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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완악함 때문이다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마가복음 10장)
시험 :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본처와 이혼하고 헤로디아라는 여인과 재혼한 것을 비판했다가 참수를 당해 죽었습니다(막6:17-28). “(헤롯이 이혼하고)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옳지 않다”(6:18)는 요한의 말은 자기의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헤롯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이혼은 옳지 않다고 공공연히 말한다면 무사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무리가 보는 가운데 ‘사람(남자)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 바리새인들(2절)의 물음은 예수를 위험에 빠뜨릴 적절한 올가미로 작용합니다. 그 바리새인들은 이전에 헤롯당과 손을 잡고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를 논의했던 적이 있지요(3:6).
“옳다, 옳지 않다”의 답변을 요구하는 이 물음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12:14)고 물을 때와 똑같은 노림수를 감추고 있습니다.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답한다면, 모여든 무리(10:1)는 예수가 헤롯을 두려워하는 비겁자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이혼의 부당함을 주장한다면, 예수는 권력자 헤롯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것입니다. 어떤 대답을 한다 해도 예수는 궁지에 몰릴 것이니, 이 질문이 시험인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 시대의 결혼과 이혼
바리새인들의 표현에 의하면, 유대 사회에서 이혼은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버림’은 소유자가 자신의 소유를 폐기한다는 의미이고 보면, 아내가 남편의 소유라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여자를 ‘소유물’로 여기는 인식은 고대 시대 대부분 사회에 만연했습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여자는 아버지의 소유이고, 결혼한 다음에는 남편의 소유였습니다. 결혼은 신랑이 지참금을 신부의 아버지에게 주고 소유권을 가져오는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소유권자인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은 전혀 부당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시대의 결혼이 지니는 특징은, 결혼은 당사자인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 의한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가문과 가문 사이의, 다분히 정략적 목적의 결합이었다는 점입니다. 두 가문은 각각의 아들과 딸을 혼인시킴으로써 가족 영역을 넓히고 경제적 이득이나 권력을 확장합니다. 결혼은 당사자들의 의사와 약속에 의하지 않고, 아버지들의 결정으로 성사되었습니다. 결혼을 매개로 하는 이익을 거래하는 경향은, 귀족이나 권력자들 가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평민들에게도 일반화된 관습이었습니다.
아내를 포함하여, 무엇을 소유하거나 버리는 것은 일차적으로 손익(損益)의 견지에서 실행됩니다. 이득이 되면 소유하고, 쓸모없으면 버립니다. 헤롯왕이 본처와 이혼한 데에는, 죽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재혼하여 빌립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작동했습니다. 결혼과 이혼은 강자의 유익에 봉사하는 도구였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예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로마 사회에서는 여자 쪽(가문)의 힘이 더 강할 경우 여자가 남자를 버리기도 했습니다(12절).
모세는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3-4절)
시험하여 물음을 던지는 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이 뭐라고 규정하는지를 되물으십니다. 율법에 정통했던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의 계명을 주저없이 제시합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라는 이 계명은, 이혼에 관한 유일한 율법으로서, 이혼하는 남자들의 결정에 정당성을 주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내 아내가 아니다’는 내용의 이혼 증서는 그야말로 아내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부과되어 있습니다. ‘아내가 어떤 수치스러운 일을 저질러 남편의 눈 밖에 났을 경우’에만 이혼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릴 수 있습니다. 조건이 붙었다는 점은 함부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자가 범하는 수치스러운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율법학자들 사이에 여러 이견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간음’만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았고(샴마이학파), 남편의 뜻을 따르지 않는 모든 행동이 이혼의 사유가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힐렐학파).
너희 마음이 완악하기에 이혼이 허락된 것이다 (5절)
하지만, 이혼이 가능하다는 율법이 존재한다고 해서, 이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원수 갚음을 허용하는 율법 조항이 있다고 해서, 원수 갚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할 수 없음과 같습니다. 율법이 이혼을 용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이혼이 일어나는 현실(사람의 완악함, 5절) 때문이지, 이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완악함(porosis, hard-heart)이란 굳은 마음, 닫힌 마음, 배우거나 바꾸기를 거부하는 마음입니다.
“이혼해도 되느냐?”고 묻는 이들은 두 부류입니다. 하나는 헤롯처럼 이혼하기로 작정한 이들이고, 다른 부류는 이혼하는 이들을 비난하려는 이들입니다. 이혼하려고 작정한 사람은 어떤 만류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밀어붙일 것입니다. 반대로 이혼을 정죄하는 이들 역시 은 끝까지 이혼자들을 손가락질합니다. 그들이 ‘이혼이 가하냐, 불가하냐?’고 묻는 것은 그저 자기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함입니다. 시험하는 바리새인들처럼, 몰라서 혹은 배우려고 묻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결론을 지니고 있고,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결론을 바꿀 의향이 없습니다. 이것이 완악함입니다.
율법이 이혼을 허락한 이유는 아내를 버리기로 이미 작정한 이들 때문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들은 이미 마음을 굳혔고, 무엇으로도 되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율법은 이혼할 길을 열어줍니다. 이는 버림당하는 아내를 위한 배려이고, “이혼 증서를 써 주어서 내보내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이혼 증서는 남편이었던 남자의 소유물이 아님을 확인해 줌으로써, 버려진 여인에게 새로운 삶을 위한 가능성을 열어주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 : 둘이 한 몸이 되다 (6-9절)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결혼을 제도화하셨다는 창조 서사(창2:18-24)를 인용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남자가 혼자 있음을 좋지 않게 보신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시고, 그 여자를 본 남자는 “내 뼈 중의 뼈이고, 살 중의 살이다(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새번역)”(창2:23)고 찬탄합니다. 이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한 몸이 되는 일로 알려집니다(8절). 그러니 아내를 버리는 것은 자기의 몸을 떼어 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를 떠나서”(7절)라는 구절은, 남자와 여자의 결혼은 아버지와 가족의 결정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짝이 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결혼은 강제나 의무가 아니라 창조의 섭리로 생겨난 근원적인 축복이요 선물이라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선언됩니다. 하지만 완악한 이들은 자기 뜻과 결정으로 취하고 버립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도 올바로 간직하지 못하면 불행과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맞서는 인간의 욕망과 불완전함으로 인해 부부 관계는 파경을 맞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완전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아시며, 우리의 부족함을 긍휼로 품으시는 분이십니다. 율법이 이혼의 길을 열어주는 이유는, 이혼한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바탕으로 이혼이 허락된다는 뜻입니다.
재혼은 간음이다. (11-12절)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해 이혼이 허락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허락될 수 없는 이혼의 예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현재의 배우자를 버리는 경우입니다. 이는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전처와 이혼한 헤롯을 염두에 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무리가 있는 곳을 피하여, 제자들만 있는 집에서 하셨다는 정황도 이를 뒷받침합니다(10절).
제자들에게 일러주시는 이 말씀은 마가복음 공동체가 존재했던 로마 사회의 이혼 행태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기도 하는 정황이 그것입니다(12절). 이는 가문과 가문의 결합인 결혼에서 여자 쪽 가문이 더 힘을 가지고 있는 경우입니다. 정치적 성공과 경제적 이익에 따라서 이합집산하는 수단이 되어버리는 결혼제도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혼했다고 누구나 재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권력과 재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하지만 간음이 법적, 윤리적 죄를 뜻하지만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마 5:28)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간음을 저지르고 끌려온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요 8:1-11). 마태복음 5:28의 말씀은 간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1-11의 사건은 간음을 포함한 모든 죄가 용서된다는 선언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야 한다 (13-16)
예수의 두 번째 수난예고(9:30-32) 후에, 꼴찌(뭇 사람의 끝)가 되어 섬겨야 한다(9:35-37); 외부인(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9:38-50)는 가르침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버림을 받는 여인이 언급됩니다. 꼴찌, 외부인, 버려진 여인은 모두 가장 비천한 자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닙니다. 그리고 세 경우 모두에서 주어지는 가르침에서 어린아이(혹은 자은 자)가 등장합니다. 앞서는, 어린아이를 영접함에 관해 말씀하셨고(9:37), 이번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특별히 어린아이들은 바리새인과 비교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질문을 던지며 예수를 시험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만져주심(안수)을 바라고 예수께 옵니다. “안수(apto)”라는 말은 치유의 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1:41; 3:10; 5:27; 6:56; 7:33; 8:22), 이들은 병약한 아이들로 추정됩니다. 제자들마저도 이들이 예수께로 오는 것을 꾸짖고 거절할 정도로, 아이들은 멸시당합니다.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영접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분노하십니다.
주님은 어쩔 수 없는 이들의 편에 서시는 분입니다. 혼인과 이혼이라는 고대의 권력 제도에서 희생되는 여인들의 편이시며, 오늘날엔 결혼을 감당할 수 없는 약자들의 편이십니다. 그리고 힘없고 무시당하기 일쑤인 어린아이들의 편이시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버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을 가졌거나, 비판하고 단죄할 수 있는 지위에 섰거나,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의(義)를 지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수긍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신뢰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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