통해 성취하신 구원이며, 모든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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